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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폭발하는 구멍 작은 것이 커질 때〉: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움직임REVIEW/Dance 2025. 10. 20. 16:37
임은정, 〈폭발하는 구멍 작은 것이 커질 때〉리허설 컷.[제공=임은정] 춤은 온전히 이미지로 수렴될 수 있는가. 또는(그것이 불가능한 차원임을 전제한다면) 그 반대편에서 이미지가 아닌 온전히 시간일 수 있는가. 사실 임은정 안무가의 안무의 출발선상은 모든 움직임이 재현의 움직임, 곧 그것이 춤으로서 어떠한 의심도 할 수 없는 명증한 이미지들이 되는 것에 대한 반-테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텍스트가 아닌 시간을 상정할 수 있는 건, 결과적으로 임은정의 시공간은 춤의 소멸 직전을 향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두드러지는 건 극소의 춤으로서, 그로부터 어떤 멈춘 시간 자체가 체현되기 때문이다. 임은정이 생각한 움직임은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뺐을 때 얻는 효과에 가깝다.
원래 움직임이 (전형적인) 움직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지되게끔 하려는 안무가의 의도는, 그 움직임이 춤인지 춤이 아닌지, 춤이라는 하나의 질문, 춤이라는 하나의 개념에 걸쳐져 있는, 곧 춤의 경계선상에서 이를 짚어보(게 하)려는 것이다. 움직임은 따라서 확장된 춤의 맥락 아래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춤의 규약을 시험해보는 동시에 이미지를 시간 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라는 시간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은 제도이자 프레임이다. 곧 임은정 안무가를 따라 움직임이 춤으로서 인지될 수 있음의 경계에서 발화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당연히’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이미 춤에 대한 의심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거부할 수 없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바깥의 공간이 온전히 무대의 공간이 아니게 될 때, 곧 무대와 객석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을 때, 이러한 무대의 조건이 갖는 규약성은, 어느 정도 철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컨대 프로시니엄 아치의 공간적 분리와 절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폭발하는 구멍 작은 것이 커질 때〉의 무대가 된 윤슬은 이러한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것일까. 윤슬은 사실상 ‘하나의’ 건축물이자 작업으로서, 이 공간은 객석이 따로 존재하는 대신, 계단을 임시로 객석으로 전유하게 되는데, 이때 계단을 그대로 체현하는 몸의 기울기는 무대의 기울기와 ‘평행’하기 어렵다.
바닥은 한편으로 너무 멀고 또 가까운데, 물리적인 차원에서 거리를 갖지만 극단적 기울기로 수렴하는 ‘구멍’으로서 무대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바닥과 계단-객석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필요로 한다. 객석은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출발하므로 그러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퍼포머도 관객도 적당하게 몸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는 것은 이런 몸의 이지러진 기울기와 (원래 구성되어 있던 것이 아닌) 임시적으로 형성한 거리, 그리고 일종의 원형극장 같은 낙하하는 시선으로 구성된다. 즉, 보는 것은 시공간의 동력학에 결부된다.
이제 펼쳐지는 움직임의 구문론은 매우 단순하다. 누워서 미세하게 배에 움직임을 집중시키는 것에서, 기어 다니는 것, 그리고 휘파람을 불며 복숭아뼈쯤에 닿는 방울을 달고 런웨이를 활보하듯 빠르게 공간을 누비는 것,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명확하다. 처음 시간은 오직 작은 몸들에 고여 있다. 공간 역시 이 작은 구멍으로 수축되어 있다. 여기서 퍼포머는 눈을 감고 있으며 잠이 든 모양을 취하고 있지만, 이는 의식화된 몸일 수밖에 없으며 이미 프로그램화된 움직임으로서 최소한의 몸을 취한다. 이 최소한의 몸은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하(여 사라지)는 대신 최대치의 집중을 유도한다. 곧 인지할 수 있는 건 몸이 움직이는지 아닌지의 차이가 아니라 몸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몸은 시간에 따른 (재)구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몸에 고인 시간은 기억과 경험의 시간에 결부된다. 여기서 몸은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는데, 어떤 차이는 온전한 집중을 통해 담지될 수 있기보다, 고여 있는 시간이 깨어나는 또는 뒤틀리는 계기로 인해 발생한다. 가령 거의 미동도 없는 몸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이 발생함은 그 순간을 목격하기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기억된 이미지가 어느새 달라졌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의 이미지는 시간의 축적이며 그것의 변경은 시간의 변경이자 경험의 변경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또 다른 이미지로의 전환이 아니다.
두 번째 움직임은 기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몸의 이동 경로가 아니라, 그리고 전체의 몸(의 흔들림)이 아니라 바닥과 손의 접촉이다.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짚는데, 앞서 (시)공간이 몸(의 중앙)으로 수렴되었다면, 이제 시선은 아래를 향하며 우리의 시선은 그 몸을 따라 아래를 향하게 된다. 앞선 몸이 공간을 향해 열린 채 공간으로 확장되고 동시에 공간을 수렴하고 있었다면, 뒤의 몸은 공간을 파고들며 동시에 공간으로부터 수렴되고 있다고 하겠다. 곧 몸은 공간을 지시하고 가리킴으로써 공간 전체가 아니라 공간 전체를 지시해 가는 공간의 일부로서 자리한다.
세 번째 움직임은 활보하는 것이다. 이들의 시선은 정면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서 이는 관객을 비켜난다. 이전의 시선이 공간을 조망하거나 지시하며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관객이 체현하게끔 했다면, 이후의 시선은 관객이 대입할 수 없으며 빠르게 공간에 흩뿌려지게 된다. 이질적인 신체로 공간을 튕겨 나가는 움직임은 쨍한 방울 소리와 함께 공간 전체에 어지럽게 집적된다. 이들은 단지 교차만 할 뿐이며 부딪히거나 부딪치지 않는다.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공간에 쓰인다. 소리는 걸음이 각도를 트는 어떤 간극이 갖는 일종의 최소한의 멈춤에서 구성되는 소리의 분절 단위, 곧 최소한의 리듬 속에서 음악으로 인지될 수 있고, 또한 어떤 최소한의 질서를 구성하게 된다.
김민관 편집장
2019.08.30-31 // 만리동광장 윤슬 // 임은정 안무 및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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