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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비말처럼 터지는 언어와 몸짓 들
    REVIEW/Theater 2022. 7. 16. 02:24

    소외된 존재들의 여정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란(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김범진, 김아영 배우.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두 다른 플라스틱―플라스틱병(“플라스틱”)과 에나멜구두 한 켤레(“에나멜구두”)와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플라스틱 봉지―가 파라다이스―바다―를 좇아가는 여정을 실제 배다리 일대를 이동하는 것으로 전유한 연극이다. 두 배우를 통해 의인화된 플라스틱은 인간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독립된 주체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바다를 선택한다. 이때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바닷속 어떤 존재가 플라스틱을 바다를 오염시킬 수 있음을 주지함으로써 좌절되는 플라스틱병의 여정은 극적으로 다시 완성되는데, 이는 에나멜구두 한 짝과 헤어진 플라스틱병이 새롭게 등장한 비닐봉지(“검은 사물”)와 만남으로써 가능해진다.

    김아영 배우가 역할을 맡은 플라스틱병 앞에 출현하는, 에나멜구두와 검은 비닐봉지는 모두 김범진 배우가 그 역할을 맡는데, 에나멜구두와 비닐봉지가 자기 욕망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표현한다면, 상대적으로 플라스틱병은 마치 그 외양처럼 투명하게 상대방의 욕망과 언어를 투영하는 데 가깝다. 플라스틱병은 그 둘의 말을 듣는 입장에 있으며―관객은 그의 몸에 투과되는 다른 두 존재의 말을 듣는다.―, 미처 다 표현하지 않는, 거대한 꿈과 멜랑콜리의 정동이 혼재된, 자신만의 ‘내면의 바다’에 있다. 반면 그의 바다로의 열망은 병과 다른 두 존재의 함께 꾸는 꿈과 시도로써 분명해진다. 외롭고 버려진 존재들은 서로를 보듬는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인간이 잠들었을 때 움직임을 시작하는 사물들의 세계라는 애니미즘적 사고로 판명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 뒤에 점층 되는 사물,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플라스틱 쓰레기를 존재화해서 인간 무의식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비추어보는 작업에 가깝다. 우리가 간과하는 플라스틱의 ‘고향’과 그것과 동떨어진 현 위치의 머나먼 간극은 ‘그들’의 무모한 여정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거기에는 물론 문학적 상상력이 자리한다. 

    어둠으로부터 시작되며 이동하는 서사

    어디서나 예측 불가능한 찌그러진 형태의 모습으로 우연히 자리하는 플라스틱이 점유하는 단 하나의 위상, 곧 ‘불쾌한’ 쓰레기라는 오명, 곧 피폐한 모습으로 떠돌며 겪는 시련과 그에 대비되는 질긴 생명력의 모순은 거대한 문명의 한 표식이다. 그것은 도시 문명이 자연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인류세가 만든 자연 풍경이다. 이는 인간에게 충분한 비극의 장면을 상기시키며, 그 비극을 인간에게 투사하는 쓰레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희망적인 모습으로 굴절된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그 쓰레기에 언어를 주입하면서 시작된다. 이는 물론 쓰레기 하나하나에 인격을 부여하며 타자로서 그들을 소중하게 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문명의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 도저히 책임질 수 없이 가중된, 상상하기 불가능한, 따라서 ‘숭고한’ 크기의 ‘쓰레기’ 일부가 유출된 모습, 곧 공사장 현장 가림막에 쓰레기 한 조각이 낀 모습에서 ‘주체’가 극렬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또는 그 극렬한 고통을 통해 ‘주체’가 탄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가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고 통곡하며 그 말을 감싸 안고 넘어진 이후 그가 미쳤던 것과 같이. 에필로그에서 플라스틱병의 꿈이 외화면 목소리로 전사되는 마지막 장면, 곧 바닷가 마을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로 담장에 끼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동시에 바다를 바라보는 삶을 영위하게 된 플라스틱병의 이야기는, 처음 〈플라스틱 파라다이스〉가 시작하는 장소에서 현시된다. 이는 앞서 신촌극장에서 이 공연이 열렸을 때 재현할 수 없었던 현장의 모습이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배다리 일대의 여러 장소를 활용하는데, 도원역에서 모여 공사장 가림막 앞, 다시 철길 옆을 따라 이동한 후 놀이터 앞 육교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육교를 건너고 지하도를 건너 동성한의원 뒤뜨레에서 다시 연극을 보고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빔에서 연극은 마무리된다. 플라스틱 사물로 분한 배우들과 배다리 일대를 걷고 멈추어 곳곳에서 연극을 본다는 것, 가령 말은 멈춘 곳에서 시작되지만, 말이 멈춘 곳에서는 풍경이 연극을 만드는데, 그중 거리에서 임시 극장이 가설되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연극의 안과 바깥이 생겨나고, 바깥은 안으로 포함되기도 한다―동네 어귀에서 어느새 합류한 꼬마들은 뒤뜨레에서도 관객으로 합류한다. 그 안과 밖을 만드는 건 연극과 관객의 경계에 있는 스태프로, 연출 한아름 역시 공연이 진행되고 있고 또 공연이 이후 다른 곳에서 진행될 것을 알리는 역할로 등장하며 장소와 장소의 ‘간격’을 채운다. 
    장면과 장면의 유격, 이동과 다른 풍경 이미지의 유영 속 관객의 산만한 집중은 사실상 어떻게 공연 바깥 장면을 공연의 힘으로 끌고 올 수 있을지의 질문을 부른다고 할 것이다. 가령 우리는 그 거리가 플라스틱 간의 대화를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시작 지점에서 제시된다. 쓰레기 하나가 공사장 가림막 틈에 있을 수 있는 현실의 가능성을 잠재화하는 그 첫 장면은, 거리 (포함한) 연극과 실재가 만났을 때 증폭되는 힘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연극이 발견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쓰레기는 정처 없이 이동하며, 자신의 안정된 집을 고수할 수 없다. 특히 플라스틱병과 봉지와 같이 가볍고 일회용으로 처음부터 수단화된 대상은 더욱 그러한데, 인간의 ‘자의적’ 사용에 따라 그 형태는 변화되기도 한다. 특히 비닐봉지는 그 안에 무엇을 담을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는 에나멜구두가 그 존재의 특정한 신체 규격과 고유한 취향과 맞물림을 통해 선택되며 일반적으로 한 명에게 귀속된다는 사실과는 다르다. 그것은 더 희귀하고 값어치 있는 것으로 산정된다. 
    에나멜구두가 한 사람에게 길든다면,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에나멜 칠이 벗겨지고 낡고 지저분해지며 유행과 멀어져 쓰레기가 되는 것과 달리, 플라스틱병과 봉지는 다양한 대상을 담았다가 그것이 소진되는 것과 함께 그 쓰임을 만료한다. 물론 플라스틱병 역시 그 안에 무엇을 담는지, 어떤 포장지를 안고 있는지에 따라 구두와 같이 하나의 대상과 유착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때때로 그 포장과 함께 값어치를 띠기도 한다. 
    이는 일견 봉지와 다른 부분으로 보이지만(비닐봉지 역시 그 위에 새긴 라벨이 어느 정도의 차이 나아가 고유성을 보장하기도 한다. “나는! 2022 GS25 black edition limited plastic bag이야!!”_검은 사물), 작가는 그것의 차등 관계보다는 거기에 담긴 자본주의 체제의 희귀한 것과 욕망하는 것의 친연관계를 밟히는 데 주안점을 둔다(“너는 색도 있고, 모양도 예쁘고 게다가 패션아이템이잖아? / 난 그냥 페트병이야! 너 삼다수가 패션아이템인 거 봤어? 절대 안 그래. 에비앙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들고 사진이라도 찍지.”_플라스틱). 

    심연을 바라보며 우리를 재배치하기

    에나멜구두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줄 주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나갈 수 있음을 선택하는 것을 자율적인 삶의 운용의 한 방식이 구현되는 것, 곧 쓰레기라는 혐오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러한 세상의 편견을 스스로 떨쳐버린 채 독특한 예술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바다로 가던 에나멜구두는 점차 소진되어 가고 플라스틱병의 일부가 된다. 기이한 절합된 두 존재에 대한 관념과 달리, 실제로 숨을 거둔 구두는 목소리를 상실한 채 플라스틱병의 품에 안긴 모습이다. 에나멜구두의 꿈은 사후적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사람들의 인식과 시선에 자신의 삶이 좌우(‘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되기보다는 자유롭게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주체의 충동 자체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나를 신는 사람들에게선 (…) 어디로 갈지보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 그래서, 행복해하진 않을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_에나멜구두). 그렇지만 그들이 당도한 바다는 이미 쓰레기로 신음을 내는 중이다. 플라스틱이 둥둥 떠다니며 섬을 이루는 ‘숭고한’ 장면이 마치 무의식처럼 새어 나오는 순간이다. 
    이 무의식은 은폐 또는 억압된 채 근미래의 희망 아래 다시 잠긴다. 이 희망은 바다를 향하게 한다. 물론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그것이 일종의 판타지라는 점을 무지막지하게 동시에 허무하게 드러낸다. 곧 플라스틱병과 비닐봉지는 함께 파도를 맞는다. 아마 그 둘은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희망은 바다처럼 둘을 잠식한다, 플라스틱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소중한 존재로서 역할을 하는 미래. 그럼에도 그 희망이 구두 한 짝을 쓰레기봉투에 수거하는 미화원의 행위에 의해 이미 종료되었음을 인지한 가운데.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인간에 의해 생산돼 곧 쓰레기가 될 운명으로 ‘설계된’ 플라스틱 오브제를 인간이 연기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두 가지 무의식이 자리한다. 거대한 바다에의 동경, 그 바다의 쓰레기가 증언하는 인간의 종영. 전자가 더 많은 생산과 그에 상응하는 소비의 문명에 묶여 빈틈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세계 내 인간의 굴절된 욕망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낙원에 대한 판타지가 실재의 구렁텅이로 뒤바뀐 악몽일 것이다. 쓰레기의 소외는 인간의 소외를 반영한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이 소외를 타자와의 연대로 바꾼다. 투명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플라스틱병을 연기하는 김아영 배우의 모습은 그를 들여다보게 하기보다 다른 누군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이는 곧 우리의 바깥과 우리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그)의 안에 다른 이를 (기꺼이) 둠으로써(또는 바라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벗겨내는 매개적 존재와 같다―우리의 시선은 ‘그’를 투과하다 부딪혀서 우리에게로 온다. 

    플라스틱병의 타자들과 관계 맺는 모습은 우리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내 생각과 감각을 공유하는 아무렇지 않은 몸짓들. 타자를 고스란히 인정하기, 그리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가 그것이다.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전자는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구나.’라는 식의 대화로써 가능해지며, 이어 후자는 함께 꿈꾸었던 곳을 향하는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타자와 함께하기의 단순한 시도는 플라스틱병이 에나멜구두를 떠나보내고 만난 비닐봉지와의 만남에서도 이어진다. 플라스틱병과 비닐봉지는 서로를 각각 “셀럽”과 “꽃분이”로 명명함으로써 스테레오타입과 비고유성의 존재로부터 탈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쓰레기를 통해 인간 무의식의 어떤 향방을 가늠한다. 다가온 타자를 아무렇지 않게 직면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거대한 미래에 소소한 현재의 몫을 가지고서.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2년 6월 24일(금)~26일(일) 오후 4시 
    공연 장소: 인천 배다리마을 일대 

    〈함께한 사람들〉
    출연: 김범진, 김아영
    작, 연출: 한아름
    조연출: 양해연
    무대, 소품: 박소영
    음악: 이지향
    사운드: 정혜수
    조명: 노명준
    영상: 이예지
    기획: 이주연
    지역 매니저: 권근영
    과정관찰자: 민운기
    쓰레기협찬: WYL
    공연 진행: 강현모, 양해연, 한아름, 그리고 배다리마을
    홍보물 디자인: 한아름
    일러스트: 박소영
    공연 영상 촬영: 이야기
    주최, 주관: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공연 문의: 010-2609-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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