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의 작가상 2024》: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부재하는 이름(들)REVIEW/Visual arts 2025. 10. 20. 16:22
올해의 작가상은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가
‘《올해의 작가상》은 전시일까?’ 아마도 이 물음은 이를 조직하는 제도에 대한 의문 혹은 회의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혹은 명료한 질문이 아닐까. 이는 제도적 장으로 호출한, 그 해에 4명의 작가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전시 기회를 준 후, 최종 한 명에게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그 제목에서 드러나는바, 부재하는 전시, 기약되지 않은 전시에 대한 어떤 이름이 된다―‘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의 (향후) 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 전시는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그것을 그럼에도 임시로 ‘전시’로 부른다면, ‘전시’는 어떤 이름들―그것은 작업이라기보다 얼굴이다.―로 등록되고 네 명으로 분산되어 기입되지만, 그것이 공공연하게 은폐하는 사실 중에서, 사후의 최종 승자를 유예하는 서사상의 결말 차원은 기이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전시의 가장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된다.
이 은폐의 지점은 다음과도 같다. 곧 물리적으로는 최종 승자의 전시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부분에서 《송은미술대상전》과 결정적으로 분기한다. 곧 후자는 대상 작가의 개인전을 절차로 지정한다―, 상(=전시)은 사실 이미 그가 누구든 간에 주어졌다라는 사실, 그리하여 이것은 ‘진정한 올해의 작가’의 ‘그’ 전시가 처음부터 아니었다라는 사실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선취되지 않았다라는 사실―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로서 이 전시를 연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차치한다 해도―, 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자격의 바깥에서 단지 동등한 것처럼 존재했었다라는 사실, 그리고 그 셋은 올해의 작가의 후보군의 자리로, 원래는 넷에서 다시 셋으로, 자신이 원래 있던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며 이차 강등된다는 사실은 분명 외설적이지만, 추측성 도박의 일환으로, (그것이 심사위원의 차원이든 평론가와 같은 가치 평가의 대상이든 고고한 미술 향유자이든 간에) 더 나은 심미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명목 아래 구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이름은 그 부재하는 전시로서의 이름에 달라붙는,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는 잔여들인 셈이다. 곧 A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체하면서 B…가 증명하는 구조는 그 은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부재가 가리키는 뚜렷한 이름에 대한 선취된 망각 기제라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시차적으로 전시의 후반 진행 과정에 (그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돌연 개입하게 된다. 이 전시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작동이라는 지점은, 부재하는 전시에 대한 일련의 병치들이라는 지점은 각 전시‘들’의 내재적인 질서를 ‘올해의 작가들’이라는 초월적 경계 안에 위치시킨다. 이후 결과가 확정되면서 이미 우리가 본 것이 맞다라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올바로 예측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 앞에 이미 놓였었다는 사실은 가장 강렬한 지점으로 전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결국 하나의 결과가 올해의 작가상을 외설적으로, 언어적으로 감싸고 그것들을 대체로 허무한 공작으로 갈음한다면, 각각의 전시들을 개별적 차원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까. 네 개의 전시는 매우 투명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을 장소 특정적인 것으로(만) 인계한다. 이는 마치 어두운, 이따금 밝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동선을 따라 전혀 상관없는 작품들의 계열을, 감상하기보다 구경한다는 인상을 준다. 올해의 작가들이 아닌 올해의 작가상을 위한 단 하나의 부재하는 자리를 위해, 네 작가의 전시는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하는데, 하나의 전시(라는 분열)에서 네 개의 뚜렷한 물리적 분기점을 선택할 수는 없으므로, 이는 단지 동선의 구획으로만 최종 분리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그 보이지 않는 경계로부터 되돌아오는 느낌을 주는데, 더불어 동시대의 해석 불가능한 미술의 자연스러움 자체를 현대 미술로 수용하는 결과를 승인하기에 매우 적합한 효과를 안긴다―작가는 사라지고 어떤 파편들이 남는다.
윤지영, 《올해의-작가상-2024》 전시 전경. 작품은 벽에 쌓여 있고, 의도적으로 서로에 눈 감고 있으며, 하나의 전시인 양 주장되고 있다. 이 와중에 어떤 하나의 전시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윤지영 작가의 전시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이 두껍고도 검게 닫힌 공간으로부터는 차폐된다는 인상을 준다. 이 미약한 전시의 지층 아래 네 작가의 불완전한 작품 아카이브를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것일까. 예외적으로 양정욱 작가의 작업은 빛의 환경에 놓였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작업이 대상을 받은 단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돋)보였다. 작품이 무엇인지 모를, “정서”(김성은)를, “위로”(김해주)“를, 또는 더 구체적으로 작품 구성 차원에서의 “감동”(샤를 란드브뢰흐트)을 안겼다는 것이 그들이 아니라 관객의 이미지 안에서 쟁취되는 듯 보였다는 점, 더 정확히는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 심사위원의 말들은 맥락이 추출된 것일 수 있으나 다분히 공허하며, 오히려 이 작품의 이미지가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매체와 메시지가 결합하는지, 어떤 맥락이 작업의 구조와 동력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내재적 차원의 비평을 철저하게 누락하고, 절대적인 수용자의 태도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어떤 효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만 철저한 확신과 체험적 가치의 절대 평가 아래 견인해 오는데, 이러한 행위는 이 전시로서의 불완전함을 우회해서, 작품의 어떤 토대가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방어적 차원, 봉쇄를 위한 차원으로 오히려 드러난다고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오해가 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은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양정욱 작가의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매도로서가 아니라, 이 작업들이 전시로서 그만큼 탁월했느냐를 떠나 온전했던 것이냐에 대한 반문, 그리고 그 가치 판단이 설득력이 있느냐에 대한 반문을 안고, 거기에서 되돌아가 이 주로 거대하고 느린, 스펙터클로서 동력 장치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냐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점을 돌려 샤를이 “규모 있는 작품은 물론 작업 후 남은 부산물로 만든 소박한 작품이 서로 연결되며 작동하는 지점”이라고 하며, “남은 부산물”을 거론한 것, 그제야 어떤 틈이 만들어지고 그 너머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시점을 덧붙이며 그로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을) 수렴시킨 것(만)은 적확했다.
양정욱,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 2024, 나무, 모터, 전구, 실, 철, 300×700×300cm. 작가 소장. ⓒ 양정욱. 어쩌면 양정욱 작가의 작업은 신체적 차원에서 휴머니즘을 뜨겁게 체현하기보다 문학적 차원에서 부재를 가리키며, 스펙터클의 외양과 달리 그것을 무심한 시간으로 바꾸는 텍스트―언어적 부산물―와 (실제의) 부산물 아래, 작가를 화자로 또 하나의 정동 장치의 몫으로 변환하며, 내재적 정서와 풍경 아래의 정동을 구성하는 부분에서만 그 모든 걸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곧 개인의 윤리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작업은 윤지영 작가의 작업이겠다.
윤지영은 자기의 상처를, 내면을, 연약한 틈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우정과 연대, 타자의 상을 불러오며, 내재적으로 뒤집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상징적으로 올해의 작가상 전시 처음에 위치한 그의 입구 작업은 그물―방어막―이면서 실은 내장기관의 엮음인데, 닫힌 공간으로부터의 벽을 물리적으로 불완전하게 대체하는, 그것의 언캐니함은 더 부각되고 또 오해될 여지가 있다. 일종의 비체로서 그것은 나를 환대하는 대상이자 나를 투과하고 건드리는 대상이다.
그런데 이는 나의 내부적인 것과 공통적이며, 혐오스러운 건 결국 나의 어떤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만들어 낸 외부성에 대한 오인이며, 그것이 나로 통합되는, 인계되는 과정을 겪게 한다. 따라서 작업은 그 오인된 초점을 내부적 확장으로 수렴시킬 때 왜상이 아닌, 그것의 복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양정욱 작가의 작업이 인간적인 무엇의 공통됨을 비교적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우회적이고 간접적이고 더군다나 개인의 충동에 맡겨짐으로써 그것이 오인되(는 데 그치)거나 방어적 차원에서 잔여로만 남는 결과를 가져오는 듯 보인다. 그에 반해, 양정욱 작가의 작업은 수용되는 데 있어서도 그리고 그 수용의 과정에서 어떤 것으로 승인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하다.
반면, 권하윤 작가의 작업과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작업은 사회적 차원의 윤리로 비교 범주를 형성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작업 모두 공간의 제약이 컸다. 먼저 작업의 차원에서 권하윤이 그 사회를 보는 나의 거리를 환기하는 것으로 윤리적 주체(의 흔들림)의 위치를 드러낸다면, 제인 진 카이젠은 타자성의 사회가, 문화가 심미적 차원으로 격상되며 재현되는 가운데 그 주체/화자의 입장을 누락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는 입양된 작가의 내력으로 이양되며 또 다른 타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찾아온다. 그러니까 모순은 우리 안에서 의도치 않게 생겨난다.
곧 개인의 서사는 그를 제외한 한국인의 보편적 서사로 뒤집히는데, 이 과정에서 제주는 환상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초월한다. 제주는 어떤 양가감정들, 모순된 정서 속에 타자화되는 개인의 고향으로 찾아온다기보다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우리가 경외시하거나 도달 불가능한 타자의 시선 안에서 또 다른 타자(의 장소)로 갱신된다. 또는 그 타자의 시선 자체가 된다―제인 진 카이젠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우리가 알던 입양인의 슬픔과 왜상의 흔적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하윤, 〈모델 빌리지〉, 2014, 모형 실사 촬영,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9분 39초. 프로덕션: 필모. 작가 소장. ⓒ 권하윤. 다음으로 공간의 차원으로 돌아온다면, 권하윤 작가의 작업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그것은 제약을 극복하는 대신, 그 제약을 적극 용인한다. 한 명만 예약제로 체험할 수 있는 VR 작업이나 두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벤치를 활용한 또는 그에 상응하는 헤드폰이 마련된 영상 작업들이나 그것은 소수의 집중된 관람자 외에 서성거리는 산만한 관객의 외형을 만들어 낸다―이 모든 공간에서 이 모든 작업에 적절한 관람 환경이란 존재했는가. 그러니까 공간이 전시를 초과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가 공간에 넘쳐 흐른다. 영상의 설치로서 형식은 절대 시간이 가진 순수 내용(의 넘침)으로서 수렴되고 따라서 이미지의 외형으로 분기되지 않는 부분은, 그의 고유성과 진정성을 관객으로 매개하지 않은 큐레이팅의 적극적 역할의 부재로부터 고착된다.
반면, 제인 진 카이젠은 하나의 단일 공간이라는 제약을 동시다발적인 시선의 향유를 통한 입체적 설치-이미지로 돌파하고 전유해 내는데, 그 이미지들이 감속화된 화면의 높은 해상도를 띤 클로즈업으로 점철되는 가운데 피상적이고 핍진한 외양으로 소비되는 데 그친다는 것, 이는 두 작업의 상반됨을, 동전의 양면 같은 그 차이를 가리킨다. 곧 권하윤의 작업이 세부 맥락의 촘촘함이 그 안으로 갇히고 닫힌다면, 그리하여 소수의 몰입된/충족된/듣는 관객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면, 제인 진 카이젠은 그 내부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남김없이 펼쳐내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하나의 다양성의 총체로서 소비하는/휘발되는/사진을 찍는 (데 만족하는) 관객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제인 진 카이젠, 《올해의-작가상-2024》 전시 전경. 넷의 고유성을 제약하는 건, 형해화된 전시로 축소하는 건, 나아가 경쟁 구도와 단순한 비교 차원으로 그 모든 걸 납작하게 만드는 건 비균질한 그러나 특색 없는 단순한 물리적 구획에서부터 출발한다 1. 우리는 전시를 통해 작가를 확인한다, 또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시는 어떤 맥락과 그에 따른 배치 또는 그 반대의 차원에서의 과정을 요구한다. 올해의 작가상은 온갖 모순들로 점철되어 있다. 올해의 작가상은 책임 없이 그 뜨거움의 열기를 오로지 작가에게 영예로운 것으로 전치하며 부담 지운다. 불특정한 다수의 관객을 구경꾼의 몫으로 인계한다. 작가의 독단적 영예보다 멍에의 다수를 양산한다. 전시의 조건도 성립하지 않지만, 순전한 작가 연구 프로그램으로의 성격 역시 충족하지 못한다. 비평이 후위 부대로 동원되어 출판물로 이어지지만,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지 못하다. ‘올해’라는 미술계 안의 미술 읽기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다.
어쩌면 다른 공간이 장소가, 작가의 시간이, 수용자의 경험―질문(“사이의 질문”) 이전에―이, 큐레이팅이, 결국 전시가, 그리하여 작가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 고유한 장소와 시간성과 경험을 어떻게 작가에게 소급시키고 작가 너머로 이행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 작품들은 각각의 처소를 상상하는가. 그 작품들은 어떻게 작가로부터 놓여나며 수행될 수 있는가. 수없이 작동되는 ‘현대미술’의 자리는 무엇인가. 거기에 부재하는 관객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 장소들은 작품과 함께 어떻게 기억되는가. 그로 인해 성립하는 ‘오늘’의 이름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작업을 만드는 자인가 또는 규모의 경제를 운용하는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자인가. 무엇보다 그 우선순위는 누구에 의해 선택되어야 하는가. 작업은 증명되어야 하는가 혹은 매개되어야 하는가. 아니 어떤 것이 우선순위인 것인가. 그로부터 중간자의 몫은 어디까지 발현되어야 하는가 또는 수행적일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수행성을 적합하게 발현할 수 있는가.
김민관 편집장
- 1. 올해의 작가상에 대한 합목적성의 유인, 곧 “경쟁은 방편이고 지지는 목적이다.”(이주연)는 물론 ‘(작가에게) 경쟁은 목적이고 (수용자의) 지지는 방편이다.’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https://koreaartistprize.org/project/2024/ [본문으로]
728x90반응형'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보경, 《풍경설계》: 과도기적 차원에서 본 해체적 분열의 심상 (0) 2025.10.20 정석우, 《녹색은 잎으로》: 사물, 지층, 시간으로서 회화 (0) 2025.10.19 피에르 위그, 《리미널(Liminal)》: 인간에의 경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경계 (8) 2025.07.30 《합성열병》: 호 루이 안의 관점 제시로부터 (5) 2025.07.15 희박, 《썩지 않는 금은 없다》: 가치의 자의성 혹은 절대성 (0) 2025.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