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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빨강도마뱀, 〈먹태깡에 대한 명상〉: 세계로의 확장, 그리고 내면으로의 재반환REVIEW/Theater 2025. 10. 20. 16:09

극단 빨강도마뱀, 〈먹태깡에 대한 명상〉[사진 제공=극단 빨강도마뱀](이하 상동).
극단 빨강도마뱀의 〈먹태깡에 대한 명상〉은 먹태깡의 주요한 원물(元物) 하나 하나를찾아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섯 명의 배우를 포함한 창작의 과정 자체이기도 한 점은, 5장을 한 명의 배우가 각각 한 장씩 주도하여 전개하는 규칙 안에서 자기 지시성을 띤 발화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특징은 역할이 따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만드는 과정 안에서 본래적 자기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연극의 한 예시로 드러난다. 먹태깡의 원물들은 이들이 리서치와 답사를 통해 찾아 나서는 시도 안에서 조명되게 되는데, 이는 명태, 밀가루, 설탕, 시즈닝, 팜유 순으로 진행된다.
이 원물의 여정, 그것이 과자 한 봉지에 담기기 위한 이동의 경로는 미국의 세계적인 초대형 기업 카길을 인터넷 지도상에서 연결하여 급격하게 도달하게 되는 것과 같이 세계로 확장되는 여정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 같은 과정이 비가시적인 것으로 재료라는 일차적인 정보에는 은폐되어 있음은 그것을 찾아가고자 하는 앎에 대한 충동과 결부되며, 주체와 원물 간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시도로서 작품을 구성한다. 앞선 인터넷상의 검색과 그 나머지에 동반되는 실제 장소로의 탐색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배우들을 매개로 해서 구성되며, 그 앎에 대한 접근과 탐구의 자리를 관객에게 열어 준다.알지 못함의 영역이 알기 어려움의 차원을 동반함은 물리적인 거리의 측면으로, 곧 거대한 산업 규모의 ‘정제된’ 유통망과 그 시스템을 한 개인들이 체현하는 것의 어려움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사회적 의제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감당 불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일종의 숭고함의 미적 이념과 맞닿는다. 그리고 거대 기업에서 드러나지 않던, 또는 유예하거나 근본적으로 실패한 존재의 반향―카길의 경우, 거대한 창고들의 거점들로서 특정화되는데, 이는 얼굴 없는 단일한 하나의 인격으로의 봉합 자체를 넘어서지는 않는다.―과의 윤리적 거리감과 친연해 보이는데,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곳이 아주 먼 곳이며, 곧 그 실재적인 장소의 심각한 문제가 근본적인 그곳만의 차이로 여겨지며, 그 ‘차이’는 그 거리만큼 일정한 시차로 인해 확보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거리만큼 우리는 그곳이 친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또 일정 거리를 확보하며 마치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이는 곧 “명상”의 태도가 아닐까.

카길이 쉽게 가까워지고 정보로 산출되며 굳어지는 데 반해, 팜유를 생산하는 팜나무의 열매를 따는 공정은 존재를 실체로서 매개하며 ‘목격’되는데, 마치 그 안의 시간 감각은 팜나무-노동자의 닫힌 세계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신화적 시간처럼 승화된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김채린 배우로 대표되는 극에서의 윤리적 괴로움은 기본적으로 숭고의 차원에서 타자로서 존재를 함입하는 것에 가까운데, 이는 〈먹태깡에 대한 명상〉의원물의 표면적 정보와 그 원물의 생산 과정과의 간극을 좁히는 시도가, 다분히 그 사이에서 닫히는 피드백, 달리 말하면, 그 원물에 고착되는 결과에서 기인하는 바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막연히 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것에 심대한 사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앎의 충동으로 이끌리게 하는 대신에, 그 거리를 본래의 기준에서 결정화하는 것이다. 곧 존재의 반향이 원물, 원점으로서 그것과 어느 정도 차이를 두고 있는 한에서, 그 차이만큼의 그것으로 근본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타자성이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자리 잡는지에 대한 원점에서의 성찰이 필요해지는 것인데, 현장을 바라본 ‘나’의 현존이 그 타자의 언어와 나와의 관계, 그리하여 ‘나’로 치환 가능해지고, 다른 나의 차원이 그로부터 드러날 때 그 타자성의 나이브함은 내 안의 타자성의 견고함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먹태깡에는 먹태가 3.9퍼센트밖에 들지 않았고, 먹태깡이 곧 먹태가 아님은 처음에 일단락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먹태는 먹태 맛이 나는 먹태가 아닌 무엇으로 정의되는데, 곧 먹태의 실제 맛이 아닌 시뮬라크르로서 먹태에 대한 맛이 있고, 그것은 다시 원본의 맛 자체를 그것과의 거리를 지우면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먹태의 맛은 고유한 무엇이 아니라 그와 같은 맛 자체가 된다. 여기서 먹태라는 생명의 기호는 1장의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를 찾아 명태잡이 원양어선에 탑승했던 항해사의 경험이 재현되는 과정에서, 그를 둘러싼 바닷가의 움직임이 어지러운 조명들과 배우들의 움직임으로써 구현되는 무대 전체의 들썩거림의 효과 안에서 포착되는, 이는 곧 비언어적인 양상의 바닷속 명태들의 팔딱거림이다.
〈먹태깡에 대한 명상〉은 이 먹태의 원물인 명태와 먹태 맛으로서 다른 무엇들 사이에서 분석의 가치에 따라 이후 더 많은 함량의 후자를 좇아가는데, 명태의 배면의 생명력은 에필로그 장에서 부활한다. 그 과정에서 움직임으로만 구현되는 명태는 명태의 고유한 시선으로 체현되는 대신에, 더 투박한 매개의 입장을 향하게 되는데, 이는 김민국 배우가 그것이 되어 본다는 발화에 이은 재현의 양상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 돌아오는 매개의 경로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한데, 따라서 타자로의 감행은 앎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여정에서 시작해 ‘나’로의 돌아옴의 경로 안에서, 우리 내면의 차원의 시간으로 재승화된다. 그리고 이는 실로 연결된 두 종을 치며 그 명상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면”이라는 최종적으로 언급되는, 기억의 윤리는 거리에 대한 물리적 확장, 곧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가, 이 거리에 대한 내재적 차원의 해소로 굴절된, 발화의 한 조각과도 같다. 〈먹태깡에 대한 명상〉은 이누이 족이 믿는 만물에 깃든 카무이 신을 통해 모든 존재의 성스러움을 역설하는데, 나와 너, 우리만이 관념으로 존재하는 이누이 족으로부터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보아스와 같이 문화상대주의의 원리를 끌어내기보다 원물과 우리 간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 특히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착취되고 수탈되는 원주민과 같은 존재들을 절대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설탕을 커다란 나무판자 위에 붓고 그것을 뒤적여 마침내 사탕수수밭 하청 노동자의 한 얼굴을 영상으로 중개하는 것과 같다―그 얼굴은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명상’은 사물 네트워크의 한 수렴 결과로서 먹태깡을 역순으로 되돌리는 분석 과정을 통해 인간과 결부된 그 실체들을 파악해 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그 네트워크의 재구성과 재형성의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경로를 구상하는 것과 달리, 내재적인 차원에서 세계의 연결을 세계의 친연성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로 수렴한다.
따라서 사회 비판적 측면의 조망이 안전한 시야와 침묵에의 고양으로 선회하는데, 이는 에필로그의 라오스로 떠나는 일본 선장의 배에 탑승한 국적 불명의 시간과 존재의 위치가 갖는 모호함 혹은 흥분, 그러니까 필수적인 리서치의 범주로부터 벗어난 가운데, 다분한 여행의 한 분포로 건너가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은 다섯 명의 존재에 대한 특정한 위치로부터도 벗어나 명태로 이입하는 한 명으로 수렴하는 작품의 이념이, 픽션으로서의 위치성, 곧 원물들의 나열, 리얼리티의 나열로는 해소, 해결할 수 없는 고양과 전도의 지위로 도약하는 것이기도 하다.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2025.10.02 ~2025.10.12, 선돌극장, 80분
제작진
구성·글·연출: 정지현
글: 김민국, 김채린, 노유라, 백성현, 전지윤
드라마투르기: 이은기
작곡·음향: 김태근
안무: 송성원
무대 디자인: 손영민
의상 디자인: 임은주
영상 디자인: 장주희
조명 디자인: 이지민
조연출: 홍이룡
무대 감독: 이경은
무대 조감독: 김정규
기획: 안지형
홍보물 디자인: 디자인마루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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