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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려진, 《플라스틱 풀과 물고기의 영역》: 체현되고 감각되고 변용되는 그것REVIEW/Visual arts 2025. 10. 29. 00:52

이려진, 《플라스틱 풀과 물고기의 영역》 전시 전경 ⓒ우에타 지로 (Ueta Jiro). (이하 상동). 화이트 큐브가 아닌, 집을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공간 특성에 맞춰, 합판으로 가벽을 만들어 작품들을 건 모습. 이려진 작가의 《플라스틱 풀과 물고기의 영역》은 유년 시절의 응결된, 해소되지 않은 한 기억을 모티브로 그것을 작업으로 재승화하는 시도로, 그 기억은 이른바 내밀하고도 사적이며 투박한 양상을 띤다. 키우던 두 마리 거북이를 봉선사 연못에 방사한 것이 그것으로, 거북이가 바다로 향할 것이라는 소망은, 합리화의 기제는 〈바다로〉(202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00:04:32. 제작 및 편집 협업: 구은정.)의 바다로 나아간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되는데, 여기서 동인천 근방과 여러 장소가 영상에서는 물론, 전시 곳곳의 작업의 소재로 차용된 건, 봉선사 연못-거북이-홍제천-바다의 연접 관계에 더해 다시 인천을 추가하는 또 다른 비약에 다름 아닌데, 그리고 이는 어쩌면 그 반대의 출발점, 곧 인천을 바다로 결정하면서 거북이의 존재가 강화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인천이 거북이가 최종 정박한 장소로서 작가의 걷기의 경험을 경유해 체현되는바, 이는 실상 작가의 심리적 중핵으로서 거북이, 곧 작가에 부착된 그 무엇으로서 거북이-작가의 도식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려진, 〈바다로〉(202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00:04:32. 제작 및 편집 협업: 구은정.) 질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거북이는 왜 작가에게 특별한 기억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환상으로서(만) 재승화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도의 행위가 줄곧 동반되는가. 먼저 거북이의 방생이 아닌 유기에 대한 반성, 합리화되지 않는 행동에 대한 죄의식과 함께 거북이와의 여러 기억은 더욱 생생해진다. 그리고 그가 합목적적 행위로 치환하던 순간의 명제는 거북이에 대한 죽음이 아닌, 그 죽음의 결정 불가능성의 여지를 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거북이도, 거북이의 죽음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상실의 큰 슬픔을 준다. 그리하여 그것의 알 수 없음은 나의 한 간극으로 부상하고, 나의 끝없는 부유함, 장소 없음, 근거 없음, 조각 난 나의 결여를 매만지는 행위로서 또 다른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된다. 거북이에 대한 애도는 거북이라는 상실된 장소에 대한 제스처로 변환되며, 걷기라는 지각의 실재적 차원 아래 보고 만지는 작업으로 연장되어 그 ‘떠도는’ 거북이의 신체를 완성한다.
동인천 근방의 홍예문을 표현한 조각으로, 첫 번째 방의 창문으로 비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조각을 경유해 다시 몸을 틀어야 볼 수 있는 작업으로, 전시장을 벗어난 가운데, 한 번 더 시야를 조정해야 하며, 이는 공간 자체를 비튼다. “곳곳에 숨겨 놓은” 채 명명되지 않고, 맵의 위치로도 표기되지 않은, 장소로부터 온 다섯 개의 사물들은 회화의 주요 형상에 대한 조각적 구현인 셈인데, 아마도 이는 그 거북이에 대한 내밀한 감촉이 그 장소로(부터) 전이되는 그 경험을, 그 장소의 우연성과 절대성의 차원으로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조각들은 경험을 대리하고 매개하는 차원에서 작품으로 명명되지 않고 전시장에서도 “이탈”하는데,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그러했던 점잖이와 똘똘이 중 똘똘이의 자유를 향한 본능적 여정을 상기시킨다.
이 자유의 여정은 거북이에게는 아마도 해방의 경험을 수여했을 봉선사 연못의 시점을 연장해 어떤 금기 없는 장소와의 만남과 그 장소에의 유유한 행보로서 완성하는 건 바로 작가가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경로이다. 거북이의 죽음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하여 죽음 자체가 되는 것. 작가는 ‘그’ 거북이가 되어 무한한 바다로 나아간다. 거북이의 ‘죽음’이 영속하는 곳, 곧 바다는 죽음충동의 상상적 실재이다―마지막 바다의 장면이 실제보다 그래픽적 느낌으로 구현되다 이내 일종의 배경 그림으로 상정되는바, 그렇게 만드는, 그 뒤로 꿈틀거리며 넘어가는/고꾸라지는 비행기의 구불거림은 거북이의 구현으로, 그 거북이가 바다가 아닌 바다 너머의 초재적 장소로 사라짐을, 또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박제된 육신의 모습을 표현한 회화로, 창문 모서리에 끼어 분리된 오브제 조각처럼 위치한다. 영상은 시작도 끝은 맞물리고, 시간은 끝의 바다이든 시작의 터널이든 끝없는 여정이며, ‘나’는 그 세계에 우연히 덮이는 작은 빛의 표층처럼 덧없다. 영상 옆 창문의 모서리에 기댄, 뾰족하게 식물들이 촘촘하게 솟아난 그 사이에 누워 있는 사람은 이 덧없는 육신, 박제된 죽음의 모습인데, 이는 거의 유일하게 작가 자신이 흐릿하게나마 실체화된 장면일 것이다―얼굴이 지워진 형상이다. 여기서 삐죽한 식물은 수조 안 인공 식물 장식의 형상이 모티브가 된 방 A의 식물 형상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것은 직선이 교차하고 서로를 관통하는 어떤 집합체의 형상이 아니라, 그것들이 (애초에) 분리된 것처럼, ‘하나’가 뿔뿔이 흩어진 채 존재한다는, 묘하게 그 개체적 분자들이 가진 외로움과 차가움을 느끼게 한다―수직의 신체 하나하나와 수평의 신체 하나가 그렇게 교직한다.
캡션을 의도적으로 뭉뚱그려 놓았다는 점에서, 사실 숨겨 놓은 오브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체적으로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전시에서 A에 놓인, 중앙 상단 우측쯤에 놓인 왼쪽과 오른쪽의 입체의 대비되는 두 형상의 회화는, 왼쪽의 오각형과 육각형을 중간에서 붙여 놓은 것 같은 나무와 그 옆의 삐죽삐죽한 나무는, 맞은편 창문 너머 난간에 올려진 입체 형상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데, 이 두 개의 형상이 상징적으로 거북이를 분화시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곧 왼쪽이 거북이 등껍질이라면, 오른쪽은 영상에서 나온 “돌 위에 거북이 거북이 등 위에 거북이”라고 하며, 두 손의 손가락들 일부를 접고 또 펴고 해서 위아래로 교차해 거북이가 일광욕하는 움직임을 표현한 장면에서처럼 거북이의 몸통에서 삐져나온 다리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미끄럽고 까맣고 녹색 물 냄새”로 표상되는, 인공-자연의 기이한 생명 감각의 아우라를 주는 수조는, 죽음과 삶이 병치되는 공간인데, 수조의 가짜 식물이 거북이의 신체로 연장되면서, 죽음에 대한 기억을 건드리면서 동시에 그 죽음이 독립적인 생명의 기호로 봉합되는 장소가 되는데, 곧 그것은 거북이인 듯 아닌 거북이의 부재를 증명하면서 거북이를 상기시키는 멜랑콜리한 기호가 되는 것이다.
좌측 상단의 그림은 양손을 모은 자태가 거북이의 형상에 가까우며, 그 안으로 흐릿한 생명체의 흔적이 가시화된다. 작가는 거북이를 직접 그리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거북이는 작가 자신의 초과된 잔여이자 회화가 증명하듯 작가 자신이 거북이의 일부를 대신하기/이루기 때문이다. 거북이를 말아쥐듯 위아래를 포갠 두 손의 사이에 희미한 얼룩 광선이 지나가는 것처럼 거북이의 존재는 거북이라는 환상에서 거북이의 부재를 뺀 나머지의 묘연한 무엇이다. 이는 방 B의 흑백 배경 위의 회색 손들이 거북이를 재현하고자 하는 어떤 반복의 형상들이 빚어내는 차이의 연작에서 거북이가 손 아래 있는 중간 형상을 지나 마침내 손 하나가 거북이처럼 구부러져 위의 손과 맞닿는 실재의 변환적 지점에 이른다.
수조의 인공 가지-작가의 거북이 다리들을 묘사하는 손-거북이 다리들이 연접하는 기호가 되는 것처럼, 거북이는 작가 신체의 일부를 경유해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기이한 경험에서 실재의 차원으로 응결되는데,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검지를 크게 다친 경험을 하고 나서, 재건된 상처 부위가 거북이를 만졌을 때의 감각에 상응함을 느꼈던 순간이 그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손과 거북이의 손을 체현하는 작가의 손이 만나는 지점은 그와 같은 순간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상처의 감각이 거북이에 대한 감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연결/재접지되는 가운데, 상처는 전시의 차원으로 재승화되고 진정한 것이 된다. 잔여적 기억은 나의 내부로 도입된다.
우측 하단의 두 그림 중 위쪽에 있는 회화는 좌측부터 거북이의 등껍질과 거북이의 삐져나온 팔다리를 형상화했다는 인상을 준다. 
위의 설명된 그림에서, 두 개의 사물 혹은 생명을 조각으로 캐스팅해, 전시장 바깥에 배치한 모습으로, 창문을 통해 앞선 회화와 마주보고 있는 배치를 보인다. 아마 전시의 상징적 표지점이자 그것이 조각으로도 연장된 특별하고 예외적인, 마치 성냥개비 두 개가 세워진 형상 같은 두 개의 나무가 그려진, 앞선 그림으로 되돌아간다면, 그 조각적 연장이 매체의 실험이 아닌, 전시의 합목적적, 아니 필연적인 차원으로 도입되는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시멘트로 주형을 뜨는 작업이 무언가를 만진다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 단지 본다의 경험으로 귀결되지 않는 거북이와의 만남을 보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명명되지 않은 빈 장소들의 점유를 통해 우연적 마주침의 사물들이 절대적인 힘으로서 나에게 다가옴을 표현하기 위해, 부가적인, 초과적인 차원에서 환영이 아닌, 작품이 아닌 질량감의 매체가 필요했음 역시 추정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조각에의 감각은 회화의 2차적 파생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이 전시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가령 두 개의 나무가 마치 하나의 두꺼운 선분을 세워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유화 스틱을 사용해서 그린 결과다. 그래서 그림은 대담하고 전적으로 매끄럽지 않다. 그것은 거친 표면을 직조한다. 지나친 농담일 수도 있지만, 또는 비약에 가깝겠지만 이 스틱은 공교롭게도 거북이 손에 가깝지 않은가. 둔탁해지면서 예민해진 작가의 상처 난 손가락과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회화의 감각과 조각의 감각이 대별된다기보다 조각의 감각으로 회화 혹은 조각이 분기되어 갔던 건 아닐까.
이는 두 매체의 절대적 구분에 대한 관념을 안고서는 결코 추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기원으로서 기억을 들여오지 않더라도, 회화의 형상들이 가진 투박한 조각의 미감은 분명 첨예화된 세부로서 회화의 기술을 시험하기보다 그 형상들의 아우라를 체현하는 데 급급함을/우선함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가―이 투박하고도 대담한 배치의 미학과 색의 구사는 다분히 원초적이고도 감각적이며 동세와 형태의 강렬함에 명료한 승부를 건다. 따라서 조각과 드로잉의 내재적 차원에서의 교환, 곧 조각적 드로잉 혹은 드로잉적 조각이 있을 뿐이다, 마치 거북이걸음이 우리에게 기이하고도 서툰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인천을 고유한 장소로, 동시에 과거와 접촉하며 그 장소성이 지워지는 장소로 두는 이 행위는, 바다라는 최후의 장소로부터(만) 경계 없이 동시에 시차 없이 연결되는 봉선사와 인천을 교환하는 거북이의 운동을 상정한다. 《플라스틱 풀과 물고기의 영역》은 그렇게 작가의 유년기의 기억을 소환하고 반복하며 마침내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접어드는 작가의 모습이 환상의 장면으로 나타나는 데 이른다. 그것은 거북이가 사라진 자리가 덜컹거리고도 솔기 자체로 드러나는 비행기 추락 장면으로 꿰매어지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적잖이 언캐니한 유머가 아니겠는가, 마치 작가의 회화들이 화사한 슬픔(A), 아기자기한 고통(B)인 것과도 같이 말이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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