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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공공적인 그러나 사적인
    Column 2026. 2. 9. 17:11

    《연극in》, 부재의 현상

    《연극in》의 객석 코너[이미지=홈페이지 캡처]. 출처=https://www.sfac.or.kr/theater/comment_list.do

    《악티오》의 《악티오》 스스로에 대한 메타비평은 두 번에 걸친 좌담으로 최근 발행되었는데,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비평의 위기”로 낙착된다. 이러한 논의의 주제는 우선, 《연극in》이 소거된 자리가 역설적으로 연극에 대한 상징적 공론의 유일한/예외적 장소로 부상하는 현 시점에서, 곧 기존의 공론장으로서 《연극in》의 자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 부재를 비판하며 어쩌면 상기하(거나 나아가 애도하)며 상상적으로 《연극in》으로 연장―《연극in》은 자신들이 소거된 자리 그 바깥에서 유일하게 그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그 자리에 대한 권리를 부르짖는다.―되는 현재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인다. 

    현재 《연극in》에 대한 소급적 차원의 정의가 실재적 차원으로 드러남으로부터, 공공성은 허물어진 것으로, 그리고 부조리한 것으로, 어쩌면 존재 불가능한 차원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논의 자체가 《연극in》 바깥에서 진정 《연극in》을 초과하는 것은 아닐까. 플랫폼에서 밀려난, 소거된 존재들이 다시 플랫폼 자체를 탈환하여 정상 질서로 복구하려는 어떤 노력은, 플랫폼이 본질적으로 닫힌 그리하여 불완전한 시스템이며, 거꾸로 불안정함과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그로 인한 취약함을 수용하려는 의지를 통해서만 이상적인 공공의 장소로 기능함을 바로 그 플랫폼을 근본적 차원에서 정의 지으며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이러한 노력은 외부를 향하는 듯 보이지만, 그 외부의 내파라는 차원에서 완벽하게 내재적이다. 여전히 《연극in》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조리하게도 불합리하게도 한 명이 독단적으로 그것을 중단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론장은 그 중단으로부터 (그 ‘중단’을 경유함으로써)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부를 외부로 기입하는 역설의 현장으로 가시화된다. 그러니까 《연극in》의 독자 코너에 올라오는 《연극in》의 정상적 복구에 대한 의견은, 바로 다양성의 지표로서 여러 ‘연극인’의 의견의 하나로서 상징성을 띠며, 그것은 《연극in》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여전히 작동시키는 예외적 표지로 자리 잡는다. 

    초과됨으로서 시작되는 공공

    《악티오》 홈페이지에서, 《악티오》에 대한 소개 문구[이미지=홈페이지 캡처]. 출처=https://actiowebzine.com/about/

    다른 한편으로, 이 《연극in》의 부재 너머에서 빠르게 시급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플랫폼이 민간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연극in》의 부재를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기보다는 결국 공론장이 일정한 ‘관리’의 영역으로 소급될 수 없다는 지점, 그리고 그 관리로 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는 지점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데 가깝다―《연극in》의 사태는 결국 그것이 행정적인 차원에 한정된다고 해도 공공영역의 일정한 관리 아래에서만 그 플랫폼이 작동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공공성은 공공과 민간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공공이 관리하는 것으로 취급되는데, 이 부분에서 작금의 사태는 실은 공공이 주도하는 플랫폼 바깥의 수많은 목소리들이 실은 대안적 플랫폼의 경계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실은 플랫폼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재상상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한 수많은 목소리들을 처리하는 차원에서 공공이라는 것이 사후적으로만 진정 등장할 수 있는 것을 《연극in》의 부재가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악티오》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분명 《연극in》의 부재에 대한 논의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박지선의 시선, 공공과 민간에 대한 뚜렷한 구분을 상정하는 부분―이는 민간의 자생적이고 대안적인 차원, 곧 공공에 기대지 않는 차원을 상상하는 것으로 연장될 수도 있다.―은, 《연극in》의 투쟁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는 결정적 부분으로 보이는데, 곧 《연극in》에 대한 민간의 지배적인 시점은 공공과 민간이 뒤섞이던 이전의 자리에서 그 둘을 진정 하나로 혼동하고 있었음을 넌지시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제가 말하는 공공 영역은 기본적으로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영역을 의미하는 거였어요. 공공성 이야기는 너무 커질 수 있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우리가 일하는 영역 안에서는 공공성, 공공기관, 민간이 개념적으로 분리되어 있잖아요.”(박지선), 이후 《악티오》는 민간이 만들어 낸 공공성의 담론이 모이는 곳으로 부상될 수 있게 되는데, 사실상 《악티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타비평의 자기 소급적 자리는 《악티오》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근거를 산출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사라졌던 바로 그 ‘플랫폼’(에 대한 상상적 자리)이다. 

    하나의 사건 바깥에서, 하나의 사건을 기술하기

    공공기관이 다루는 그 공공의 영역으로서 《연극in》이 어떻게 보면 《연극in》을 애도하는 개인(들)과 송형조라는 개인의 차원으로 재분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악티오》는 차이의 개인들을 끌어 모으게 되었는데, 그것은 《연극in》이라는 사태를 그 중 하나의 사건으로 쪼갤 수 있는 역량을 함의한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공공기관이 다루던 ‘겨우’ 《연극in》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이 멈춰 있게 된 상황 자체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몰론 여기에는 어떤 자본도 투입되지 않는다. 아니 공공의 자본이 공식적 차원의 투여가, 그것의 관리가 혹은 매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쓰고 싶은 걸 데스크의 ‘제약 없이’, 관리 없이 송고하는 방식은 잠재적 역량을 자유롭게, 더 중요하게는 무한하게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실은 《악티오》의 내부 편집 기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는 충분한 비약을 감내한 발언이지만, 적어도 자기 의제를 자기 동력으로 공개적으로 발언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율성을 검열할 수는 없는 일이며―그렇다면 플랫폼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구조이다.―, 또한 미리 승인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것은 사후적인 차원에서의 편집만이 진정 가능한 구조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공 기관의 승인을, 지원을 받는 구조는 아니다. 

    그러니까 민간의 전적인 자율성이 공공기관의 전적인 이양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된다는 것, 이것은 어떤 하나의 상호 연관된 주체들에 대한 이중적 고립과 은폐의 기술과 같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공공기관의 공공과 민간‘들’로서 공공, 이 둘이 작동하는 형식과 틀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방향성의 차원에서 무언가 공공의 의미 자체가 다른 형상을 띠게 된다는 것 아닐까. 결정적 이미지는 이러한데, 곧 공공기관이 공공을 사유화한다면, 민간은 공공을 염원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이때 두 주체는 어떻게 하나의 시민의 자리로 소급될 수 있을까.  그것이 공통의 하나의 이상일 수 있을까.

    매개의 실재성

    지원을 통한 민간의 반독립적 자생의 구조, 곧 전적으로 지원에 의존한 예술 생태계의 현상으로부터, 곧 지원 시스템 아래 편재된 예술이, 관성화된 예술 작업의 생태―곧 지원의 주기에 맞춘 에술의 주기라는 실재적 차원―로 연장된다고 한다면, 나아가 예술의 실질 자체가 관성화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확한 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예술의 반자생적 구조와 관성화된 예술 형식의 차원은 구분되지 않고 쓰이는 듯한데, 이는 예술이 제도를 거스르지 않을 뿐더러 제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차원에서, 제도는 예술가 개개인에게서 비판되기보다 부인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자칫 공공이 일종의 서비스 기관으로 결정되면서, 예술가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한없이 무지하고 뒤떨어진 것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예술이 공공의 가치 영역이므로 또한 공공 기관의 자본은 공공 기관의 관리가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공의 차원에서 투명하게 매개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는 것에는 어떤 틈이 있는 것일까. 공공 기관의 관리 영역을 단지 행정적 집행 영역으로만 소급하는 데 역시 어떤 누락이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예술이 공공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그것이 그래서 (전적으로) 세금으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 사이에 역시 또 다른 누락이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뭔가 이 매개의 영역이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며 동시에 재고되지 않는 가운데, 문득 가시화되는 순간들은 그 누락됨을 재사유할 기회로 직결되는 건 아닌 듯하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연극in》 없는 가운데 《악티오》는 공공성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는가. “공공성은 원래 민간에서도 자발적으로 만들어왔던 영역인데 어느 순간 행정기관이 공공성을 독점하고 대표하는 것처럼 불리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부담을 져야 하거나 대표성을 의심받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고요.”라는 홍은지의 말은, 박지선의 말 이전의 기점, 곧 공공과 민간이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기 이전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은 공공성이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된다는 것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 대한 부분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승리, 선점의 협소한 자리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포함한 불화와 갈등 그 모든 것을 포함한 흔들리는 운동의 영역이다. 아마도 그러하다면, 어떤 플랫폼의 이후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의 시작됨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기약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주목하는 건 《악티오》에서의 이 예측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다. 그것의 우연성이 담기는, 고이는, 의존하는 그 자체로는 어떤 계획도, 목표도 없는 플랫폼의 운동적, 유동적, 불안정적 흐름의 성격이다. 

    반면, 이것은 정치적이다. 아마도 그러할 것 같다. 어떤 선례들이 조심스럽게 쌓여 편집의 방향을 제시,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공공과 민간의 영역을 분리 짓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것은 차라리 부인의 방식이거나 비제도적, 제도 비순응적 민간의 태도로서 의미화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 되기도 하는데, 아마도 박지선은 민간의 독립적 영역을 내세우면서 공공 기관의 어리석음과 부적절함의 어떤 시차로부터의 거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곧 공공기관의 영역을 부정하기보다 부인하는 것 아닐까. 

    오직 사적인 공공성

    이제 하나의 가설을 제안하고자 한다. 사실 예술에 대한 지원이 일종의 공공재적 가치의 의미 아래 예술에 대한 전적인 투여―순수함의 태도―를 승인할 때 등록과 평가 시스템이라는 중간 과정의 매개는 개인들의 경쟁과 생존의 양태라는 곁까지의 서사를 도출하는데, 이때 더 나은 것의 가치 기준이 조금 변용된 차원으로 예술가에게 각인, 체현된다. 자신의 작업을, 계획을, 환류의 효과를 모두 언어로써 선명하게 재구성하는 시간이 필요해진다. 더 중요한 건 이 주어진 통과의례로부터 연장되는 서사의 강도는 공공성에 대한 방향을 굴절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공성은 지원 심의에 대한 공공성으로 온전히 전환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반동의 차원에서 그것을 불공정하게 운영한 공공기관의 폐해와 사적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 안에서 선정에 따른 개인의 온전한 승리라는, 개인의 온전한 권리 취득이라는 서사의 내재화는 그것이 공공의 영역 안에서 작동한다는 애초의 전제를 지우기에 충분한 듯 보이는데, 이제 개인 각자와 공공 기관의 대립이라는 공공성의 새로운 영역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매개는 불가피하며 아니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은 동시에 온전하거나 완전할 수 없다. 

    심사는 물론 민간에 전적으로 이양, 위임되는데, 그것이 공정한지의 여부는 개인적 차원에서 들리지 않는 발화들로, 그리고 때로는 집단적 차원에서 규합되며 공론의 무대를 이룬다. 반면,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공공을 개인의 차원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인데, 이는 결국 제도에 대한 전적인 비판이 아닌, 제도 자체에 대한 부인의 태도에 가깝다. 따라서 공공기관은 그것이 지향하고 수행하는 영역의 차원과 별도로, 개인들이 겨누는 공공성의 간극, 실패의 위상을 점유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공공과 민간 사이의 영역, 공공과 민간이 중첩되는 영역, 공공 너머의 영역, 이 세 영역에서 민간은 존재하는데, 민간 너머의 영역을 상정하는 건, 곧 민간의 이상적 영역을 공공의 차원으로 옮겨놓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지점에서 공공은 민간에 빚지고 있는데, 여기서 질문은 또는 의문은 오히려 공공의 공공적 영역의 올바른/온전한 확충이 이뤄지지 않느냐라는 것이 아니라, 왜 공공 너머의 영역의 어떤 민간의 영역이 보이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은지의 말은 완벽하게 《악티오》의 등장과 자리 잡기의 연쇄 과정을 설명하는데, 곧 그가 말하는 ‘원래의 공공성’, 민간의 자발적 차원에서 만들어지던 공공성으로부터 《악티오》라는 잠재적 자리가 가시화된다면, 이 공공성의 자리를 잠재하는 누군가의 몫으로 돌리는 데서 《악티오》는 그 민간의 공공에 대한 권력 독식의 차원에 대한 오해 역시 불식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으로서)의 비평

    박지선‧우연‧홍은지, 〈[창간 1주년 특집 : 연속 기획] ACTiO 메타비평(2) – “예술의 공공성을 다시 생각한다”〉, 《악티오》[이미지=홈페이지 캡처] 출처=https://actiowebzine.com/2026/02/02/%ec%b0%bd%ea%b0%84-1%ec%a3%bc%eb%85%84-%ed%8a%b9%ec%a7%91-%ec%97%b0%ec%86%8d-%ea%b8%b0%ed%9a%8d-actio-%eb%a9%94%ed%83%80%eb%b9%84%ed%8f%892-%ec%98%88%ec%88%a0%ec%9d%98-%ea%b3%b5/

    그런데 이들의 대화에서 공공 기관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 부재를 메우는 건 기이하게도 비평의 자리로, 거기에는 비평이야말로 공공적이어야 한다는 어떤 전제가 있는 것 아닐까.  마치 예술을 심판하는 자리가 비평의 또 다른 분화로써만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들은 개인으로 편재된 예술들을 범주화하며 묶고 설명하고 보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니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비평가는 무력하다. 반면 그들은 원래는 그 반대의 위치를 점유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비평가는 단순히 작품을 리뷰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예술가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읽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박지선) 그런데 그러한 ‘종합적’ 차원의, 작품과 작품을 잇는, 나아가 현장의 어떤 윤곽을 경계 짓기에는 수많은 각자도생의 방식이 우선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엮기와 잇기의 차원에 대한 기대는,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의 비평만을 철저하게 소비하는, 개인의 신화와 그가 만든 마스터피스의 자리를 사후적으로 완성하는 데 비평을 동원하고 전유하는 개인들만이 있는 사회에서 예외적인 역할을 비평가에게 우선 부여하려는 것 아닐까. 곧 비평가를 경유해 작금의 예술 생태계를 부인하려는 것 아닐까. 

    곧 그러한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 누가 읽고자 할 것인가. 누가 자신을 기꺼이 공론의 자리에 올려두고자 할 것인가. 여기서 비평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을 누락하고 있는 것인가. 반대로 예술가들은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읽기로서 비평을 원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비평이 예술에서 너무 많은 세부를 잃고 소실하고 듣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와 반대로, 이 셋은 비평이 하나의 작품 읽기에 고립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작품과 작품의 연결이, 종합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불안정함에도 무엇보다 불완전함에도 시도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자신들의 대화로써 체현한다. 

    공론을 가장한 대화라는 형식

    대화는 순결하지 않다. 또한 불화와 간극, 오해의 점철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른바 끝없는 비문이며, 교정되지 못한, 아니 교정될 수 없는 맥락들의 연속이다. 또한 우연한 맵핑이다. 실체화되지는 않은 아이디어가 부상하며, 그것의 실패한 그림자를 은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화라는 건 끊임없이 자신의 말만을 너의 말을 빌려 또는 가로질러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동시에 너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컨텍스트에 의존해 적당하게 자신의 말을 마무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글이 될 수 있는가. 엄정한 차원으로 완성될 수 있는가, 아니 책임질 수 있는가. 공허한 말들의 무덤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들은 사실 비평가를 소거하면서 비평가를 이상화하는데―또는 이상화된 비평가의 자리로부터 비평가를 소거하는데―, 거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그 부재하는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곧 이것은 비평가의 자리를 선취하며 예시를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흥미롭다. 곧 ‘비평가는 주어진 자리가 아니라, 오로지 현재에 진정한 비평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임시적 자리일 뿐이다.’ 

    비평가들의 연대, 비평가들이 모인 공론의 장이 더 필요함을 상기시키는 이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잡지사의 연말 결산의 좌담 형식이거나 주기적으로 갖는 한 연극을 주제로 여러 논자가 이야기하는 방담의 형식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주제를 갖고, 또는 동향에 대해 더 많이, 또는 긴급하게 모이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면, 이 셋의 대화는 어쩌면 그런 비평가들의 대화를 추동한다. 

    이들의 대화는 어쩌면 《연극in》이 시도했던 어떤 새로운 주제에 대한 좌담의 차원이 현재, 또는 《악티오》에 부재함을, 또는 그것이 《악티오》 안에서 수행됨을 기약하는, 곧 그 미래의 자리를 선취하는 것처럼도 보인다―따라서 그것은 상상적이면서 또한 수행적이다. 곧 이곳에서 실행은 기획과 실행 그 모든 몫을 당신에게 부여한다, 책임과 권리를 한 번에 안겨준다, 당신을 민간의 영역으로, 공공 너머의 영역으로 호명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비평가를 경유해,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되던 비평의 심급을 재정초하는 것이기도 함은, 비평에 대한 공공 영역으로서 환원이 갖는 위험 뒤에 제시된, 그에 대한 달콤한 유혹이기도 하다. 

    예술의 조건에 대해

    비평은 무엇을 다뤄야 하는가. 비평은 공공을 규합하고 설정하며 그것이 반영하는 시대성을 갈음하는 일일까. 우리가 전적으로 공공기관으로서 공공을 다루고 있을 때, 민간의 공공으로부터의 권리와 민간의 영역을  등치시키고 있을 때, 우리가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무엇 아래에서‘만’ 그것을 한다는 것, 거기에 아마도 제도의 관성과 예술의 관성이 맞물리는 지점, 곧 ‘제도로부터의 예술’이 가리키는 이중적 의미가 자리할 것이다. 

    결국, 그 양 갈래의 방향에서, 제도의 수용이 아니라 제도에 대한 의문이라는 다른 출발점을, 곧 제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조건을 제도의 차원에서 선택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찰하는 예술을 앞세워야 할 것인데, 그것은 결국 예술의 조건 자체에 대한 사유가 예술의 사유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비가시화된 그 제도에 대한 사유가 아닐까. 나의 예술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에 대한 물음 아닐까. 

    제도가 예술을 흡수한다면, 어쩌면 예술이 제도에 흡수됨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비평 역시 제도에 부속됨을, 제도에 부속되는 예술에 부속됨을 의미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비평의 조건은 그 공론의 장소로서 비평의 자리가 민간이 아닌 공공 기관의 차원에서만 어쩌면 가능함을, 곧 《연극in》의 부재의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즉자적으로 비평가가 아니라는 가정 아래. 하지만 그들이 최초의 비평가라는 가정 아래, 또 다른 대화가 예술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에 내기를 걸어 본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비평이 생각보다 공적인 차원으로 여전히 유효함을, 사적인, 내재적인, 그리고 비제도적인 차원의 출발로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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