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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령은, 〈swallow swallow quick quick〉: 춤에 대한 망각 혹은 메타 학습
    REVIEW/Dance 2025. 11. 3. 00:56

    렉처, 전수, 학습

     

    권령은 안무가의 〈swallow swallow quick quick〉 ©곽민석 @tarotphoto_ (이하 상동).(사진 왼쪽부터) 이민진, 이소여, 이재윤.

    권령은 안무가의 〈swallow swallow quick quick〉(이하 〈swallow〉)은 한국 컨템퍼러리 댄스의 역사와 무의식에 대한 보고(서)와도 같은데, 명료하고 분석적인 서술에 입각한 연대기적 차용의 형식은 근본적으로 부정된다기보다 춤의 형식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이는 그 춤이 무엇이라는 지시 아래 성립한다는 점에서, 〈swallow〉는 일종의 춤에 관한 렉처 퍼포먼스라 볼 수 있다. 이는 춤에 대한 특정한 시간의 형식 아래 기입되는데, 춤이 주요한 전거로 드러나는 가운데 그에 대한 말은 그 비중이 크지 않은 반면 선제적으로 또는 사후적으로 그 춤을 의미로 획정한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결과적으로, 컨템퍼러리 댄스라 불리는 일군의 춤을 ‘학습’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이 하나의 형식으로서 불려 나오고, 일종의 거울을 보며 그 자신과 제자를 동시에 아울러 응시하는 시선 아래―그것은 물론 관객이라는 반사면의 뒤집힌 차원으로 연장된다.―, 명확하게 분절된 춤의 마디들로 나누어 전달하는 ‘전수’의 형태에서, 또는 그것을 학습한다는 이후의 과정에서, 마디마디 박자를 세는 부분에 발화를 욱여넣음으로써 렉처는 춤에 대한 학습이라는 하나의 형식 안에서 연장된다. 곧 렉처는 춤에 대한 것이며, 춤에 대한 학습, 곧 렉처를 경유한다. 

    박자로서 춤, 시차를 도입한 춤

     

    〈swallow〉는 이 렉처 안에서, 춤의 전거에 덧붙은 말 아래서, 춤의 갖가지 형식들이 체화된 지점을 비트는 방식, 곧 익숙한 것들이 간극과 분절의 시간 속에서 우리를 ‘삼키’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swallow〉는 춤 자체가 분절의 감각임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115bpm의 드럼 비트 아래, 하나의 단위를 한 박자로, 두 박자로, 다시 세 박자로 나눠 몸을 쪼개는, 점증적으로 가속되어 “분절”하는 방식에 따라 첫 번째로 명시된 움직임은, 각자의 자율적인 선택 아래 맡겨지는데, 이는 자기로 소급되는, 고유한 움직임의 자발적 경로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강박적 붙들림의 산물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움직임의 미적 새 동기도 의식하지 않는, 순전하게 구조적 몸의 토대를 쌓아나가는 과정과도 같은데, 그다음으로 주어지는 “자유로운 동작”에 대한 수행의 권한은 그 전까지의 박자 쪼개기의 한 선택의 사안, 곧 학습된 것 안의 운용을 결코 넘어서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의 금제로서 “지금부터 처음 떠오른 동작을 선택하지 않습니다!”라는 구문이 더해지면서 마치 한 박자를 지연시켜 그 시차만큼의 간극으로서 움직임을 생산해 내는데, 이는 심리적 지연 작용에 대한 물리적 가시화, 움찔함의 신체 작용이다. 

    이는 특정한 독해로서 모호함과 그 실패의 효과인데, 그것의 감시 작용, 곧 처음 떠오른 동작을 선택하고 가시화하는 걸 하지 않음을 가시화하는 것까지가 요구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도치 않게 움직임과 생각의 관계성, 움직임의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데, 움직임이 생각과 움직임 사이의 지연 작용 속에 있다는 것, 곧 생각과 움직임의 시차를 어떤 선후 관계나 위계 관계의 양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동시에 따라붙는 움직임, 또는 움직임에 대한 생각의 후속적 작용, 반성적 작용을 가시화하는 가운데, 곧 ‘떠올리다’라는 것이 도리어 움직임의 선제적 요인과 차이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역전되는 가운데 그러하다. 

    따라서 이 동작의 주문은 선택하지 않은 어떤 동작이 완전히 가시화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동작을 가시화하는 걸 제어하는 또 다른 선택의 차원을 가시화하며 그것이 어떤 것을 행함을 대신 사유하는 시간으로 가시화된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결과적으로, 어떤 것을 행하지 않음까지를 사유하는 시간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용수는 나아가 우리는 본래는 어떤 동작을 그냥 하는데, 그 동작을 머릿속에서 지정, 곧 생각하고, 생각하기 위해 그 동작을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데, 그것을 다시 멈추는, 진정하게 ‘지연하는’ 하나의 동작, 곧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두 가지 동작을 어떤 지연의 과정 속에서 하게 된다. 

    코드, 습관, 제도 (너머)

    〈swallow〉가 이 분절을 의미화하는 지점은, 코드로서 무용의 계보를 짚어내는 과정의 일환에 속하는데, 곧 분절 동작은 “오늘날의 공연 문화”의 한 예시로서, 2000년대 대학 무용의 한 현장이 이소여에 의해 재현되고, 나머지 세 명의 무용수는 옆에서 참관하며 어떤 동작과의 유사성이 상기될 경우, 경고음을 표하게 되어 있다. 곧 앞선 주문이 스코어이기 이전에 초자아적 명령으로서 그 같은 언어적 심급으로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구음으로 내는 “삐~”는 어떤 동작을 중도에서 멈추는 것을 직접 가시화할뿐더러 그가 잘못 하지 않은 것임에도 주체의 구겨짐과 곤궁을 구성한다. 

    이는 ‘삼켜짐’을 당한 그의 몸에 대한 ‘고약한’ 유머인 셈이며, 습관이 누적된 몸을 비판적 성찰로써 가로지르는 현재의 춤 추지 않는 몸의 영점을 상정한다. 따라서 과거의 춤과의 시차 속에서 주차의 균열을 드러내면서 완성되고 이는 새로운 춤의 양상을 유보한다. 그것은 마지막 길게 지속된 예술 바깥의 장르, 지르박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낭만적임은 분명하며, 그러한 이탈과 비약의 결론은 삼켜짐으로서 무력함, 그것의 강력함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 역시 분명하다. 

    결국, 지르박에의 삼켜짐을 의도하는 이 같은 결정적 방향은 그것에의 애착과 정동의 차원에서 예술로서 춤과 다른 춤의 문화를 짚어내기 직전에서 멈추는데,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로부터 그‘도’ 춤을 추고 있고, 그것이 지르박이라는 것, 그러니까 예술의 심급 안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심급 자체로 확장하며 이탈하는 것으로써 〈swallow〉가 끝남을 의미한다. 여기서 춤의 정동이라는 차원에서, 지르박은 재현의 양상 속에서 또한 또 다른 학습의 (어색한) 몸을 현시하는 것 속에서 다분히 작위적일 수밖에 없는데―아무래도 우리는 그 택시기사분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하기 어렵다.―, 이는 이소여와 김혜윤의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불러온다. 

    곧 소위 흐물거리는 신체와 강건한 신체의 지향은 음악 안에 박자를 집어넣는 것―급격하게 음악 안에 휩쓸려 있음이 드러나는 것―과 음악의 박자를 급격하게 따라가는 것―따라서 그 음악이 표면에 새겨지는 것―의 차이를 가시화하는데, 유일하게 김혜윤이 다른 이들의 회색, 베이지색, 옅은 녹색의 상의와 달리, 갈색 계열의 고채도의 상의를 입은 것은 마치 그 차이를 본격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코드의 (바깥으로의) 서사로서 기능하는 〈swallow〉에서 그의 역할을 새삼 궁구하게 하는데, 이는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이하 『코레오그래피』)라고 하는 책으로 제시된, “컨템퍼러리 댄스를 훈련하는 세 가지 방법” 중 마지막에 그 책을 끼워 넣는 진지한 극적 장면의 재현에서 머물러 있는 그의 모습으로 그를 (재)결정짓는 것과도 같다. 

    언어라는 물질성

    무대 상수 쪽 가에 무릎 꿇은 남자(이재윤)를 마주하고 있는 여자(김혜윤)의 모습은 프러포즈를 받는 무용 드라마 극의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모습인데, 그 안에서 그 책이 ‘삐져나옴’으로써 모호하게 장면이 채 규정되지 않은 채 분절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책이 부정의 근거로 삼는 것이거나 아무튼 책에 관한 어떤 하나의 예시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하나의 클리셰로서 책과 독립적이다―책은 하나의 사물일 뿐으로, 두 사람 앞에 놓인 명확한 경계이자 매개로서 상징물이다. 이 책이 비로소 그 장면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는 건 다시 그 책을 둘러싼 존재 간의 고착됨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책은 관계의 기호인 동시에 그 관계를 봉쇄하는 기호가 된다. 

    곧, 책을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끼우고 애무하는, 상대를 바꾸며 계속되는 물리적 순환의 움직임은, 그 책으로 인해 진정한 것이 된다. 입술-책-입술의 연접은 신체와 신체의 직접적 접촉에서 올 수밖에 없는 연기로서 측면, 거짓된 애무의 차원을 차단한다. 책에 대한 짙은 키스에 따라붙는 나머지 애무의 부분은 이 책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과장되게 실천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으로 인해 애무는 더 거세어지고 그것이 진정한 차원이 된다. 따라서 책은 신체의 불순물이자 진정한 신체의 대리물이 되는데,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마지막 안무 작업의 동향이 이후 인용되는 『코레오그래피』의 구절들이 곧 무용의 세부 언어로 옮겨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을 넘어, 어떤 언어의 차원이 물질화되는 지점 자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swallow〉가 언어로써 작업을 전개해 나가는 양상과도 같이 말이다. 

    『코레오그래피』가 국내에 출판된 2014년이 세 번째 기점이라면, 그 전의 2000년도에 해당하는 극 안에 무용수의 발화가 들어오고, 그것이 자의식적으로 각인되는 움직임은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2000년도에 LG아트센터에서 그의 〈카네이션〉이 공연되었다.―를 상기시키고, 그 전의 1963년은 극에서 언급되는 무용가 육완순이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돌아오면서 곧이어 작품을 발표한 해로, 극적인 긴장을 만드는 신체 사용의 예시로 펼쳐지는데, 다른 두 개가 곧바로 조소와 유머의 차원과 결부되는 데 비해, 마지막이 시종일관 진지한 것은 우리가 동시대의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삼켜졌기 때문이다. 

    조소는 이미 경고음을 저 스스로 입는 이소여의 행위에서 달성되었다. 이어 사방에서 울리는 그 소리들이 마치 내재적으로 그의 신체를 잠식하고 있고, 그 주체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불분명해질 때 그의 몸이 오작동함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결국 한 몸으로 뭉뚱그려진 집단은 경고음을 함께 내면서 그 소리의 잔향 뒤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 소리만이 남는 것이다. 하나의 소리가 모두의 몸을 지배하는 가운데, 하나의 이념에 결박된, 하나의 주술에 걸려든 신체들이 그 소리의 끝에서 멈춰 서고 오직 그 소리만이 유유하게 벗어나 허공에 체류하다 사라지는 것이다. 

    춤의 실천, 시간, 순간

    지르박을 재현하는 것의 한계는 지르박의 시간으로 컨템퍼러리 댄스의 시간을 대체하는 것의 비약과는 별개로, 곧 지르박이라는 예술 제도권 바깥의 춤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움직임이라는 주제적 차원에서의 굴절이 합목적적인 것이냐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오히려 전유의 한 방식이 갖는 가능성의 일환으로 치환할 수 있다. 〈swallow〉의 대부분이 춤을 재현하고 있고, 그 재현 가운데 춤을 의식하고 고찰하고 있다면, 이 마지막은 춤을 현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초자아의 심급도, 명령도, 주문도, 제어도 없는, 고유한 박자의 세계를 지키고 따라가는 가운데 말이다. 

    여기서 재현을 전유의 한 방식이자 그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어떤 춤의 계보학적 나열을 실천하더라도, 그 각각을 추어 낼 때 고스란히 체현되는 춤의 정서, 이념, 본질 같은 것이 머무를 수 있다는 것, 아울러 그 춤을 출 때의 스스로의 감흥 역시 자리한다는 걸, 비판적 고찰이 그것으로 역전되는 순간이 만들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한 무더기의 온전한 춤의 시간은 그 춤의 특정성이나 제도적 심급을 벗어나 고유하게 실천 가능한 시간이며 감흥이라는 결과에 역설적으로 도달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춤으로의 환원이라는 결론은 앞선 무용수들의 차이를 그 전유의 의지와 실천 양상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몸짓으로 되돌려주는 건 아닐까. 

    물론, 〈swallow〉는 안무에 대한 시간의 지층을 특수한 예술 계보 내에서가 아닌 공시적 차원의 춤 문화 일반의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찾는다. 여기서 안무는 무용과 춤의 대립쌍을 가로지르는 실천일 뿐만 아니라, 춤 자체를 가져오는 방식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 모든 것이 춤이 될 수 있는, 모던 댄스 이후의 시간을 재공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구의 춤 이론이 협소한, 특정한 틀을 만들어 냈고, 그것으로부터 밀려난, 밀려났을 수 있는 다른 틈이 적어도 지르박이라는 실천일 수 있음을 공지하는 차원에서, 결국 근대의 확장된 문화 실천 양상에 대한 전반적인 주석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 춤으로부터의 삼켜짐이다, 물리적으로도 무대 전체를 다 사용하는 가운데. 그런데 모순은 그 삼켜짐이 분열적이라는 것, 익숙하거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따라서 〈swallow〉의 진정한 결말은, 다시 말해 얼떨떨한 느낌은, 초과와 잉여의 순간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춤에 삼켜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가리키는 증상, 곧 우리가 무용과 춤의 심급을 구분하고 있고, 하나의 문화적 실천이 그 무용으로부터 밀려나며 우리 스스로에게서 소거돼 있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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