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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푸름 안무, 〈관객, 되기: 떨어진 감각을 이어 붙이기〉: 관객이라는 선두, 관객의 이전 그리고 너머REVIEW/Dance 2025. 10. 19. 23:52
윤푸름 안무/콘셉트, 〈관객, 되기: 떨어진 감각을 이어 붙이기〉공연 전경 ⓒ 류진욱 [사진 제공= 윤푸름프로젝트그룹](이하 상동). 윤푸름 안무가의 〈관객, 되기: 떨어진 감각을 이어 붙이기〉(이하 〈관객, 되기〉)는 별도의 퍼포머의 등장 없이 관객을 그 자리에 대신 놓는데, 이는 관객이 어떤 것이 되는 것 이전에, 관객 옆(,)에 ‘되는 것’이 놓이며, 그 사이의 간격을 관객의 선택지에 두는 방식을 택한다. ‘되기’ 앞에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로의 이행이 명시되는데, 그것이 소거된 상태는 이 극장의 기이함이 연유하는 비어 있음의 질서, 시간, 체계가 가리키는 의지, 이념, 철학을 가리킨다. 마치 관객-되기에 대한 작은 혼란 혹은 혼선을 안기면서, 명시되지 않는 되기의 주체의 자리에 먼저 관객을 제시하는 이 같은 제목상의 유희는, 관객이 되기의 주체가 아닌 동시에, 되기의 주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이자 그 단서이면서, 부제를 통과하면서는 그 사이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함을 명시한다.
이는 〈관객, 되기〉가 일종의 장치로서 공연, 장치로서 극장을 수행하는, 극장과 밀접한 관련 아래 수행되는 작업의 특질이 사실 관객의 수행성에 기대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떨어진’은 일차적으로 극장 전체에의 감각을 위한, 물리적 거리의 분산됨, 산만함의 위치에서 오는 것이면서 물론 더 큰 차원에서 문제 제기의 성격을 지니는데, 이는 그 ‘떨어진’이 애초에 떨어지지 않았어야 한다는, 또는 떨어짐을 상쇄해야 이상적인 상태에 이른다라는 어떤 부정의 낌새를 감지할 때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떨어진’은 다시 쓰이는데, 이는 분열된, 균열하는 감각 체계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며 감각들의 차이를 그야말로 각각의 범주로 환원 짓는 대신에, 그 감각들 자체를 가로지르는 ‘이어 붙임’의 반대항으로 그러하며, 그 계기가 곧 관객이 되기의 주체의 자리에 틈(,)을 내고 그곳을 ‘선취’하는 것이 된다. 이는 그 되기의 주체인 퍼포머를 소거할 때 곧 아무것도 주체의 자리를 점유하지 않아 그곳에 관객이 자리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일까, 약간의 분절적(,) 다가섬을 통해 되기에 접근하게 됨을 통해서 말이다.
관객이라는 극장의 구성 인자를 무엇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둔다는 전제로 다시 돌아온다면, 〈관객, 되기〉는 묘연한 되기의 주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이행의 가능성을 관객에게 맡기는데, 이는 크게 대화하기, 말하고 듣기, 문자 스코어를 이행하기, 떨어진 것/곳을 보기로 4개의 범주로 묶이는 것 같다. 극장 전체에 깔린 매트에는 질문들이 적힌 책자가 놓여 있는데, 그 두 사이에 어떤 안내 역할도 없이 앉아서 펼쳐냄에 이르는 경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건 동시다발적으로 어포던스가 이뤄질 수 있는 환경 위에 놓인 사물이 제목도 적히지 않은 따라서 규정 직전의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무제의 책자와 같이, 〈관객, 되기〉는 작품의 내용 자체를 충실한, 완전한 무엇으로 두지 않는 듯 보인다.매트에는 자연스레 둘 이상의 사람이 앉게 되고, 인사를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극장이 시작되기 전의 감각, 극장이 주어질 때의 감각 등―전자가 관객이라는 주체를 극장 너머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주체가 극장 너머에서 넘어옴을 체현한다면(이때 관객은 극장, 극장의 유일한 장소이자 그 극장의 유일한 퍼포머/관객이 된다), 후자는 관객이 극장을 직접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만든다는 감각을 관객에게 전가한다.―에 대해 사유함이 요청되는데, 예컨대 극장에 오기 전의 생각과 극장 티켓 가격의 할인율의 적합한 정도를 각각 묻는 것이 그것이다. 두 번째 극장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 열 명 정도 여분의 슬리퍼를 마련해 두고, 교대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후, 내려가면 비계 구조로 짜인 몇 개의 블록들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는 동일한 세 편의 시가 A4 용지 크기의 투명 필름에 인쇄되어 있는데, 그 앞에 놓인 마이크는 그에 대한 낭독을 요청한다.
이 같은 어포던스는 1층의 스피커를 통해 극장 전체로 확장된 감각을, 떨어진 관객과의 거리를 이어 붙이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부분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않은 채 이행된다. (대부분에게) 보이지 않는 이 퍼포머(로)의 선택은 제한된 위치에서(야) 가능하고 또 극장의 분리된 구역과 확장의 기술 아래 재기입된다(는 것 아래 오히려 그는 퍼포머로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또는 도망갈 수 있다). 이는 동시적이지만, 분열적이다. 그러니까 관계는 나로부터, 나의 전적이지 않은 의지로써 상호 침투로 이어지지만, 타자로서 퍼포머(가 되는 나)는 저 너머에 동시에 있다. 나는 끊어지며 너가 되고, 너에게 나는 끊어진 채 스며든다.
결과적으로, 극장을 쓰는 건 관객이지만, 그것을 극장으로 쓰는 건 보이지 않는 극장(의 장치)이며 관객을 퍼포머로 향하게 하는 극장과 관객을 퍼포머로 기입하는 극장은 절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사후적으로, 극장의 경험이 축적되면서부터는 분열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에 관객은 우연하게 극장에 침투되어진다면, 뒤이어 관객은 그 극장에 참여한다기보다 은밀하게 공모한다. 여기서 나는 관객에게 보이려 하기보다 극장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고 싶은 상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는 무심함에 휩싸이는데, 또는 무심함으로 휩싸는데, 이는 스피커 역시 분산된 위치로 확장되며 관객은 그로부터 적당히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느슨한 행위와 관람은 관객과 되기의 관계를 공간적 차원에서의 간격으로, 시간적 차원에서의 중첩과 동시성으로 떨어뜨려 놓는 가운데 작동하는데, 이는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공간, 다시 지하 공간의 열림으로 분열되는 이 기본적인 관객 배치의 구성은 무대의 부재를 메우기보다 형해화하는데, 난반사되며 이지러지고 흐트러지며 포개어지는 공간으로서 무대는 느슨한 관객의 (형태의 완성과 서사의 결말에 다다르지 않는 차원에서) 의미 없는 이행들 자체에서 가시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다만 감지되거나 조금씩 씰룩거릴 뿐이다.
따라서 세 번째 스코어로서 이행은 그 이행들이, 극장에의 분포가 더 이상 무대라는 경계를 지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를 헐거운 것으로, 나아가 헐거운 경계만으로 이뤄진 극장 전체의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충분히 무기력하고 무덤덤하게 됨으로써, 이 느슨하고도 너저분(함이 가능)한 신체의 탈각된 주체성을 향해 기꺼이 가로누움으로써 더 크게 이미 이행하고 있는 신체라는 환경 아래에서는 무언가를 행한다는 인식, 행해지고 있다는 인식 자체 역시 특정한 기호로 갈음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환경으로의 분포를, 다양성의 기호와 그 교환을 위한 안무의 방식으로 유도되었지만, 그리고 그 순서상 클라이맥스의 직전 단계의 차원으로 설정되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른데, 곧 무대를 환경으로 무효화하면서 그것은 비가시적인 차원을 떠나 가시화되는 것의 유인을 상실한다. 곧 어떤 것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되기의 자리는 비어 있기보다 멈춰 있다.
이제 어둠 속에 흐릿한 잔상, 어둠의 잔여를 닮으려 했던 영상의 조각이 조금 더 실체화되면서, 극장이 자신의 경계를, 몸체를 드러내며, 그 되기의 자리를 가장 명백한 것으로, 처음으로, 거의 유일하게 차지하는데, 이는 〈관객, 되기〉가 어쩌면 극장이라는 이름을 소거한 이후, 관객을 전면에 내세울 때 그 관객이 기믹적 초상이었음을, 극장을 은폐하는 기전이었음을, 곧 극장에 드리운 비의식적이고도 비각성적 차원의 점거자에 불과했음을 사후적으로 기입하는데, 프로젝터의 빛을 가시화하는 빛, 그리고 극장 끄트머리, 그 바깥에서 원뿔 모양의 연기로 가시화되는 빛은 극장의 주체를 비우고, 극장의 주어를 새롭게 현전시키며 환경으로서 극장을 유령적 주체의 빈 자리로, 극장의 표면을 극장의 피부로 전복하며 두 가지의 자리바꿈을 수행함으로써 관객에서 극장으로 향한다 또는 이른다.
김민관 편집장
- [공연 개요]
- 2025.08.01 ~ 2025.08.03 금요일 19:30 / 토~일요일 16:0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안무/컨셉 윤푸름
드라마트루그 한수민
시노그라피 로와정
영상디자인 백종관
음악/사운드 정의석
조명디자인 김병구
무대감독 김인성
음향오퍼레이팅 김경남
사진기록 류진욱
영상기록 이정훈
포스터디자인 불도저
프로듀서 박신애
매니저 한채령
도움 권효원, 김건중, 김승록, 김예림, 김지옥, 마이클, 박서현, 박수영, 선은지, 손나예, 송유경, 윤영성, 이민진, 정나원, 정윤영, 조성열
special thanks 꾸준히 해서 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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