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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경, 《풍경설계》: 과도기적 차원에서 본 해체적 분열의 심상
    REVIEW/Visual arts 2025. 10. 20. 00:16

    김보경, 《풍경설계》전시 전경.[사진 제공=김보경 작가](이하 상동).


    김보경 작가의 《풍경설계》에서 우선해서 들어오는 건 파편들로서 이미지다. 파편은 조합이 아닌 재조합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 온전한 하나의 상을 파편으로 분절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것들을 하나로 공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새로운 원본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 새로운 원본의 솔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곧 파편들의 불연속적인 나열이라는 재조합의 결과는 이미지의 형해화 또는 종합과 포획이 힘든 이미지가 주는 조망이 불가능한 사태이다. 곧 파편은 이미지의 부분적인 전개를 나타내지만, 재조합은 이미지를 엮기보다는 파편 자체로 되돌려 준다는 점에서, 파편은 고유한 것으로 남는데, 곧 불완전한 무엇이거나 온전하지 못한 무엇의 정체성 안에 발산의 기호로 자리하게 된다. 

    ‘풍경설계’라는 조어처럼 풍경은 설계되고 기획된 것이다. 풍경은 수동적인 자세로부터의 수용으로 갈음되는 개념이므로, 이는 꽤 어색한 조어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무엇보다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파편화 혹은 재조합의 과정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무엇보다 파편들은 하나의 화면을 가득 메운다. 파편들은 이미지가 되기 위해 재조합되(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은 파편들로 남기 위해, 파편들 자체로 들어서기 위해 재조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파편들은 수집되는 대상이면서 어떤 이미지를 완성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되지 않기 위해 여전히 파편으로 남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말을 경유하면, 하나의 캔버스의 온전한 구도 혹은 채워짐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어떤 충동이 그것을 이끌었음으로 보인다. 


    풍경화는 근대의 지배와 정복의 욕망이 투사되는 지점이 각인되는 장르이다. 조망이 가능해지는 지점에는 신의 시점과 그것을 향유하는 인간의 쾌락이 자리한다. 반면, 조망이 불가능한 이미지,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파편화를 진행하는 이 회화들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대표적으로 전시에 자리하는 대부분의 흑백 회화들은 풍경이 갖는 안정적 질서, 안온함의 정동을 주기보다 거부한다. 따라서 풍경은 설계된 것이어야 하는데―그 솔기를 드러내야 하는데―, 여기서 파편적 재조합은 이미지를 가득 채우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형해화되는 이미지는 분명 이미지의 질서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함을 보여준다. 


    파편들로서 이미지는 기존의 이미지보다 과잉된 (비)질서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비판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이미지에 정향됨을 벗어남으로써, (기존의) 풍경이 설계된 시선임을 보여준다면―따라서 그것은 해체되고 재조합되어야 한다면, 더 근본적으로 이는 온전한 이미지의 부인과 부정의 기제가 숨겨져 있음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나아가 온전한 이미지를 이루는 그 힘과 조망의 시선에 대한 부인과 부정의 기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행위는 이미지의 수집으로서 가속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편집증적인 차원으로 발휘되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이미지가 가진 봉합의 차원을 풀어헤치는 것이지만, 심층으로는 그 이미지의 온전함 너머의 결락을 꿈꾸고 있음을 방어하는 이중의 전략은 아닐까. 곧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미지로부터 멀어지는 작업은 기실 이미지를 보기보다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려는 어떤 욕망의 발현이며, 곧 여기서 너무나도 가까운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의 불안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미지로부터 탈구되는 자아의 안정이며, 곧 이미지는 그것을 꾀하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들에 파묻히는 것은 이미지로 숨는 것이 된다. 


    파편들의 이미지는 색을 쓰지 않은 대형 작업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색을 쓰되 정물화의 도식이 남아 있는 초현실주의적 도상 배치의 작업들보다 뒤늦게 진행된 작업들이다. 색채를 물감의 성분 측정으로 치환하고 이를 다시 재현하는 작가만의 강박적 기록 시스템의 과정에 속해 있던 이 색채 회화의 계열에서 정물―〈가까스로(Barely)〉(2024. 120×90cm, acrylic on paper.)에서 왼쪽 경계선에 가까이 자리한 원기둥, 〈사라지지 않기를(Hoping Not to Disappear)〉(2024. 116.8×91cm, acrylic on canvas.)에서 상단 왼쪽과 하단 중앙부의 패널과 그 끝의 구를 비롯한 뚜렷한 도형들―은 혼잡한 이미지를 물론 꾀지는 않지만 구분점이 되어 주는 정도의 안정화를 가능하게 한다면(그것은 뚜렷한 형상에 가해진 색상의 명확함으로 다가온다.), 색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그러한 구분점은 특이점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한 변화의 기점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이미지의 파편화에 대한 전적인 이유가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안정화의 기제로서 분산되는 것과 충족을 위한 접합의 역설적인 차원은 또 다른 결여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님 또 다른 가설, 애초에 초자아적 시선이 결여된 지점에서의 무한한 자유로움의 만끽인 것일까. 여기에는 우선 주요한 작업 과정에서의 매개가 자리한다. 곧 흑백 회화에서 결정적인 건, 그리고 색채 회화와의 결정적인 차이를 형성하는 건 실제적인 풍경의 재현적 토대이다―역으로 돌아가면 명확한 지시 관계로부터 벗어날수록 회화는 정신 심리적인 풍경의 토대를 구성해 내야 하고, 그것이 색채 회화에서 초현실주의의 어떤 풍경으로 연장된다. 

    인천과 부산의 각기 다른 풍경의 양식, 이방인으로서와 원주민으로서 상관적 관계로부터 무한한 시선의 횡단과 피드백이 발생하는 유동하는 주체의 지점에서 회화는 분열(적 접합)의 양상으로 기입된다. 그럼에도 이는 재현의 토대 위에 초현실적인 구상과 그것의 결절점의 기능을 흑백 회화에서처럼 여전히 수행한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지점에서, 분산과 그것을 꾀는 기호의 역량, 거기에 담기는 무의식으로서의 의도를 구분해낼 필요가 생겨난다―결과적으로, 흑백 회화의 산만함과 색채 회화의 이질적 경계의 풍광은 질적 변환보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바다 도시(Sea City)〉(2025. 454.6×145. 5cm, charcoal, pastel, acrylic on canvas.)는 전시에서 가장 거대한 작업인데, 중하단부의 바다와 그 위의 다리는 현실의 막대함이 주는 것에 대한 감응적 기입이다. 그리고 그 위의 커다란 두 개의 타원형 오브제는 입체적인 차원에서 아래의 바다-다리의 방향에 상응하며, 추상으로 번역된 세계의 차원을 보여준다. 물론, 너머의 세계는 색채 회화의 정물이 갖는 초월적 지위에 상응한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차원은 그 차원이 경계선으로 분기됨에 의해 드러난다, 2차원의 3차원적인 표현으로써. 아래쪽 타원형 위에 올라가 있는 모래시계는 이 측정 불가능한 광대한 세계를 심리적인 차원의 무한함으로 변용한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상징이다. 산만한 듯한 풍경에서 이 도상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상징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 산만하다고 보이는 건 어쩌면 색으로 분기되지 않아서라는 추측에 자연 이르게 된다면―이는 이중의 상호 작용 아래 놓이는데, 거꾸로 색으로 분기되지 않기에 산만해질 수 있다.―, 풍경의 이질성을 왜상으로 복원, 복기하려는 노력―산만함으로서 풍경은 분명 정신분석적 알레고리를 구성한다.―은 더 넓은 차원에서, 곧 작가의 기존 작업과의 궤를 잇는 차원에서, 초현실적 심리의 토대를 구성하는 원리를 어떻게 연장하는 것일지를 추적하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색채의 완연한 대비 속에서의 추상적 도형은 단일 톤으로의 변화 속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실재의 사물로의 이전된다. 여전한 입체적인 레이어가 더해짐으로써 공간을 굴절시키는 차원으로서 회화 안에서, 이 변화는 질서를 구성하는 매듭으로 여전히 기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질서를 구성한다. 곧 회화의 표현적 특질의 차이는 구조적인 질서 아래에서의 변경이며, 그 차이는 연속선상의 흐름 아래 있다. 

    그럼에도 초현실적 도상이 풍경의 한 파편으로서 실재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후자의 자율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결절점으로서 이 산만한 풍경을 꾄다는 점에서, 그렇게 선택된 기호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현실보다는 초현실주의의 배경을 상정한다. 차원이 생겨나고 접히고 뒤바뀌는 사태를 꾀는, 그것에 머물러 있는, 그것들을 관찰하는, 관찰 가능하게 만드는 이 사물의 중심적 위치는 그야말로 위상차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제 “설계”라는 의미, 풍경에 더해진 이 단어는 풍경이 중심적인 위치, 관찰자의 특권적 시각의 발명으로부터 온 작위성을 띤 의미라는 것을 한층 더 연장하는, 또는 그것을 한 번 더 비튼 의미를 띨 것이다. 그리고 이 작위성으로서 설계는 풍경을 심미적인 차원의 자연적인 머무름이 아니라 동적 가변의 기호들로 해체함으로써 인식론적 차원에서 상정되는 풍경의 기원을 그 스스로에게 되돌려 준다. 포스트모던적 유희로도 불릴 만한 근작의 흑백 회화들이 가진 분열증인 면모는 한편으로는 색채에 대한 강박을 형태의 극단적 과잉으로 뒤바꾼 형식에 대한 형식의 차원을 간직한 것에 따르는 것이지만, 장소와 장소의 피상적 조합 속에서도 그것을 비집고 나오는 문명의 징후들―가령 자연에 비견되는 도시의 거대한 사물들의 공간―은 분명 어떤 특정 서사의 무게가 더해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균열의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전시 개요]

    김보경 개인전, 《풍경설계》
    2025.2.18 - 2.28
    11:00-18:00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프로젝트 스페이스1 (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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