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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머구리,〈북/치기/박치기 : 아마도 이건 북어 이야기?〉: 현실로의 서사를 완수하는 북어의 주체적 미션에 대하여REVIEW/Theater 2025. 8. 20. 22:48
〈북 / 치기 / 박치기 : 아마도 이건 북어 이야기 ?〉포스터 〈북/치기/박치기 : 아마도 이건 북어 이야기?〉(이하 〈북어〉)는 액막이 북어의 자기소개 이후, 자발적 백수를 택한 영동이의 자취방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10년간 자신의 집에 걸려 있던 액막이 북어가 없어지고 난 뒤 겪은 불행들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액막이 북어를 찾는 영동이의 여정은, 바다를 찾아 떠난 액막이 북어와 배송 중 사고로 이탈한 동태 한 마리의 여정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특이한 장소 안에 머물게 되면서 새로운 공동의 탐험이 요청된다. 그리고 이 비선형의, 삐뚤빼뚤한 여정의 그늘진 서사는 그 처음의 시작으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곧 그 어둠의 캄캄한 방의 고립된 공기, 그것에서부터 가능한 건 또는 그 안에서 예외적으로 유동적인 건 상상력의 일환일 것이라는 점을 반추하게 한다.
하지만 영동이는 꿈을 꾸지 않고 그 대신에 북어가 꿈을 꾼다. 영동이는 적절한 꿈과 환상 영역의 활기를 소유하지 못하지만, 북어는 10년간 말라 있는 상태에서도 살아서 약동하는 명태의 삶을 꿈꾼다. 이 두 상반된 존재는 가령 하나의 존재가 의도치 않게 나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니까 영동이가 잃어버린 것 혹은 잊어버린 것을 대리 표상하는 존재로서 고정된, 고착된 존재의 정령적 재생이 요청되는 것이다. 막을 열고 닫는 북어의 내레이션과 같이 이 서사는 사실 이 북어의 것이기도 하다.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두 다른 질문으로 읽힐 수 있는데, 영동의 안정된 삶 혹은 삶의 행운을 위한 보조적 존재로서 자리하는 트릭스터로서 북어의 서사가 서브 플롯이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반문과 결을 같이 하는, 북어 이야기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이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이 북어의 존재론적 변용의 다양한 가능성 아래, 명태, 동태, 황태 사이의 스펙트럼을 오가기 때문에 그것이 북어로 고정될 수 있느냐라는 또 다른 질문이다. 실제 북어가 동태로 다시 명태로 두 번의 차례를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고, 이 같은 불가역성의 사실은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 바다에 이르러 자유를 얻는다는 꿈의 불가능성 아래 아슬아슬하게 은폐되고 있다.
존재론적 최후의 양식에 따라 동태는 녹는 즉시 자신의 생명(?)을 다하고, 북어는 뜨거운 물속에서 음식으로 조리되며 본래적 쓸모를 실현한다. 액(厄)을 명사화한 액이라는 존재는, 액을 막는 액막이와는 대별되는 존재로 기입되는데, 이는 영동의 잘못된 신념 체계, 나아가 인과관계 오류에 대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에서 새롭게 재기입된다. 먼저 액이는 영동이의 방 한 구석에서 은밀하게 머물러 있다 북어가 떠나감 이후에 자신의 세력권을 급격하게 확장한다. 한지를 사이사이 길게 늘어뜨린 발은 리미널로서 경계를 나타내는데, 그 경계를 넘어감으로써, 곧 그 경계에서 거꾸로 안을 엿보며 현실 존재들을 먹어치우는 존재로 탈바꿈하면서 모든 등장인물은 최후에 그의 뱃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 액이의 등장 이후 벌어진 불행의 조건이 액막이 북어의 사라짐으로 판별하는 영동의 사고는 북어의 사고 속에서 전복되는데, 다사다난한 일상의 보편적 속성 아래 그 불행의 사건들을 환원시키는 한편, 이러한 환원이 인간의 가치 기준에서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음,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경계를 미세한 차이로 통합하는 것과 같이, 애초에 액막이는 영종 위의 초월적 존재가 아닌, 영종의 현실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었으며, 영종의 삶이 그 기준 아래에서는 그럭저럭 흘러왔던 것과 같이, 그 삶에 종속적이지 않으면서 그 삶을 역시 지배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의식, 그리하여 거꾸로 대등하게 영종의 존재론적 기반을 영종 자신의 것으로 재정립하게 만드는 고유한 개체적 의식의 세계를 창출한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애니미즘, 그보다는 트릭스터의 주체적 현상이 가능한 이야기의 세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액이가 실체적 존재가 아님을 규명하는 복어의 말의 연장선상에서 그 서사의 자기 지시성을 드러내는데, 곧 북어 스스로가 영동의 삶으로 재흡수되어 영원히 사라지는 물리적 질서의 귀결을 선택함으로써 영동의 삶의 변증법적 제고의 결론으로서 하나의 서사가 완수되는 〈북어〉의 서사 구조 안에서 북어는 결국 그 서사의 진리를 완성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체화되는 임시적인 존재론적 기전을 띠고 있는 것이다.
북어는 결국 이야기를 발화하며 이야기를 완성하고 현실로 통합되는 데 있어 역할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이야기는 현실을 확장하고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교훈과 메시지의 의미를 띠게 된다. 여기서 북어의 목숨을 건 도약은 주체의 숭고한 희생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무한한 상상력의 산물인 동시에,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 지대를 구성하는 가운데 이야기의 출구를 닫고 이야기의 세계를 종식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곧 북어 스스로가 이중의 죽음을 한편으로 선언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적으로 기꺼이 수행되어짐으로써 완성한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효과를 낳는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세계는 영동과 영동 주변의 인물들이 북어를 북엇국으로 자신의 몸으로 흡수, 통합했을 때 역시 그들 옆에 여전히 자리하며, 곧 동태와 북어의 두 번의 죽음이 두 번의 다른 삶인 것과 같이, 이 두 분기된 세계는 결국 현실과 의식의 비평형적 공존, 서사로서의 현실이 가진 질적 가치로서 삶을 사는 인간의 의식을 규명하며, 그 현실은 서사 아래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연극이라는, 존재들을 생산하는 배우라는 존재론적 차원의 특별한 시간의 조건에 의해 지지되는 부분인 것이다, 손에 끼워진 북어의 인형이 끊임없이 버둥거리는 입모양으로 살아 있으려 하며 언제든 그 손을 떠날 수 있는 것과도 같이.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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