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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우, 《녹색은 잎으로》: 사물, 지층, 시간으로서 회화REVIEW/Visual arts 2025. 10. 19. 23:19
정석우 개인전, 《녹색은 잎으로》. 출처=드로잉룸(이하 상동). 정석우 개인전, 《녹색은 잎으로》(2025년 8월 23일~9월 20일, 드로잉룸.)는 두 개의 대형 작업과 그 밖의 작은 작업 일곱 점을 포함한다. 따라서 동명의 회화 시리즈 다섯 점은 대형 작업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질적 차원에서 복잡한 구성과 다양한 색과 형식적 시도가 총체적인 차원으로 출현하는 대형 회화의 특별한 가치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를 전제로 하면, 그리고 좀 더 이르게 도착해 보자면, 다섯 점의 〈녹색은 잎으로〉 역시 어떤 하나의 총체의 일부로서 자리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어떤 더 거대한 세계의 일부로서 단지 드러날 뿐일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이 작업들이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하나의 독립된 회화로서 어떤 선형적 구성과 배치의 경로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두께, 흔적, 표면의 차원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 동시에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회화가 완성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회화는 어떤 두께, 흔적, 표면으로서 놓인다, 또는 들여다보인다. 어떤 형상, 구성, 배치 이전에 회화는 시간의 풍화를 거쳐 어떤 두께, 흔적, 표면을 가진 하나의 평면에 도착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간단히 탈이젤회화이자 회화를 누인 채 완성한다는 경로로 실제 구성되는 것으로써 도달하는 하나의 결론일까.
가장 큰 회화, 〈Silent Arc〉(2021~2025. 캔버스에 오일, 181.8×227.3cm.)의 왼쪽 구역의 중앙의 수직으로 떨어뜨린 갈색 자국은 그 밑으로 내려가면서 그 부수물들, 곧 일차적으로 그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의 갈래들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얇은 선들이 흘러내린 것처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곧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의도의 흔적으로서 일종의 물감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우연성의 흔적을 실제 남긴 것, 살아 움직이는 사물의 작용을 역동적인 차원으로 수용한 것으로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얇은 선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얇게 독립적인 분기들로, 마치 흘러내린 것처럼 그려졌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는 부분이다.
그 아래 회색 얇은 선들이 이를 침투하고 있고, 검은 선분이 이 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 중하단부 전체를 어느 정도 유려하게 지배하려는 듯 보이는데, 이 선들은 그려짐의 순서를 지정할 수는 있으나 하나의 두께로 매끈해졌다는 인상을 주는 점에서, 이 모두는 평평하며 평등한 듯 보인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평면으로 귀속한다. 〈Silent Arc〉는 시간의 회화이다. 어떤 색감이, 선분이 안착된 이후, 다시 안착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그 속에 있다. 이때 무언가를 그래야겠다는, 무언가를 그린다는 작가의 의식은 명확한 어떤 지점을 향해 지속 가능하며, 그러한 지점을 애초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
물감이 작은 점들로 뭉치고, 덜어 내어진 채 머무는 것들 곁에는 캔버스의 질감이 드러나는 허여멀건 돌기들이 대응한다. 중앙부의 뒤섞인 색감층은 그것을 하나의 지층으로 드러낸다. 반면, X자로 만나며 하강하는 중상단부의 하얀 선분들, 앞선 중하단부의 수평의 검은 선분들은 전자가 마치 색감을 긁어낸 캔버스처럼 현전한다면, 후자는 그 배경이 되는 색감들 안에 오히려 파묻히거나 뒤섞이며 그 안으로 흡수된다는 인상을 준다. 이 두 효과는 그것들이 형상으로서 무언가를 조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함축함에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층인 듯 위장하거나 지층 위에 덧대어진 흔적으로 남게 되거나 아님 지층을 지배하는 대신 지층 아래로 귀속된다. 흰색 선분에 대해 부연하자면, 그것들은 뚝뚝 끊기는데, 이는 붓이 아닌 다른 표면적이 작은 단단한 사물이 매끄럽게 캔버스와 흡착되지 않은 채 그려진 어떤 흔적과도 같다.
〈녹색은 잎으로〉로 돌아온다면, 그 순서상 3번의 작업이 5번과 뒤바뀐 채 배치되어 있다. 중하단부를 차지하는 녹색의 흔적이 새겨진, 녹색의 비중이 가장 짙은 두 그림은 하나는 밝고 하나는 침착되어 있는데, 이 시퀀스상의 교환 아래, 마지막에 있을 그림이 중앙에서 밝게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지칭되는 “녹색”은 무엇인가. 그리고 “잎”은 무엇인가. 순수한 색감과 형상으로서 전체 회화와 어떻게 이 관념은 관계 맺고 있는가. 거꾸로 어떻게 그 관념이 표현될 수 있는가. 표면 위의 얼룩이 아닌 지표면 자체의 흔적이 “으로”의 변화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가, 그 “으로”에 따라 색은 형상으로 변화됨을 좇는 것일까.
그것은 가능한 것인가. 역으로 색의 일정 정도의 범주를 형상으로 취급할 수 있음을 회화의 한 속성으로 포함시키는 것으로 해소될 수 간단한 문제인 것인가. 우선, 첫째, 녹색은 잎의 형상을 이탈한다, 또는 애초에 따르지 않는다. 둘째, 잎은 녹색의 범주로만 아마도 지칭된다. 셋째, 녹색이 잎으로 이행되는 가운데, 잎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 반대로 잎의 범주에 온전히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 녹색의 여지가 전제된다. 곧 이행은 어떤 상태와 정도를 의미하며, 녹색과 잎의 치환이 아니며, 그 완성은 그 상태의 변환 정도를 가늠하는 데 있다. 넷째, 잎은 색으로부터 (벗어나며) 형상의 고유성을 획득한다. 잎은 본디 녹색이지 않은가. 따라서 녹색이 잎으로 된다는 것, 잎의 녹색이 다시 녹색이 아닌 잎의 고유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잎의 순수한 형상을 되찾기 위해 색상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하나의 대형 회화, 〈사라지고 남은 것 Traces Left Behind〉은 가로, 세로로 각각 8개의 흰색 ‘직선’으로 구획되는 구조 아래, 그 선분들과 ‘대응’하는 모든 나머지 것들이 생겨난다. 수평 계열의 검은 선들, 툭툭 끊기듯 이어지는 수직 계열의 검은 선들, 그리고 그것을 지우고 해체하는, 오른쪽 중하단부의 회색 얼룩 공간과 그 위쪽의 약간의 연한 푸른 얼룩 공간, 그리고 수평의 검은 선들 위에 덧대어지며 선을 두껍게 만드는 회색 선들과 그것이 다른 여러 색의 스펙트럼으로 연장되는, 왼쪽 하단의 대략 1/4이 좀 안 되는 풍부한 색채 공간이 그것이다.
여기서 애초에 흰색 직선이 캔버스를 구분 짓는, 모나드들의 근본적인 틀이 아님은, 그것이 혼동을 주는 것임에도 그렇다는 건 분명하며 또 중요하다. 흰색 직선이 수직 검은 선을 관통한다는 건, 그 둘의 뒤섞임, 곧 검은 선의 연속선상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끊어내는 부분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 둘의 위계, 곧 흰 선이 애초에 그려질 수 없는 ‘환영’의 경계 안에서 머물고 있음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그 위에 덮인 얼룩은 이것을 부정하고 기각한다, 곧 체계적인 운동의 어떤 경우의 수를. 색채 공간은 직선의 질서를 따르면서 그 위에 중첩되며, 동시에 그것을 변형하며 전유한다. 그 위에 검은 선들이 위의 검은 수직선들에 대응하지만, 이번에는 다분히 유머를 간직한 상태로 반복된다. 그것은 마이브릿지의 동작 사진들의 인체 형상의 자국이 악보 위에 흐릿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색채 공간의 경계에 어렴풋하게 얹혀 있는, 찌그러진 모과 같은 반원의 파란 선은 유일하게 공간의 형상을 지정하는 듯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는 않다. 따라서 시간은 일정한 질서와 방향으로 쌓이고, 또 그것을 근본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듯 뭉개고 다른 한편 유희하듯 반복적으로 덧대며, 형상이 있다면 구조적 틀로서의 기본 틀의 어정쩡한 상태만이 있는, 그것을 완전히 기각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그러나 과포화 상태를 넘어 기이하게 안정화된 상태의 어떤 회화가 ‘남는다.’
어쩌면 이는 색에서도, 형상에서도 근본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녹색도 잎도 아닌, 그런 것을 그리고자 하는, 회화라고 부르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작은 회화들, 〈녹색은 잎으로〉에서 보면, 왼쪽 하단에서 중심을 향해 오르는 어떤 방향성을 선과 색채 덩어리로 인해 분별할 수 있는 듯하다, 1, 3, 4의 경우. 또는 오른쪽 중앙부에서 왼쪽 상단부로 올라가는 기울어진 사선의 그 아래로의 순차적인 반복을 통해 더 큰 덩어리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2, 5의 경우. 그렇지만 이는 미미하며, 더 큰 회화로 옮겨올 때 명확함은 오히려 덜해진다. 앞서 말했듯, 방향과 형상의 분별, 또 물감의 자율적인 지표성, 형상과 배경, 선과 색 사이의 위계와 구별 역시 무의미해진다. 그러니까 이 회화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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