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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놀이클럽, 〈클뤼타임네스트라〉: 현실과 연극의 변증법적 유희
    REVIEW/Theater 2025. 10. 19. 21:26

    공놀이클럽, 〈클뤼타임네스트라〉포스터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연극을 만드는 존재들, 작가, 배우, 작가이자 연출 등이 중심인물이 되며, 이를 현재 연극 제도의 현실과 결부 짓는다. 이를 통해 연극 바깥의 현 정치 상황들과 직접 연루되는 현실의 고유명사들 역시 개입할 여지를 현실화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단지 현실에 상응하는 사례라는 효과를 주는 데 가까운데, 여기서 나아가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삶 속에 깊이 연루된 연극에서 다시 삶과 연극의 경계를 모호한 것으로 반죽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는 연극을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을 사는 것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연극 제도가 아닌, (그것을 표층으로 만들며) 연극이라는 이상향을 극단적으로 좇는 중심인물들의 행위가 현실을 비집고 나오는 순간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서사를 인도하며 구축하는 작가의 조물주적 지위를 기획하는 이가 있으며, “빛”으로 비견되는, 무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주인공에 대한 열망을 꿈꾸는 이가 있으며, 또 현실과 연극을 연속선상에서 바라보는 그리하여 현실이 연극의 바탕이 되며, 연극이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에 참여하는 목적이 되는, 연극에 대한 정념을 가진 이가 있다. 

    각각 고등학생 극작과 학생 나태주, 배우를 하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승원, 그의 남편이자 연극 연출가 기문이다. 승원과 기문에게 삶을 전화하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기문이 아들 주원의 등굣길을 함께하다 난 교통사고로 주원이 죽게 된다. 이는 플래시백의 방식으로 처리되는 데 가까운데, 주원이라는 인물을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사건의 발단을 구성하는 하나의 기제이자 전사로 자리 잡기 위해 신속하고도 추상적으로 재현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재현의 윤리를 초과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인물의 (과거의) 기억이 아닌 정념(의 차원에서 기억)으로 고립시킬 수 있게 된다. 

    이는 뒤이어 직접 묘사되는 대신 서술되는 것으로 그치는 이후의 과정, 기문이 미국으로 연출 관련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3년간 혼자 주원의 자취가 있던 집에서 홀로 남겨졌던 기억을 간직한 승원이 복수의 일념을 갖게 되는 결과로 완수된다. 이는 오로지 연극으로 (재)승화되기 위한 차원에서만 유효해지는데, 승원 스스로가 되고 싶은 주인공 클뤼타임네스트라에 대한 열망과 자신의 상황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내용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망상이 일종의 착란의 상태로 엉켜 든 것이다. 

    연극과 삶이 도착된 자리에서 승원은 주인공이 된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 또 무대의 자리로 경계 짓는 이는 태주이다. 그는 〈아가멤논〉을 본래 주인공인 아가멤논 대신에, 그에게 복수의 일념을 갖고 복수를 완수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로 전위시키면서 재서사화하는데, 이러한 서사를 승원에게 전파하면서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자리에 승원을 구성하며 승원의 자리를 적극적인 주동자의 자리로 격상시킨다. 이는 승원에게 주인공과 현재 자신의 자리에 대한 간격을 인지시키고, 그 자리를 향해 나아가게끔 만든다. 

    태주가 대본을 쓰고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극 중 극 ‘클뤼타임네스트라’에는 승원이 클뤼타임네스트라를 맡고, 연극이 펼쳐지려는 순간에, 태주는 현실의 문을 열고, 기문의 누나이자 학교의 실세인 학과장 기영의 방문을 인계한다. 그것이 곧 무대임을 고지하는데, 이때부터 승원이 겪는/처한 사태는 〈클뤼타임네스트라〉에서 가장 기이한 시간을 동반한다. 관객은 이미 철수했으며, 연극 역시 철회되어야 하는 상황이며, 따라서 연극은 지속될 수 없는 조건을 맞았다. 

    학생과 불륜을 저지른 교사의 추문과 후속적 상황이 현실로 육박하는 가운데, 비극의 주인공의 성취가 비극의 운명을 맞은 현실의 인물로 환원될 위기의 순간에서도, 연극의 무대에 대한 잔상은 현실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연극 안에 현실은 하나의 오작동하는 무대의 순간으로 기입되며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자리에서 승원은 벗어나지 못한다. 연극의 무대와 무대로서 현실이 뒤섞여 혼돈을 만들어낸다. 

    태주는 극의 실질적 완성이 삶과 연극의 일치 안에서 이뤄짐을 의도했다고 보인다. 곧 극작의 완성은 무대의 구현이 아니라 삶에서의 완수인 것이다. 태주는 자신의 희곡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주인공을 찾았고, 승원을 주인공으로 인지, 격상시켰으며, 삶에서 그 역할을 체현하도록 하며, 작가의 지위를 배우의 삶을 연극과 합치시키는 과정 전반을 구성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 사진을 올린 것으로 연극을 중단시키며 실제의 장면 안에 역할을 연장시키는 것으로 그 삶으로서 희곡을 마무리한다. 

    승원이 주인공으로서 〈클뤼타임네스트라〉에 잠식되는 가운데, 작가의 의도는 은밀하게 발현되었던 것인데, 이는 승원의 시점을 경유해 충격 효과를 선사한다. 삶과 연극의 분별이 불가능한 시점, 연극이 삶을 상회하는 순간은 삶이 무력화되는 시점을 유예하며 그로부터 눈이 먼 자의 모습을 구성해 낸다. 비극은 극의 형태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삶의 다른 형상을 통해 전이된다. 그럼에도 극은 삶의 이념형으로 현재에 도착해 있다.

    승원이 극의 진정한 주인공으로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아니 갈등을 통해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순간에서, 태주는 연극으로서 삶을 완성하고 지켜보며 진정한 저자의 자리를, 곧 극 중 극의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이 모든 걸 포함하고 의미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를 합치시키는 데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곧 ‘작가’의 페르소나로서 태주가 자리하며, 태주를 통해 가상의 ‘작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에 이른다. 

    주인공의 몰락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자, 그리고 그 몰락의 서사를 구성하는 자로서 삶과 연극의 간격을 만들며 또한 연극을 삶 위에 위치시킨다. 곧 그의 윤리적 몰지각함은 현실을 서사로 치환할 수 있는 존재의 고유한 역량을 지닌 작가로서 순전히 그 서사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써만, 그리하여 현실의 바깥에 자신의 위치를 두는 것으로써만 일정 정도 합리화될 수 있다. 마치 이 연극이 현실에 입혀지는 것처럼, 그는 서술자이자 매개자로서 극에 접면한 관객의 존재를 대리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완성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윤리적인 책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임을 고지한다. 

    태주는 승원을 심리적 차원에서 주인공의 자리로 격상시켰고, 본래 태주의 여자친구, 무용학과 출신이자 기영의 딸 다현이 맡았던 클뤼타임네스트라 역할이 부재하게 되자 자신이 직접 주인공을 맡기에 이른다. 그리고 승원의 열렬한 구애를 받기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하나의 서사가 더 필요했다. 이는 12세기 궁정식 연애의 결혼한 부인과 기사의 낭만적 사랑의 서사로, 두 사람의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그 서사에 합치시키며 문학적인 차원으로 재승화시켰던바, 이후 태주는 인물의 상승과 그 후의 추락을 한층 더 가속시킬 수 있게 된다. 

    승원이 자신을 껴안는 사진을 학교 게시판에 올림으로써 태주는 승원의 현실에서의 추락과 연극에서의 중단을 동시에 성취해 낸다. 더군다나 이 사진은 승원이 찍은 게 아니라, 그의 여자친구‘였던’ 다현이 몰래 찍은 것으로, 이 사진이 태주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는 건 둘의 은밀한 공모 안에 승원이 다현과의 관계를 끝낸 게 아니며, 둘의 애정이 지속되고 있음을 아마도 의미한다. 

    승원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거짓말과 배신이라는 행위를 동시에 겪는 것임에도, 더 중요한 건 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현재에 대해,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시킬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은 가장 커다란 서사의 일부로 승원의 삶에 제1의 프로그램으로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문을 대체하는, 기문의 대안으로서 태주에 대한 사랑이 좌절된 자리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승원이 마주하는 건 비대한 자아가 직면한 엄연한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으로, 결과적으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주는 교훈은 곧 특정 서사가 견인하는 무대로서 이념이 현실을 맹목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점에 대한 경계이다. 

    아들 주원이 죽은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우울과 멜랑콜리의 자리가 부재하다는 것에서 오는, 기문에 대한 미스터리는 승원의 고통과 외로움의 자리를 증폭하며 복수의 일념으로 굴절시켰는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며 가정을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따라서 삶을 연극의 바깥으로 고립시키며 연극의 허울을 좇는 기문에 대한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초기 비판은 오히려 승원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었음이 조금 어색하게 승원을 직면하는 것으로 반전되기에 이른다(곧 자신이 슬퍼함이 승원을 더 불편한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려 깊은 생각에 따른 것?).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승원의 자의식 안에 현실을 가둠으로써, 그리하여 바깥이 다시 그 안으로 접혀 들어갈 때 오는 충격 효과를 후반에 나열함으로써 다소 황급하게 서사를 마무리하며 잔여를 남긴다. 자의식과 현실의 충돌을 통해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결여가 갖는, 연극적 자아의 현실 인식에 대한 미비와 미숙함에서 오는 실패를 통해 현실에서의 ‘연극적’인 무언가를 견인해 내고 성취하며 그 반대편의 측면에서 교훈을 가져오면서.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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