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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 〈코스믹 댄스〉: 우주인의 시점을 경유한 춤의 재활성화REVIEW/Dance 2025. 11. 3. 00:51

정지혜 안무, 〈코스믹 댄스〉©정재필(이하 상동). 정지혜 안무가의 〈코스믹 댄스〉는 우주에 보낼 춤을 관객이 직접 실시간으로 투표해 그 결과를 두 명의 무용수가 구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설문은 모두 두 개의 선택지에서 주어지며, 선택되지 않은 다른 한 춤이 어떤 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점에서, 엄밀히 관객은 ‘그’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이미지 혹은 단어가 이러한 춤이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반대편의 춤이 어떤 춤일 것이라는 상상에서는 가로막히게 된다.
그러니까 〈코스믹 댄스〉는 우주로 보낼 춤이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일종의 선택에 대한 자유가 제약된 상상력과 선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우주에 보낼 춤’이 대중의 무지하고 무심한 판단과 제도의 허술함과 성의 없음의 차원을 피드백하는 것일까, 아님 애초에 그 춤에 대한 엄밀함과 의의를 갖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함을, 그 아이러니함의 차원으로 되돌려주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현실을 외삽하는 이 같은 방식은 우주에 보낼 춤을 선택할 권리를 현장의 우리에게 모의, 양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주주의적 훈련과 참여의 기반을 춤이라는 소재 아래 구성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1974년 우주에 아레시보 메시지를 이진법의 비트 단위로 발신했음의 사실과 2025년에 새롭게 춤의 영상을 채택해 보낸다는 실천에서 하나의 경로가 만들어지는데, 이 둘은 모두 가상의 형식을 띤다.
가령 로비에서 상영된, 정지혜가 인터뷰어로 참여해 이명현 천문학자와 국내 최초의 우주비행사 이소연을 각각 인터뷰한 영상은, 정시 입장의 규칙 아래 공연의 일부로 자연스레 포함되었는데, 인물이 접속할 때 발생하는 시차와 화면의 울렁거림, 배경의 그래픽 처리 효과는 그 공간의 특정 장소성을 소거하고 대체하며 일종의 다큐멘터리 필름의 규약을 의도적으로 벗어나, 가상의 효과를, 상상력의 차원을 더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동시에 〈코스믹 댄스〉가 하나의 농담에 대한 진지한 실행이라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애초에 그 최종 결정된 형태가 아레시보 메시지와 같이 ‘압축된’ 기호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는 춤에 대한 기호를 상상하고 선택하지만, 그것이 굳이 춤으로 옮겨지거나 풀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의 독해는 우주인의 몫인 셈인데, 우리가 가상의 춤을 상상할 때 우주인이라는 가상을 함께 상상해야 하는 것처럼, 그 춤이 풀려 나온다면 이와 같은 형상일 것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가상으로서 공작으로, 그것은 결국 우리를 우주인의 자리에 대입하게끔 위치시킨다. 곧 무의미성의 기호가 완성된 기호, 형상으로 발현될 때 또는 독해될 때 또는 재현될 때의 차원은 기호에서 예술로의 변환과 더불어 우리에서 타자로의 변환 아래 놓이며, 바로 이 지점이 두 번째 가상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첫 번째가 현실에 대한 장르물1로 전유되는 가상으로서, 우리와의 격차를 지식과 언어, 상상의 한계가 드러내는 숭고를 어떤 기이한 유머로 치환하는 방식이라면, 두 번째는 춤이라는 언어, 곧 특정 장르에 대한 매체 차원의 질문으로 경유되는 가상으로서, 최소한의 기호가 시간 양식, 움직임 단위, 춤 자체의 장르, 구조로의 종합이라는 복잡성의 기호들로 연장될 수 있느냐의 질문은, 춤이라는 것 자체가 기호로 전달 가능한 것이냐에서 질문에서 출발해 인간-우주인이라는 가상의 교환 속에서, 춤이라는 복잡성의 기호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느냐의 측면, 거꾸로 그것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느냐의 측면으로 연장된다.
따라서 〈코스믹 댄스〉는 우주 메시지에 대한 춤이라는 내용으로서 우화가 아니라, 춤의 본질에 대한 재탐색의 경로를 보여주는 형식적 차원에서의 우화인 셈인데, 그렇다면 왜 이 춤은 사교춤의 여러 형태를 추출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애초에 춤에 대한 기호 혹은 단서, 단편과 춤으로서 기호는 사실은 연결되지만 분열된 상태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아직 우리는 우주인에게 보낼 메시지에 대한 매체를 새롭게 결정하는 데 있어 합의 과정 자체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춤의 형상은 최소한의 영상으로 기록된다라는 전제 역시 없는데, 이는 우리가 보는 것으로, 우리에게 기입되었기 때문이다. 곧 춤의 경험은 공동의 극장에서의 경험으로 근본적으로 ‘대체’되며, 재정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애초에 우주인에 맞는 압축된 매체의 변환은 불필요한 것이다. 더 정확히는 춤의 근본적 특징, 변환 불가능성을 그 모순됨과 함께 드러냄이 〈코스믹 댄스〉의 최종 목적인 것이다. 곧 춤을 춤으로서 ‘재’위치시키는 것, 타자라는 상상적 영역을 경유해, 주권을 지닌 인민이라는 상상적 영역을 동시에 경유함으로써.
그리고 이 송신의 차원에서, 이 춤이 순전히 미결정적인 상태로 놓인다는 사실, 언제 비로소 송신이 되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막연한 상태로 전제된다는 사실보다 더 주요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곧 이 시차와 지연의 전 단계의 합의되지 않음, 설명되지 않음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로 보낼 춤 속에서 이미 그 타자에 대한 응시를 어떤 식으로든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응시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응시되고 있다는 것, 우리가 그 응시를 위해 구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초에 우주인에 맞는 춤을 고르려는 최선의 합리적 선택의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우주인의 시선 아래에서 그 우주인의 기호를, 언어를 나누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그 춤은 우리가 우주에게 보내는 춤이 아니라, 우주인이 추는 춤, 우주인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 보고 있는 그 춤이 아닌가. 우리의 시점이 곧 우주인이 되는 시점, 그러니까 이 춤의 낯섦, 벌거벗음, 순전한 몸짓들은 우리의 위치를 재조정해서 그것을 만지고 있고 그것을 이미지로부터 검출하고 있고 그것을 유일하고도 고유한 어떤 춤으로서 정의하고 있는, 그 재정초의 관점을 우리가 아닌 타자의 시선을 빌려 쉽고도 기이하게 성취한다는 어떤 착각과 오인의 순간에 놓인 것 아닐까.
투표는 그래픽 이미지의 기호에서 단어로, 단어의 개념적 차원에서 문학적 차원으로, 그리고 후반에 이르러서는 투표를 상대방과의 상의 아래 바꿀 수 있는 시간으로 합의와 사유의 차원을 더하고자 한다, 이것이 중대하고도 특별한 힘의 행사인 동시에 윤리적 차원에서 긴급한 의제인 것처럼 말이다. 가령 세 번째 투표는 상반신의 인간 형상을 경계로 에너지의 흐름이 안과 밖,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른 선택이 요청된다면, 그래픽 이미지에서 벗어나면서는, “사건”과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나아가 “작고 큰 것”과 “크고 작은 것” 사이에서 선택을 종용받는다.
이러한 선택은 일종의 역설이다. 작은데도 불구하고 큰 것, 크지만 실제로는 크지 않은 것 등등, 둘은 논리적으로는 같으나 그 느낌의 차원에서는 같지 않고 다른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불확정적이다. 그래서 한 대안은 마지막 이 선택에서 그 두 다른 특성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넣어 명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두 번째 날의 관객은, 작지만 실은 위대한 것을 크지만 실은 초라한 것 대신에 선택한다. 이는 성찰과 토의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종용하여 한 번 더 선택됨으로써 진정한 것이 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춤에 대한 선택이라기보다 언어에 대한 선택, 더 나은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느냐의 선택, 8초가 아닌,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여타의 작지만 소중한 가치에 대한 선택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상징계적 규약 안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결코 합리적이지만은 않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외계인과의 심대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까. 그보다 우리의 진실이 이토록 쉽게 드러날 수 있음에서 우리를 비로소 성찰하게 하는 것일까.
대체로 정지혜의 춤은 상대와 마주하고 거니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반대의 선택지가 아주 다른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어찌 됐건 둘의 춤은 나와 상대방의 조우가 춤임을 가정하는 듯 보인다. 그 상대방에 외계인을, 아니 그 상대방으로 지구인을 놓고 가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분명한 건 그 둘이 서로에게 적대적이지 않으며, 친화적이고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둔다는 것이겠다. 따라서 그것은 춤에 대한 도식이라기보다 춤으로써 상상된 두 존재의 조우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공간에 들어오고 나서 잠시 비쳤던 댄스 마라톤의 자료 영상은, 미국 경제 대공황 이후 암울한 시대상의 굴절된 문화상으로 시작된 그것이 비로소 사후적으로 이 타동적 춤의 양상, 곧 버튼을 누르면 실천해야 하는 두 사람의 몸부림임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기이한 시차는 결국 묘연한 것으로 남는다.
성찰과 흥분, 참여와 구경, 모호한 메시지와 맹목적 선택, 텅 빈 무대, 곧 경계 없늠 무대 위의 투박한 몸짓과 어쩔 수 없이 결부되어 발생하는 경계 위의 정동, 그리고 우주에 대한 미래적 환상과 과거의 인류 역사의 그림자 사이에서 〈코스믹 댄스〉는 타협 없이, 간극을 노출하며 달려나간다. 마치 제한된 경우의 수를 프로세스상 단계 완수로써 지워 나가며 그 자체로 결말 없는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대신 거기에는 어떤 상투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데, 외계인에 대한 재현, 그리고 춤에 대한 재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동시에 춤에 대한 매혹, 형식, 서사, 역할, 의미 역시 그것들이 수행되고 있다 또는 기입되고 있다 또는 기입되기 위해 수행되고 있다의 차원에서 무력해지거나 희미해진다. 그러니까 상대방과의 대응의 한 관계상에서의 우연성, 투박함, 비정제됨의 차원이 그러한 결과의 양태로 드러나는 것 아닐까―예외적으로 둘이 막춤을 추는 하게 한 한 질문의 양상에서.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 2025.09.26 ~ 2025.09.27 금요일 19:30 / 토요일 15:0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안무, 콘셉트: 정지혜
리서치, 퍼포먼스: 김기범, 정지혜
영상: AWF1/2
사운드: 준도
조명: 유성희
미디어 비주얼 : 장주희
기술 지원: 신승백
무대감독: 유창대
프로듀서: 김옥경
프로젝트 매니저: 김서하
그래픽 디자인: 유나킴씨
후원: Tanz-station Barmen
주최, 주관: 정지혜
쇼케이스 (2024.04)
안무 , 콘셉트: 정지혜
리서치, 퍼포먼스: 김지형, 정재필, 정지혜
영상: 윤성준
사운드: 준도
의상: 정호진
조명 리서치: 유성희
무대 리서치: 정승준
아웃사이드 아이: 권령은
무대감독: 조은진
프로젝트 매니저: 최혜원
- 1. 이 영상은 결국 공연에 대해 보충적이라기보다 핵심적인데, 이 영상이 근본적으로 어떤 실제를 뒤바꾸지 않은 차원에서 왜곡된다는 점에서, 이는 공연에 대한 증상에 가깝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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