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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민 작,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여성에게 허락된 의무(?!)
    REVIEW/Theater 2025. 10. 19. 21:45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가슴 재건 수술을 1년 앞둔 여성 문솔의 경험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방식을 택한다. 작가의 자전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 공연은 유방암에서 실리콘 가슴 재건 수술로 이어지는 단계를 필연적인 옵션으로 선택하고 마는 여성의 신체적 경험의 특수성 ‘너머’ 사회적 시선의 작용을 파고드는데, 이는 가슴을 가진 매력적인 신체의 여성이라는 상징 언어와 문솔의 꿈을 지배하는 상상적 영역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상응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문솔이 꾸는 꿈은 현실의 영역만큼, 그 이상으로 그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반영되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얽힌 꿈은 무의식적이라도 분명히 신체 체현적인 무엇으로, 상상계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거꾸로 상징계의 이데올로기 작용과 결부된 실제적인 정동의 차원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가슴 제거와 재건 사이의 과정을 겪는 여성의 총체적 신체의 특수한 경험이라는 공연 소재의 문화사회 기술지의 차원에서의 유효함은 페미니즘의 의제로서 신선함에 상응하는 것일 것이다―그것이 괄호 처리 되는 여성의 (은밀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뒤에 그려진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그림을 필두로, 그의 유명한 일화, 유방암이 걸리기 쉬운 유전자를 타고난 신체로의 진단에 따라 유방 절제 수술을 선취한 졸리의 서사는 문솔에게 실리콘 수술을 통해 원래의 아름다운 C컵 가슴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러움과 냉소가 드러나는 서사로 수용된다. 여기서 졸리의 과감한(?) 선택은 그에게 기대하는 또한 그가 소유한 신체의 아름다움을 영구하게 지속하기 위해 그의 실제 가슴이 아닌,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한 것으로 전치되는데, 그의 안정되고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함을 공연은 보여준다. 

    곧 실리콘 가슴은 더 이상 가짜 가슴이 아닌 그의 진짜 가슴의 자리를 획득한다. 어떤 치부(?)―연약함이 아닌―를 자연스러움―인공이 아닌―으로 전치하는 데, 여성이 아닌 주체의 자리를 획득함에는 적극적인 여성의 진술이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 여성의 상징적 지위를 재탈환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아름다운 여성은 진취적으로 테크놀로지의 힘을 활용(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동시에 자신의 신체적 취약함을 드러내고 변화시켰음 역시 드러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여성의 가치에는 아름다움과 자신만만함이 섞여 든다. 새로운 가치의 합성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여성은 자신만만하기까지 하다.’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성은 충분히 자신만만할 수 있다.’ 아마도 후자의 차원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졸리가 아주 특별하게 예외적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월적인 지위를 그의 진술을 통해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그럼에도 이는 대단한 것인데, 그 진술이 없었다면 그 지위를 그렇게 뚜렷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는 문솔을 통해 용기 있게 말하지만, 실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특수한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상징계의 간극이 있는데, 곧 문솔의 졸리의 가슴을 부러워함은 남성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보다, 남성의 시선으로부터의 규정에 의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스스로가 욕망하는 진실의 차원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졸리의 가슴은 그 욕망이 향하는 원초적인 기호로 실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에서 남성의 입장은 거의 예외적으로만 삽입되는데, 촉각적으로 만족감을 느낄 만한 것으로 설정되는 가슴의 제시가 그것이다―그것은 실제 남성의 발화로 드러나는 것 역시 아니다. 여성의 상상적인 차원에서 남성의 손길은 따라서 남성의 시선보다 우세하는데, 곧 대타자를 체현하는 남성의 시선 혹은 사회의 시선 대신에, 오히려 여성 자신의 만족의 차원에서 가슴은 욕망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여성으로서 이미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제시됨에도 거부할 수 없는 이상적 이미지의 차원이 정념으로 간직되는 것 역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졸리는 일종의 절대적인 대타자이며, 또한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잔여적인 타자이다. 무대에는 두 개의 솟아오른 구조물이 쌍으로 자리해 가슴을 상징하는데, 이는 현실이 아닌 꿈과 결부되는 배경으로 사용된다. 가슴 절제에서 재건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꿈은 반영하는데, 재건은 죽음을 희망의 기호로 재처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처음 문솔의 꿈에서 그의 잘라낸 가슴의 무덤이었다가 나중에는 마네킹 졸리의 무덤으로 변용되는데, 그 같은 특이한 변용의 지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졸리는 그의 처음부터 어떤 이상향이 아닌, 가슴의 부재와 새로운 가슴의 요청에 따른 이행의 과정에서 그의 (신체적이기보다 심리적인) 결여를 지시하는 기호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욕망의 기호로 문솔에게 달라붙는 듯 보인다. 그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정적인 결핍과 긍정으로 지시되는 사회적 기호 사이에 자리한다. 후자는 곤란함을 해소하면서 초월할 수 있는 기호로 상정되지만, 졸리와의 간극에서 오는 (새로운) 결핍은 자신의 신체적 결핍을 대체하며 그것을 과거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미래는 자신의 (지난) 신체를 대신해 끊임없이 도래한다. 

    신체의 사라짐이 주는 상실감은 새로운 신체의 이질성이 잠식한다. 마네킹이 된 졸리는 파묻더라도 당장 썪지 않는, 이미 죽은 몸인 졸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는 불멸의 대상이 되었다.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졸리를 인용하고 참조하지만, 이는 졸리와 현실의 간격에서 졸리를 맴돌면서 또는 그 졸리가 나를 맴도는 사태에 대해 발화한다. 곧 졸리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여성의 자리가 지닌 언캐니함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그 부재하는 신체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급부로서 실리콘 가슴이 당연한 것이 되는 사회적 가치를 새삼스럽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성의 혼란이 필연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미적 가치의 이데올로기는 지시되고 비판되며 거부되기보다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일종의 보통의 의학적 매뉴얼에 의해) 개별자들에게 수용되는 그 과정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하나의 우선하는 과제가 된다. 가슴 절제와 재건은 의학 산업에서 유기적 구조를 이루며, 애초에 하나의 과정으로 설계됨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예판되었다가 막상 절제를 하자 심각한 암의 전이를 가지고 있음으로 드러난 문솔의 예외적 사례를 통해 드러난다. 그가 심각했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진단했다면, 그는 사전에 가슴 재건 수술을 거의 하달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방암으로 경황이 없는 가운데 그는 아마 체념하듯 그 후속 절차로서의 수술을 수용하지 않았을까, 그가 유방암인 와중에 재건 수술을 생각할 경황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의 동일선상에서. 

    꿈에서 졸리가 언캐니한 기호로 그를 쫓아온다면, 현실에서는 유방암에 걸렸던 공통의 경험의 차원에서 새로운 연대와 참조 모델이 형성된다. 전자는 가슴 재건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모임으로, 잃어버린/되찾을 가슴에 해당하는 도시 이름을 붙이는(하나에서 두 개의 단어로 이뤄진, 곧 절제/재건의 가슴이 두 개라면 두 개의 단어) 룰에 따라 자신은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유방에 대한 이름이 존재의 새로운 이름으로 적극 선취되는 이 흥미로운 사례에서, 영화 〈카사블랑카〉의 O.S.T인 〈As Time Goes By〉가 배경음악으로 따라붙는데, 이는 특별한 영화적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그런 것처럼 희망으로 연장되는 수술에 대한 감정의 이행을 합성해 문솔 고유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한다. 

    실리콘 가슴으로 인한 병이라는 발견이 명확해지는 과정을 겪는 루스의 사례는 그 전에 유방암이 걸렸음에도 아니 걸렸기에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쟁취하는 여성으로서의 건강함을 되찾았지만 사회적 관습과 결합하는 의학 산업의 시스템의 권고에 따라 (재건 수술을 가함으로써) 온전한 신체를 무력한 신체로 전치시킨 의학 산업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의 주요한 참조점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이를 다시 진실과 거짓의 가치로 분배하는 대신에, 그럼에도 혹은 그렇다 하더라도 거짓을 거부할 수 없는 여성의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앙코르와트라는 이름을 새롭게 획득한 여성의 경우, 가슴의 재건은 새로 생겨날 거룩하고도 숭고한 사원의 건립을 의미한다. 피로 물든 사원은 수술로 인한 필연적인 피의 대가를 긍정하는 상징이 된다. 졸리가 등장하는 문솔의 꿈과 달리 그 꿈은 희망으로 가득 찬 찬란한 시적 공간이 된다. 고대적 원형과 결부되는 건 자의적이고도 임의적인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지만, 분명 그건 여성에 대한 타자화의 체현은 아닐까. 곧 여성, 타자에 대한 신비로움에 대한 근대의 노스탤지어―타자를 만들어내는 근대의 시선―가 전제된 것은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연극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가슴을 잃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문솔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유방암 판정을 받고 가슴을 잃는다. 유방외과에서 성형외과로 인계된 그녀에게 의사는 쿨하게 암을 제거한 가슴에 실리콘 보형물을 넣으면 된다고 말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줄 알았던 문솔은 어느새 (실리콘을) 넣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수민은 리서치와 다수의 인터뷰,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희곡을 썼다. 암을 앓고도 재건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가슴의 본질과 의미, 그것에 덧씌워진 사회적 통념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수민

    극작가 이수민은 동시대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유 · 무형적인 억압과 해방에 관심을 두고 작업해 왔다. 히잡 착용을 둘러싼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2022년 제12회 벽산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수상 2022 12회 벽산예술상 희곡상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작가 이수민
    연출 이라임
    조연출 박승훤
    배우 김민주 김현빈 신소연 이아라 이주협
    무대 디자이너 김나은
    조명 디자이너 전하경
    음악 감독 홍석영

    프로덕션 무대감독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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