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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직,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안티고네』라는 매개REVIEW/Theater 2025. 10. 19. 22:57
사진: 박태양, 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이하 상동). 이성직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착생 식물이 공간 전체를 장식하는 하나의 무대가 되는 환경 아래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안티고네의 서사를 파편적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이는 안티고네와 착생 식물의 형태소 차원에서 언어적 분절과 재조합을 통해 두 개의 단어가 갈라지며 주렁주렁 하나의 신체로 기이하게 엮이는, 또는 환유되는 명명에 대한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안티고네를 착생 식물로 비유하는 하나의 착안이 전제되며, 이 같은 명명은 두 사람의 시차를 둔 두 단어에 대한 호명으로도 볼 수 있을 텐데, 〈착생 안티 식물 고네〉에는 공교롭게 두 명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이 둘은 희곡을 다만 읽어낼 뿐이다. 반면, “안티고네”는 따로 있는데, 그는 처음 중앙의 착생 식물로부터 떨어지는 물 아래 물받이를 놓고 그 옆에 모로 눕는 시작을 연 뒤에는 『안티고네』 안에 메모를 하며 관객과 거리를 둘 뿐이다. 곧 퍼포머가 관객과 같은 시간을 관객 안에서 보낸다면, 그는 끊임없이 관객의 바깥에서 시차를 두며 극장이라는 경계를 간직한다.먼저, 김시락은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 내는 역할만을 하는데, 곳곳에 걸린 착생 식물에는 『안티고네』 본문 일부가 인용된 점자 꼬리표가 하나씩 달려 있고, 관객 자신이 선택한 착생 식물로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 김시락의 손을 꿰어 김시락을 안내하고 나면, 그가 해당 꼬리표를 만져 작은 목소리로 옮겨 주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김시락은 하나의 장소에 머물지 않고 관객에 따라 흘러가는 존재이자 유일하게 그 안의 숨겨진 언어를 풀어 낼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한다.
이는 『안티고네』를 비선형적인 파편으로 추출할 뿐인데, 이 텍스트들은 그 자체로 파편인 동시에 편재하므로 그에 대한 임의 접속의 방식, 곧 그것이 우연적인 만남에 의해 열리게 된 결과는 이 모든 텍스트를 선형적으로 이으며, 전체로 종합됨은 불가능하다. 사실 텍스트들은 거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잘 들리지 않으므로, 오직 팔꿈치와 팔이 닿는 정도의 가까움과 그 하나의 방향성 안에서만 그 소리가 보존되므로, 그것들은 대체로 들리지 않는 소리로 머문다.
그럼에도 어떤 구절은 시신을 묻다라는 것이 식물을 심다라는 것으로 환시되도록 『안티고네』가 추출된 것으로도 보이는데, 안티고네가 착생 식물이(라는 메타포가) 아니라, 착생 식물이 안티고네라(는 하나의 존재라)면이라는 가정, 그러니까 두 개의 다른 존재가 제목과 같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차원에서 결부되는 부분이 전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접을 통한 엮임이 안티고네라는 신체성을 문자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생명(력)의 차원으로 다시 쓰는 계기를 만든다.한편, 제목은 두 단어, 두 존재가 착종된 형태인데, 곧 〈착생 안티 식물 고네〉에서 역할들은 전도되어 있고 뒤섞이고 있고 물러나고 있다. 김시락이 이야기를 읽어주는 건 무대 위에 선 배우로서는 아니다. 이는 일종의 극의 스코어이자 강령과도 같은, 후반 김시락이 읽어 내는 공연에 관한 텍스트에 적힌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착생 식물 자체가 무대이면서 그들이 안티고네로 명명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한 김신자가 한 번은 안티고네를 자기의 어투로 약간 전유한 네 장의 종이 중 첫 번째 장을 읽지만, 이는 직후 관객에게 읽기를 종용하며, 그 자신은 계속해서 그 읽기의 역할에서 물러난다, 사실상 연기가 아니라 텍스트를 수행하기의 차원에서.
『안티고네』는 극으로 펼쳐지는 대신, 잠재된 텍스트와 펼쳐진 텍스트―중앙부에는 『안티고네』의 줄거리를 담은 크게 출력된 한 장의 인쇄물이 걸려 있다.―, 다시 쓰인 텍스트이자 함께 읽는 텍스트 들을 유동적이고 입체적이며 산만한 배치의 기율 안에 꾀어 내는 방식 안에서 유예되며 출현하고 결과적으로 보존된다. 하지만 이 보존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의 명제 역시 실천되는데, 안티고네 역의 강혜련이 관객을 바라보고 사라지는, 순간의 응시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떠나는 과정 안에서 무언가를 『안티고네』 안에 적는데, 그러고 나서 그걸 찢어서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생 안티 식물 고네〉의 마지막 텍스트는 찢겨진 텍스트인데, 이것은 물론 읽히는 걸 막아선다. 거기에 적힌 건, 더 정확히는 텍스트에 덮이는 건 관객 한 명 한 명의 인상착의인데, 이는 〈착생 안티 식물 고네〉가 『안티고네』를 관객으로 대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이 김시락의 스코어 읽기, 무대 규칙과 전개를 담은 텍스트를 읽으며 무대 자체를 가시화―그러니까 김시락은 여전히 극 안의 특정 역할로서가 아니라 대독자로서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로 자리한다.―하기 직전에 그 중앙의 구조물 아래 펼쳐지게 된다.
그것은 관객 한 명 한 명을 그 이미지와 텍스트 안으로 불러오는 가운데 관계 맺기의 차원을 추동하며, 그 종이 안의 인격을 실제의 인물로 재접지시킨다. 곧 이 종이가 특정 관객 한 명을 호명해 내며 자신에게 종속시킴으로써 그것은 접히고 흩어진 가운데, 그러니까 김시락(에)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잠재되어 있는 채로, 이번에는 나로부터 바깥이 아니라, 바깥에서 나를 향하며 찾아온다. 곧 다른 이가 나에 대한 종이를 찾아 건네주게 된다. 관객의 대상화는 관객 간의 주체적 교환 관계로 연장된다.〈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제목에서, 식물과 인간의 (상호) 교차성의 차원을 강조하는데, 이는 무언가와 다른 무언가를 결부짓는 행위인 동시에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를 위해 지우는, 희생하는 수행이 전부를 구성한다. 가령 강혜련의 착지가 안티고네가 식물에서부터 옮겨지듯, 그리고 그의 메모가 『안티고네』를 지우면서 타자를 기입하는 행위이듯, 『안티고네』가 김시락이라는 신체에서만, 신체로부터만 출현할 수밖에 없듯, 김신자의 텍스트가 그의 언어에 달라붙은 『안티고네』일 수밖에 없게 되듯,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존재를 타자로부터 이행하거나 타자를 위해 (텍스트라는) 존재를 비워낸다.
그것은 정전을 비워내는 행위이면서, 연극을 보여 주는 대신 연극 하기의 차원에서, 착생 식물과 관객의 견지에서 연극을 다시 쓰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착생 식물로서 수행, 곧 삶을 유동하는 관계 양상 아래 다시 뿌리 내리는 행위에 가깝다. 암전 속에서, 관객은 안티고네-강혜련에게서 앞서 적은 관객 정보가 담긴 쪽지 하나와 걸려 있던 착생 식물 하나를 임의로 함께 건네받으며 동시에 조명 하나가 들어오는 구조 안에서, 가장 정점의 밝아짐, 곧 점점 식물과 함께 관객 서로를 완전히 보게 되는 시점에서 끝맺는다는 규칙의 읽기 수행 이후,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고 나서, 비로소 모두가 무대 위의 존재가 되고 나서야 객석을 나설 수 있게 된다.
김신자가 안티고네의 입장에서, 죽임당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주고자 하는 자발적 양심을 따르려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그의 여동생 이스메네와 겪는 갈등에 대해 항변하는 장면은, 안티고네라는 역할로부터 극에의 몰입을 추구하는 대신, 김신자의 육성과 태도 안에서 마치 그의 사연인 듯 이를 직면하게 하는데, 이는 극 안에서 주요한 논쟁의 요소를 끄집어 내어 안티고네에 대한 관객의 찬동이 종용되는 부분이다.
강혜련이 관객의 표면만을 맴돌고 그리며 식물을 나누어 주는 순간 접면하는 가운데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은 것과 대비해, 김신자는 어떤 역할도 맡지 않고, “배신자”가 아닌 “김신자‘로 자기를 규명하며 안티고네를 걸친 옷을 벗어젖히며, 극의 바깥을 표시하며 무대에 김신자라는 역할로서 선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에 대한 메타포에 상응하는 측면에서, 김시락은 보지 못하는 것을 유일하게 먼저 본다는 점에서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결코 진실을 볼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와는 반대의 차원에서 말이다. 그렇게 텍스트의 경계 혹은 순전한 표면, 텍스트에 대한 바깥 혹은 바깥으로의 텍스트, 보이지 않는 텍스트 또는 잠재된 텍스트가 있다.〈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안티고네』를 해체하고 인용하며 다른 것에 접목한다. 이에 따라 무대, 희곡, 배우는 착생 식물, 관객, 조명을 존재화하는 가운데 대체된다. 중요한 건 『안티고네』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느냐라기보다 어떻게 『안티고네』로부터 새로운/다른 서사를 읽어 낼 수 있느냐일지 모른다. 비인간 존재, 관객이라는 비가시적 존재, 사물이라는 기능적 존재의 양상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안티고네』를 그저 읽어 낼 뿐이고 일부를 인용할 뿐이고 다 읽지 않고 또는 읽지 않고 (마치 식물이라는 존재와 같이) 내버려 둘 뿐이다, 그 너머에서, 그 바깥에서, 그 경계에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착생 안티 식물 고네
2025.9.28 - 10.5 (금 쉼) 전일 19시 30분,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배우(안티고네 역): 강예원
구성 및 연출: 이성직
드라마투르기: 신재욱
프로듀서: 이호연
퍼포머: 김시락, 김신자
공간: 무밍
사운드: 오로민경
조명: 이동현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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