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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 광주는 (어떻게) 흐를 수 있는가REVIEW/Theater 2025. 8. 20. 22:42
적극, ACC 창·제작 공연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상동).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에서 연극의 등장과 퇴장은 설치와 철수의 절차로 바뀐다. 오브제와 한 몸으로 또는 오브제를 다루는 이들의 등장과 퇴장, 곧 이들이 오브제를 가져오고 또 가져감에 따라, 사물-신체들은 일시적이고 임시적 것이 된다. 그사이에는 천지창조의 7일과 안식일, 그리고 종말 7일을 지정하는 자막의 언어가 투사된다. 곧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각기 다른 장면, 이미지들을 넘겨보는 것, 그 같은 이미지들이 생겨나고 수거되는 데 따르는 행위들을 보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극장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퍼포머들은 스태프처럼 곧추 세운 신체들로 전력 질주로 공간을 활보해야 한다. 이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사유하고 감각하기 위한 이미지들의 무덤으로서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작은 소실점들의 빛과 같은 수렴이기도 하다. 처음, 전면 바닥 리프트로 단차를 가진 극장을 따라 구불구불 이동하는 관객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의 무덤 위에 서 있는 우리의 임시적인 현재성을 약간 상기된 채 감각하게 되는데, 무덤으로서 공간 위에 세워지는 이미지들은 곧 그 무덤을 이룬다.
무언가가 생겨나고 사라짐을, 어떤 토대도 근거도 없이 그것이 일어남을 보여주는 서사는 바로 천지창조의 신화일 것이다. 이 생성·소멸의 서사를 형식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곧 설치·철수의 행위이다. 따라서 거대한 무덤으로서 공간은 무한한 변화의 이미지들의 생성과 죽음을 담는 텅 빈 그릇이 된다. 극장의 무대 반입구가 열리며 그 안의 또 다른 공간이 경유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이 열린 문틈은, 무덤을 경유해 우묵한 바닥에 담기는 빛과 감각을 다룬 1막 이후, 평평해진 공간 전체의 소실점으로 자리하며, 공간을 관통하는 신체들의 통로가 된다.
그리고 죽은 자를 불러 세우기 위해, 그들과 함께 통과하는 종말의 시점이 요청된다. 이는 그들의 삶으로 우리를 연장하는 것이다. 결국,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죽음을 가정한 하나의 시점에서 이미 죽은 이들과 그들보다 앞선 시작에서부터 그 마지막까지를 함께하는 여정이다. 여기서 그들의 삶을 보는 건 그들이 우리의 죽음을 보는 것과도 같은데, 이는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얼굴에 점착되며 개기일식을 바라보는 우리의 적극적 행위를 끌어내는 4막에 상응한다. 관객은 그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게 하며, 이 바라봄을 대체하는 것이 개기일식의 순간이 된다.
따라서 개기일식은 응시의 실재가 비가시적인 것이 되는 순간(을 위한 것)이며, 달에 가려진 해가 그 틈의 가장자리 빛으로 자리하며 달의 아우라가 되어 사라지는 동시에 명확해지는 것과 같이 그들은 우리를 통과한다,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대체되는 그리하여 환기되는 그 얼굴로서. 마찬가지로 해는 사라지지만 영원한 시간으로 현상된다 또는 기억된다. 역설적으로 이는 우리가 그들의 눈이 됨으로써, 그들에게 눈을 내어줌으로서 가능한데, 결과적으로 이 애도의 행위는 망각의 순간에 그들을 체현함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의 신체를 환상의 순간에 통과한다.
죽은 자가 현현하는 건 이 무덤이 놀이의 공간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결국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그 공간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것과 같이 애도와 놀이가 한데 자리한다. 2막에서는 반입구로부터 검정 비닐 튜브가 출현하는데, 여러 퍼포머가 수차례 등장·퇴장을 반복하며 끌고 오는 이 거대 생명체의 알레고리는 이후 커터 칼로 찢겨져 물길을 이룬다. 이때 등장하는 음악 〈smile〉은 몇 번의 반출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 단속적으로 끊기며 새롭게 재생되는데, 퍼포머들의 묘한 흥분과 쾌감의 표정은 그것을 여지없이 그어낼 때로 이어진다.
시간을 고정시키는 (일종의 착각을 주는) 재생 버튼은 육박하는 실체적 감각들의 환상성을 지연된 것으로 만든다. 반복된 감각의 복기는 이에 따라 분절된 파편들의 기억을 의태한다. 예리한 칼날의 폭력은 “물과 빈 공간이 있으라”라는 신의 말에 따라 물길을 완성하는데, 이 폭력은 비닐 튜브를 살아 있는 것으로 또 그것의 죽음의 순간을 시차적으로 기입한다. 폭력은 외부의 것으로 주어지는 한편, 그것이 우리를 감싸고 향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것으로 체현된다.
공수 부대의 폭력이 자행되며 죽어가는 신체와 어둠의 빈 공간에서 서서히 되어가는 물길의 복합적 도상은, 동시에 그것과 함께 탄생하며 그것으로부터 혼자가 되는 실존, 그리하여 그것을 우리의 모습으로 되비추어 보는 실존을 동반한다. 죽임의 행위가 죽음의 목격으로, 그리고 죽음 이후의 개체적 실존의 양상으로 기입될 때, 폭력의 주체는 묘연한 것이 된다.
또 다른 공수 부대의 폭력은 3막에서 동유럽의 장교복을 단체로 입은, 상쇠 김복만을 필두로 한 전남도립국악단의 농악이 길게 펼쳐지는 시간으로, 익명의 사람들 가면이 군데군데 연결된 바닥의 투명한 페트병들 집합이 마지막에 위로 솟구쳐 올라간다. 민중을 환유하는 페트병과 농악 자체는 뚜렷한 존재로 가시화된, 죽음의 세계에서 온, 얼어붙은 병사들의 감흥 없는 집합적 움직임에 의해서 역설적으로 그 둘의 연결성을 획득한다. 음악은 폭력을 재현하지만, 민중의 신체로 현상되고, 폭력의 주체들은 죽음의 세계 안에서 폭력을 애도로 전치시킨다. 존재의 이중적 몸짓은 죽음과 삶의 통합적 관점 아래 다분히 모호한 것으로 희석된다. 죽음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는 그 죽음의 문턱을 통과할 수밖에 없게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태초보다는 연옥이나 지옥의 풍경 아래 놓인다.
국가 폭력의 재현이 아닌,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당사자성을 되새기는 건 후반, 6막의 동물과 사람이 탄생하는, 천지창조가 마침내 지구의 생명체들을 가리키게 되었을 때다. 명명을 통해 5·18 피해자들의 다양성을 그 바깥의 사회적 고리와 뒤섞는 가운데 복원하고, 그들이 연극의 주체가 되어, 노아의 방주 서사를 연극으로 올리는, 극 중 극이 구성되는 부분으로, 죽은 자들이 우리와 같은 토대에서 삶의 다른 역할을 임시적으로 떠맡게 됨으로써 죽은 자와의 공존이 삶의 에너지로 재활성화되게 됨은 기이한 느낌을 준다.
앞선 공수 부대의 놀이가 우리가 목격하는, 목격/관람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면, 그러니까 폭력 앞에 무력한 신체로서 관객이 재현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공수 부대의 신체는 영원한 속박의 굴레를 증명하는 것이었다면, 노아의 방주 연극 놀이는 죽음의 세계에서 자유로워진, 사건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영혼들의 세계를 가정하게 하는데, 일종의 망각 기제는 더 큰 보편적 시간성의 범주로의 환원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것이 주는 묘한 쾌감은, 곧 우리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라는 그 쾌감은 애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오는 부분이다.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5·18에 관한 애도 불가능성을 공간 자체의 운동과 공간에서의 운동, 공간 내의 설치와 철수의 수행, 나아가 연극 놀이와 인터미션 동안의 커피 한 잔으로 갈음되는 안식일, 그리고 마지막 종말을 형상화하는 철수와 한쪽 구석에 자리한 음악 연주를 통해 그것에 체현되는 다양한 신체 양상으로 분화시킨다. 이러한 표현 행위는 무엇보다 시제의 착안, 아주 먼 과거와 아주 먼 미래의 양극화된 시점 안에 포화시킴으로써 5·18은 광대한 것으로 확장되며 광대한 것 안에 또한 압축된다. 따라서 우리는 5·18을 광대한 시점 아래 산포시키며 그 세부를 또한 늘어뜨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광주에 대한 것들을 다중 초점화하는 표현들이며, 그것의 역사적 특정성의 시제를 현실보다 죽음의 차원에 겹쳐둠으로써 불가능성의 애도를 유희의 현재 시제로 연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따라서 5·18의 충실한 역사적 서사의 복원에 입각하지 않은 채, 이를 재현하지 않은 채, 오브제들로부터의 부분적 환기를 통해 깁고, 그 조각들로부터 단편적인 기억을 추출하고 현상하여 신체로 이전하는 환유의 방식을 선택한다. 거기에는 물론 파편적인, 익명의 관객의 몸의 기입이 전제된다. 그렇다면 그 기워지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5·18인가, 우리의 불가능한 애도로서 신체인가, 흐릿하게 복구되는 기억의 뚜렷함인가, 광주에 대한 온갖 것들의 상징적 이미지들인가, 익숙한 서사의 물듦인가.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https://www.acc.go.kr/main/performance.do?PID=0102&action=Read&bnkey=EM_0000008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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