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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컴퍼니, 《모내기》_배현우, 이소진, 천영돈, 김희준
    REVIEW/Dance 2025. 10. 20. 01:15

    배현우 〈SYSTEM IDLE〉: 극장이라는 규칙을 시험하기

    모든컴퍼니, 《모내기ⓒ 최근우.[사진 제공=모든컴퍼니](이하 상동).

    배현우 안무가의 〈SYSTEM IDLE〉은 공연의 규약을 공연 안에 반영시킴으로써 실질적인 공연 외부의 규약과의 혼선을 일으키는 전략을 꾀하는데, 이를 컴퓨터상의 CPU의 사용되지 않은 자원, 유휴 시스템의 퍼센트를 나타내는 ‘시스템 유휴 프로세스(System Idle Process)‘에서 가져온 개념으로써 일종의 시스템에 대한 사고 차원에서 공연과 공연 바깥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SYSTEM IDLE〉에서 그 시작과 끝에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으로, 극장 입장과 동시에 공연이 시작됨으로써 그리고 공연의 끝을 앞당겨 지정함으로써 공연으로서 경계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가령 객석 입구 두 곳에서 검은색 고무줄 머리끈을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이미 시작되는 공연은, 무대 앞쪽에 깔린 인공 잔디 매트를 말아 수거하는 도중에 “끝”이라고 명시하는 것으로써, 그 전에 커튼콜 인사를 하는 것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며 사후적으로 연속적 차원에서 공연의 규약이 선취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공연의 규약을 의태하는 행위들이 공연의 내용으로 지시됨에 따라 공연의 틀이 뒤틀리고 굴절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 셋의 움직임이 과잉과 작위성을 띠는 데는 선글라스 착용의 몫이 큰데, 이는 천연덕스럽게 관객을 응시하는, 그 반대로는 불가능한, 힘의 주관을 드러내는 한편, 그 응시를 통해 파편적으로 일어나는 행위 하나하나를 그 일관된 외형 안에 엮어내는 일종의 환상의 지표로서 자리매김한다. 의상의 기능은 조금 다른데, 그것은 그 의상을 갈아입는 행위 자체에 따라 그 의미를 결정짓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입던 의상을 벗고―, 매트를 수영장의 일부로 설정하는 행위는 번복되고 다시 반복되는데, 이러한 행위는 수영(장)으로의 이행이 아닌, 그 시뮬레이션의 흔적으로만, 일종의 시늉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이는 앞선 관객 연결의 행위가 실제 어떤 결속의 상징도 가져가지 않는 차원에서, (일종의 맥거핀으로서) 느슨한 공연 내외의 경계부를 노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상기할 때, 그것이 내는 효과와 거기에 담긴 의도는 (일종의 기믹으로서) 명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곧 이행이 아니라 무언가의 이행을 기대하게 하는 차원으로 충분한 이행의 몸짓들.

    공연 문턱의 이 부가되는 조건으로서 매트 구역은 그 너머 넓은 공간에서의 진행이 거의 전적으로 추상화된 공간으로 대별되는 것 안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상기하는 건 중요해 보인다. 곧 움직임 자체에는, 의도적인 양태의 양식화의 측면을 제하고 나서 독립적으로 그 심미성의 양식을 산출하기 어려운데, 이 환상 공간에 담기는 비현실성은 이후 리버브되는 음악과 조명에 따른 채도의 소거 이후, 민얼굴의 무대가 드러날 때 갖는 실재의 충격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채워지는 부분에 가깝다. 

    한편으로 이 행위들은 이완되고 바깥으로 열려 있다. 곧 수신호적 기능과 효과를 위한 몸짓들로서, 그것은 형태 이전에 효과를 예비한다. 결과적으로 〈SYSTEM IDLE〉은 잉여적이고 잔여적인 차원의 이미지들이 허용될 수 있는 공간 구성을 통해, 그것을 형식 차원으로 보존하는 대신 형식적으로 투과시키며, 공연을 공연자와 관객이 머무는 하나의 시스템적 공간으로서 정의한다. 이는 공연에 대한 반문, 곧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 자리한 중간물의 고체적 속성이 아닌 경계막적 속성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이소진 〈닿을 때까지〉: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발화

    이소진 안무가의 〈닿을 때까지〉에서 닿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불완전함은 얼굴을 덮은 하얀 천의 지지체로 초점화된다. 이 천을 벗고 관객에 ‘닿을 때까지’ 더디고 흐물거리며 정체된 구간으로서 움직임은, 그 이후 생기를 입고 도약하는데, 곧 얼굴-천의 접촉에서 관객과의 접촉으로의 이행은 이 접촉의 효과를 극적인 도약과 해소, 세계의 확장으로 설정하며 그 자체를 하나의 메시지로 변환한다. 

    얼굴에 쓴 천은 즉물적으로는 신체의 지연과 모호한 시선 및 관계를 성립시키는 한편, 존재의 형벌이거나 외부로의 표식, 또는 존재 자체에 그어진 균열이 과잉적으로 나타난 것―그 균열로 뒤덮인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불투명해진 신체―으로 볼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존재들은 어떤 특정 부족적 집단으로 분류되는 대신, 개체들의 분리와 고립으로 특징지어지며 그것을 지양하게 됨에 따라 곧 ‘본래의’ 존재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존재의 탈바꿈과 그것이 지닌 기쁨의 정동을 마음껏 체현하기 때문이다. 

    이 가면의 층위는 사실 어느 정도의 틈새들과 그에 따른 눈코입의 형상을 분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괴한데, 명확하게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정확하게는 보지 않음을 취함으로써 나르시시즘적인 자신만의 세계에 고착되어 있을 수 있으며, 또는 자신만의 영토에 유착되어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 그럼에도 이 보지 않음의 시선 안에 모든 걸 본다는 응시의 광활한 범위를 취할 수 있음에 따라 그 얼굴의 우묵함에 대한 완전한 응시를 취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가면이, 의상이 쓰는 움직임은 따라서 물리적으로 또는 매체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이고도 경험적으로 무대를 일정 부분 좌우하며, 이를 벗고 나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잉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 또는 그 거리감을 극대화하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 개체들의 닫힌 영역의 한계는 바닥에 가해진 네모들의 그림자를 통해서도 투영되는데, 개성 없는 개체성으로서 갖는 고유성은 이 네모들이 겹쳐있던 것에서 아홉 개의 정방향 영역들로 정확히 분리됨에서 명확해진다. 그리고 곧 왼쪽 하단에서 일체화된 군무가 출현하며 일단락된다. 

    이 개체적 집단의 결정적 분기는 이 끝이 전혀 다른 시작을 불러온다는 것으로부터, 곧 있는 그대로의 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어느새 관객 바로 앞에 나타난 천을 뒤집어쓴 한 명과 그 뒤에 민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그를 포옹하고 자신과 같이 얼굴을 벗겨내어 주는 순간 일종의 해방의 전기가 마련된다. 비발디 사계 중 봄 악장이 편곡되어 흐르는 가운데, 이후의 군무는 그 음악이 상정하는 분위기와 같이 한 발을 엇박으로 띄우며 바닥을 두 발로 구르는 일정한 동작의 리듬 속에 환희를, 망가짐을 띤 얼굴들로 번져나간 몸짓의 자유로운 향연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정동은 급작스럽기에 불완전하다기보다 기괴한데, 이는 전체 구성에서의 불가피한 서사의 방향으로서 그 해방의 증폭됨에 대한 메시지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천영돈 〈기억의 몸〉: 웅얼거리는 그리고 지속하는

    천영돈 안무가의 〈기억의 몸〉에는 웅얼거리는 몸, 어둠 아래 혼자인 몸(최민선 무용수)을 통해 기억의 왜상적 흔적을 다분히 히스테리적 차원의 전조 증상적 면모로서 드러내는 듯 보이는데, 이 신체는 환경적으로도 신경 정신적 차원에서도 유폐되어 있다. 처음 TV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왼쪽 기둥을 향해 기어가는 몸짓에서부터 그는 뒷모습만을 노출하는데, 선 채 한바퀴 회전할 때 역시 고개를 뒤로 꺾어서 그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 얼굴이 한동안 식별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의 일종의 유아어는 분별되지 않는데, 다시 제자리로 와서 기둥에 다다를 때 “어디가 끝인지”라는 하나의 구절만 뚜렷해진다. 

    이 말하기 방식은 매끄럽지 않음이 자연스러운 이행임을 주지시키는, 곧 방황하는 혹은 널브러진 신체의 방향에 따른 말, 곧 말을 할 수 있는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가운데 그 움직임 끝에 나오는 말에 가까운데, 이는 그 연속성으로 인해, 그리고 그 분절적인 문장 구조로 인해 그 움직임 위에 각인된 말이기도 하다. 우측 하단에 위치하면 얼굴을 듦으로써 이 말-신체는 무대의 주체로 이행하는데, 움직임의 원리는 신체의 자기 지시적 산출과 연장을 따른다. 가령 한쪽 다리를 무릎깨로 들고 놓으며/놓치며 두 팔은 그 반작용적 차원에서 솟구친다. 곧 힘은 그리고 그에 따른 움직임은 처음부터 외부를 향하는 대신에, 신체에 가해진 장력을 굴절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움직임은 지속적이고도 내재적인데, 어떤 동작을 구현한다기보다 어떤 흐름 가운데, 이행의 단계 속에, 힘의 일정한 분배 속에, 그 힘의 순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리듬은 이 속도가 지탱하는 시간의 영원성, 고유함, 스스로에게 회귀되는, 스스로를 그 너머에서 마주하고 다다르는 일정한 속도에 따른다. 그리고 마침내 두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돌리는 신체 전반을 운용하는 몸짓은, 시동 이후의 힘의 지속만으로 결정되는 이 몸짓에는 어떤 정동이 감지되는데, 그것은 일견 애잔하면서도 처절하고도 아름답다. 그러니까 이러한 시간의 결정을 만들기 위해, 하나의 지속과 이행의 차원에서만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몸짓은 오직 한 명에 의해서만 전달되어야 했던 것이다. 

    김희준 〈LUCIDA〉: 빛이 된 눈, 세계로의 여행

    김희준 안무가의 〈LUCIDA〉에는 미러볼이라는 결정적 매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며 그 환경 자체를 구성하는 한편, 중반 이후에는 상징적 차원의 매개물로 두 인물과의 관계에서 직접적 대리물로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미러볼에 상응하는 음악에 맞춰, 그 둘은 음악 안에서 음악을 향한다. 객석 가까운 쪽의 천장에 달린 미러볼에 맺힌 빛이 반사된 점의 파편들이 공간 전체에 퍼져, 마치 90도로 꺾인 이음매를 드러내는 공간, 위에서 정면으로 향하는 공간, 곧 비틀어지고 왜곡된 공간의, 더군다나 그 굴절된 표면의 선을 따라 그것에 휘감기며 그 움직임 역시 뒤틀리는 이 공간의 특정성은 분명 그 신체 양상을 구분 짓고 갈음하며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남자(김희준)와 결착된 여자(이영우), 남자에 의해 지지되며 전면에 드러나는 여자, 곧 김희준 위의 또는 앞에 자리하는 이영우의 몫은 몇몇 순간 빛을 발하는데, 더 정확히는 빛의 매체로 결정되는데, 이는 곧 신체를 곧추세우고 정면성을 향하며 미러볼의 반사된 빛에 맺힌 결정으로서 눈이 드러날 때이다. 이러한 정점, 정지는 반복되는 음악이 입혀지면서 힘을 더하는 공간의 환상성으로부터 약간의 환기를 주는, 그것에 제약을 거는 순간이다, 반사 신경적 대응, 멈춤, 행위 등의 일련의 분절적이고도 파편적인 몸짓들의 연속적인 계열 아래에 있어서도.


    여자의 지지체로 존재하던 남자는 여자의 사라짐 이후 급격한 고갈 상태에 빠지는데, 허우적거리던 남자 앞에 던져진 손전등은 그 여자의 환유물처럼 보인다. 손전등을 입에 물고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중앙 공간으로 나아갈 때 드디어 어떤 탐험의 세계가 시작되고, 여자가 무대 왼쪽으로 나타나 역시 손전등을 문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빛과 빛이 엇갈리며 중간의 층을 만들며 마치 수중공간 같은 입체성을 드리운다. 이와 같은 공간성은 조심스러운 뒷걸음질같이 유영하는 것 같은 동작에서도 나타난다. 


    남자는 여자를 목말 태우고 둘은 물속 탐사를 하듯 이동하고, 미러볼을 다시 마주하고 다시 미러볼을 닮으로써 그 여행은 확장된다. 하나의 성좌에 있어 가장 밝은 별을 가리키는 루시다(lucida)라는 제목에서처럼 〈LUCIDA〉는 빛과 별의 메타포, 그리고 그 광활한 우주 공간과 그 사이의 인간 존재의 태도, 이념, 신념, 정동의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2025.07.26 ~ 2025.07.27 토 19:30 | 일 15:00,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프로듀서_김모든
    안무_김희준, 배현우, 이소진, 천영돈
    출연_김은주, 김희준, 박성현, 배소현, 배현우 이소진, 이영우, 이지혜, 최민선, 하연주
    조명 디자인_이승호
    무대감독_최상지
    그래픽디자인_이한수
    사진작가_최근우
    영상기록_연두 픽처스
    컴퍼니 매니저_이보휘
    프로젝트 메니저_최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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