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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란 구성·연출,〈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 ‘대화를 위한 재현’
    REVIEW/Theater 2022. 3. 23. 23:41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박지영 배우.

    박지영 배우는 수어로만, 이원준 배우는 수어에 대사를 섞지만, 음성 언어의 비중이 크다. 박지연은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이며, 이원준은 작년까지 국립극단의 단원이었던 연극 배우이다. 이러한 정보는 공연 도중에 나온다.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이하 〈실패담〉)은 처음부터 수어를 하는 박지영을 중앙에 두며―그 바깥의 음성 언어로 출발함에도 그의 자리는 유지된다.―, 〈실패담〉은 박지영의 수어의 공간에 음성 언어를 동시적으로 작동시키지 않고 그의 온전한 무대로 위치시킨다. 부가적으로 음성 언어가 따라붙지만,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변의 위치에서만 작동한다. 이는 어떤 시차를 통한 번역, 더듬거리며 그 말을 따라가는 행위로서 성립한다. 

    언제나 음성 언어에 대한 번역으로서 시차적 작동으로 존재하던, 스크린의 작은 모퉁이 공간이나 무대 가에 위치하던 수어는, 온전한 하나의 시공간에 위치한다. 그는 음성 언어를 번역하고 따라가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표현하는 데 진심을 다한다. 이는 매끄러운 몸짓과 온전한(?) 언어 자체로 아마도 드러난다. 〈실패담〉이 김미란 연출이 “지영의 세계에 속해있는 관객”을 떠올리며 구상한 공연인 것처럼, 지영은 부속적이거나 보조적인 역할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여기서 그와 상대를 이루는 중심인물인, 결국 수어를 어설프게 쓰는 이원준의 언어를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박지영 배우, 이원준 배우, 남진영 한국수어통역사.

    이원준은 자신의 언어를 수어로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그에 해당하는 수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수어로 표현하는 게 어려움을,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수어로 표현할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음성 언어와 수어가 혼합되는 세계 지층에 존재하며, 언어에 대한 혼선을 겪게 된다. 이는 아마 매끄럽게 오가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음성 언어든 수어든 무엇 하나 온전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음성 언어는 수어로의 번역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춰 더듬거리며, 수어 자체는 생각-음성 언어의 ‘순일한’ 회로 체계가 적용되지 않는 초보 언어 학습자의 미숙함을 동반한다. 더듬거리는 음성 언어는 더듬거리는 수어를 보조한다. 분절된 단어들을 간신히 잇는 번역으로서 음성 언어가 존재한다. 그는 그 스스로의 번역자가 되며, 그 스스로의 번역자로서는 적잖게 어설프다. 수어를 앞세우고자 하지만, 수어를 지탱하는 건 결국 음성 언어이다. 

    이원종의 진땀 어린 수행을 따라, 박지영은 음성 언어를 번역하기 위한 입장에 있지 않다. 이원종은 아마 다수의 관객일 음성 언어만 익숙한 관객들의 입장에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왜 만나야 하는가. 그리고 이 둘에게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왜 재현되어야 하는가. ‘재현’은 이 둘이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맺는 일종의 수단이다. 사실 이는 연극이라는 외피를 억지로 입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연극의 당위는 동시에 회의의 수면으로 오른다. 일종의 연극에 대한 분열 증세를 갖는 〈실패담〉은 그 실패의 과정을 전시한다. 이것이 사실 연극인 것으로, 연극이 아니라 연극에 이르는 과정을 재현한다. 연극의 당위는 연극이라는 구실과 연극으로의 실패를 동반하며 스스로 실패를 전시한다. 둘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는 데 있어 걸림돌은 이원종이 수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지영은 상대의 감정을 자연스레 느끼기 어렵다. 이러한 과정 자체에서 생겨나는 회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플롯을 대체하며 등장인물의 가장 주요한 심리이자 갈등의 관계로 연장된다. 
     

    수어 사용자와 음성 언어 사용자가 만나야 할 당위 역시 없다. 이것은 단지 연극, 예술의 재현을 위한 것이다. 이를 연출이 의심하는 건 아니다. 이는 박지영을 중심에 세우고, 그의 말을 삭제하지 않는 가운데 성립한다. 사실상 연극은 완성되지 않는다. 아니 완성을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는다. 마치 티저처럼 제목을 홍보 문구처럼 국립극단 벽 등에 쓰인 문구, 노트에 메모한 문구를 보여주는 것 등으로 끝을 맺으며, 〈실패담〉은 시작으로 돌아온다. 매끈한 역할과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의 자리는 원점에 놓인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고 또 재질문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인투디언노운”에는 ‘엘사 아닌’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에 ‘알려지지 않은’ 자의 몫이 중첩된다. 이미 핸드스피크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지영이 배우가 아님이 아니라, 배우와 일반인 사이의 경계마저도 예술의 이미지 안에 고착되어 있음이 아닌가를 질문한다. 이는 박지영의 일상을 통해 국립극단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는 것의 의미를 삶으로부터 가져옴으로써 가능해진다. 

    연극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유유히 극장을 떠나게 하는 연극의 판타지적 경향은, 영상의 소거된 음향에도 영향을 받는다. 해맑은 박지영의 웃음, 그러나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장애의 구간을 일시 소거시킨다. 박지영의 세계는 온전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겪는 이원준으로부터 비롯된 일시적 장애는 전반적인 유머 코드로 소환되지만, 실은 타자와의 소통에의 당위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질 수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패담〉은 누군가의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군가에 우리를 또는 타자를 또는 상대를 욱여넣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해맑은 일상의 모습으로 수렴하며, 모두가 똑같이 웃을 수 있고 감각하며 생각할 수 있음의 자리를 재정초하는 데 그친다. 판타지의 구간을 성립하는 국립극단이라는 제도의 힘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힘 아닐까. 판타지는 따라서 정치적이지만 또한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패담〉은 그렇게 실패했어야 할 것이다. 지영의 온전한 세계는 판타지라기보다 믿음의 영역일 것이므로. 그것이 윤리의 영역일 것이므로.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작품명: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
    구성·연출: 김미란 
    공연 일시: 03.09. ~ 03.20. 월, 수 ~ 금 20:00 / 토, 일 14:00
    공연 장소: 국립극단 소극장 판
    관람 연령: 14세(중학생) 이상 관람가
    소요시간: 80분(인터미션 없음)

    ■ 출연진
    박지영(농인 배우)
    이원준(청인 배우)
    한국수어통역: 김보석, 남진영

    ■ 스태프

    무대: 송성원
    조명: 박유진
    음악: 이향하
    의상: EK
    영상: 헤즈킴
    인터렉티브: 고동욱(EASThug)
    음향: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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