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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역사에 대한 몇 가지 태도들 혹은 방식들REVIEW/Visual arts 2025. 11. 2. 23:43
초과되는 것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는 사회적인 것을 미술로 불러오는데, 이는 그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는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에서 나아가 그 비중이 오히려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어떤 현상으로 되비추어 보게끔 한다. 특히 전면에 나와 있는―역설적으로 사회와 명시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작업은 물리적으로 후면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해, 제주4·3평화재단,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 이르는 주체는 “작가”가 아닌, “협업기관”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상 동등한 참여 주체로 명시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른 강을, 타자를 바라보는 주체, 그것을 활용하고 또 이용하는 주체는 ‘우리’ 곧 미술이다. ‘다른 강’에 스며드는 주체는 분명하게도 우리이며, 중요한 건 그 강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강에 스며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강이라는 것을 타자성으로 지칭하고 변환하며 거기에 특별한 정동을 갖는 건 순수 미학적 감흥의 연장선상에 있다. 1
미술-역사에 대한 어떤 반문
그중 문상훈 작가의 〈전시 《레즈비언!》에 대하여〉는 앞선 분류에서 후자의 차원, 곧 사회 참여적 예술의 재료로서 퀴어―“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작가가 레즈비언을 주제로 만”드는 것―가 아니라 퀴어 정체성으로부터 연장된 작업이 곧 전시가 되는 것―후자를 옹호하면서도―, 곧 이 작업이 어떻게 매개 없이, 미술의 제도 안에 곧바로 등재될 것인지를 묻기보다는 결정적으로 그 제도 차원의 불충분함을, 제한적 필터로서 그 치우침의 특성을 되묻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나아가 전시를 초과하며 아슬아슬하게 저울질하는데, 이는 정체성 정치의 특정 몫을 주장하(려)기보다 그 특정 정체성의 제도적 누락, 분류되지 않음, 몫 없음의 차원을 그 제도의 바깥에서 (그러니까 그 부재 안에서) 그저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바깥에 두는 것을 겨냥하게 되는, 제도 비평적 작업이 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거꾸로 그것을 차용한 제도의 자기 지시적 비평 작업이라는 아이러니함을 상기시키는 지점에서, 이 전시의 주체를 탈환한다.
결과적으로, “레즈비언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레즈비언을 다룬 미술가의 작업만이 (기존의) 예술이(었으)며, 레즈비언의 작업이 왜 미술이 아닌가라는 비판과 반문, 제도 넘기의 차원에서 수여되는 물음으로, 이는 ‘어떻게 미술 안에서 맥락화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결정적 의제 던지기로 급선회한다. 그의 물음은 제도를 겨냥하면서 그 제도의 힘을 끌어오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문장이 겹쳐 있으며, 그 혼종된 문장에서는 주체를 명시하지 않은 채 두 몫을 감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미술 안에서 맥락화되지 않아서 고민해야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제도의 호출이라는 예외적 차원을 벗어나 미술에서 맥락화되지 않는 것의 불충분함의 부조리함을 그 제도 바깥의 존재로서 지시한다. 다음으로 어떻게 그 맥락화를 성사시킬지에 대한 방안 마련의 전제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유념해야 하는 건 거기에 따르는 그 맥락화의 방안 마련의 주체가 스스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주체라는 것으로, 이는 위임된 감각을 수여받느냐의 여부를 낳지만, 이미 그 안에 호명이 있고, 그로부터 붙들려 있는 셈이다.
역사의 미시사적 다시 쓰기
사회 참여적 주체, 대리 혹은 매개, 재현의 주체로서 결정적 차이를 낳는 건, 그리고 이 전시의 사후적 상징처럼 기억될 이미지를 만든 건 이무기 프로젝트의 〈트랜스-젠더-시간-지도〉라는 벽면 위의 도표 작업인데, 이는 한국 근현대사 위에 특정하고도 예외적인 존재들인 트랜스젠더의 연표를 끼워 넣는 작업으로,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의 미시사는 역사에서 분기되고 또 역사의 결절점으로서 상기된다.
그것은 숨겨지거나 은폐된 것을 되불러오는 작용을 공식적인 서사의 연장선상에서 구성하며 역사를 재구성하기보다 보충하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는 역사에의 각인 작용이며, 그 역사 속에 녹아들기, 역사의 재통합이라는 인지적 회로로서 ‘우리’를 수행한다. 우로보로스의 매듭 같은 색색의 연결망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기록을 담은 중앙의 우묵한 홈을 감싸고 있고, 수용자의 관점과 시간은 물리적으로 뱅글뱅글 돌거나 어지럽게 순회하며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으며, 이는 조망할 수 없는 일종의 비선형성의 형상 회화를 보는 것과도 같다.
역사‘들’에 대한 열정 혹은 책무
임흥순 작가의 〈항해〉―(조금 길게 다루는 이 부분은 전시의 전거가 되는 이미지를 만들고, 독특한 고유의 태도를 하나의 축으로 명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는 (‘강’이라는 상징의 유사 계열로서) 바다라는 추상적 공간에 한일 간의 역사적 간극과 왜상을 함입하고자 하는데, 거꾸로 말하면 다양한 역사적 간극들을 하나의 토대로 견인하기 위해 바다라는 보통명사를 경유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장소와 장소를 묶는, 국가와 국가를 연결하는 바다를 더 적극적인 차원으로 드러내는 ‘항해’라는 상상력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일본의 국경 안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초기 재일조선인의 염원과 그리움의 정동과 같이, 역사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차원에서 불가능성의 실재로서 기입되며, 바로 그 지점을 드러내며 동시에 가능한 무엇으로 전유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물론 다양한 인물을 오가는 대상 간의 항해라는 형식적 차원 안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다를 중간항을 토대로 나와 너의 상관항적 교환이 일어난다.
이 교환의 층위에서 역사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주체의 윤리가 진작되는데, 이는 세월호 사건의 타자를 또 다른 타자의 얼굴로써 경유해 그 역사를 갱신하는 작업이다. 대체로 재일조선인으로부터 건너오는 역사의 흔적은 일본인 에토 요시아키의 세월호가 인양되는 걸 목격하고 당시 여름의 바람 소리가 마치 죽은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는 경험의 충격에서 우리의 기입이 아닌, 우리에의 기입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러니까 항해는 우리가 방문하는 저 다른 장소로부터, 저 바깥에서 닿는 우리라는 장소로 뒤집힌다.
에토 요시아키가 관동 대지진의 잔해로 지어진 요코하마 공원에 다다르고 팬플룻으로 애도를 표현하는 가운데, 한국의 임지인이 휘파람을 그 위에 덧댐으로써 두 개의 장소를 하나의 레이어 안에 중첩시키며, 예외적으로 수행성을 앞세운 이 장면은, 일본인과 우리를 겹쳐 넣고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애도를 관동 대학살의 그것을 한데 엮는 작용을 한다. 이러한 애도로의 환원, 비약의 결론은 또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연대의 정치적 (불)가능성을 평화의 매끈한 상징적 절차의 한 예시로 환원시킨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곧 바다가 갖는 일반성과 추상성이 주체의 자유로운 교환 가능성 또는 형해화된 주체로의 심급을 생산하는 기전으로 전제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거대함을 역사의 구체성들과 맞바꾸는, 마찬가지로 항해가 향하는 목적지의 특수성들을 무한한 항해 자체로 봉쇄하는 작업으로서 역사를 갱신하기보다 어쩌면 역사를 소거하는 차원에서 〈항해〉를 바라볼 수 있는가. 조금 더 나아가 본다면, 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에서 타자성의 역사‘들’을 소개해 온, 그것들을 항해해 온 임흥순에게 역사라는 대문자 타자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세 개의 스크린으로 이뤄진 〈항해〉는 주로 인터뷰 대상자를 약간 사선의 방향으로 위치시키는 가운데, 이는 3채널 영상에서 가로 구성하고, 그 중간에 일본에서 인터뷰의 장소를 비롯한 주변 풍경, 사람들을 배치시켜 과정의 일환을 포함시키며 항해 중의 관찰자적 주체를 명시하는데, 그중 이상하게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아마도 임흥순의 손(이거나 그것을 대리하는 것)의 존재일 것이다. 일본의 한 술집으로, 중앙에 찍는 손의 반대 손을 위치시키며 주변 풍경을 무화하는 이 장면은, 무언가를 발화하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자의 무력함을 일견 가리키면서도 그 너머의 현재성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이는 단순한 카메라 테스트 차원보다는 주체의 떨림, 더 정확히는 역사의 거대한 무게를 떠안는, 떨림의 주체를 가시화한다.
그러니까 이 주체의 대상화는 역사의 흔적을 안은 주체들의 대상화의 연장선상에서 형식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 주체의 공백을 혹은 균열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한편으로는 물화되는 대상에 대한 작업, 그리고 그것에 예속되는 주체의 휘말림 모두를 바라보는 동시에 되비추는 자의 무게를 허허롭게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가 발화해 온 것은 무게감 있는 역사의 특수성과 구체성이 아니라, 그 역사를 거꾸로 무게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로부터 작아지는 개인으로) 환원하는 작업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역사로부터의 (다른) 개인(들)이 아니라, 역사화되는 개인, 역사 앞에 작아지는 하나의 개인 자체가 아니었을까―그리하여 도달하는 개인의 지위는 역사에 대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역사를 듣는 자가 된다(그리고 이는 다시 역사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관동대지진 사건을 경유해 세월호로써 끝맺음 되는, 또는 세월호 안에 관동대지진을 결속하며 종착하는 〈항해〉는 그 직전에 4.3사건이 일어난 제주에 돌연 불시착하는데, 곧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일본이 아닌 것으로서 동시에 한국의 예외적 분리의 장소로서 제주라는 제3항이 자리한다―따라서 타자를 향한 항해로서 제주가 가진 급진성이 부상한다. 아마도 영상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건 한국―세월호―이 아닌 제주인데, 정확히 4.3사건은 영상에 나오는 관동 대학살과 세월호 사건의 사이에 위치한다. 이 셋의 사건은 국가 권력의 폭력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마도 역사는 불가능한 왜상의 한 축으로, 또한 그 자신을 왜상의 주체로 매개하고 경유하면서 〈항해〉에 도착한다. 곧 그것은 한일의 교환의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세월호와 같이 우연한 것으로, 우연한 것으로서 역사로 채 자리매김하지 않고 〈항해〉에서 표류하며 휘발되는 듯 보인다. 이는 이전 작업의 (불)연속성으로서 이 작업을, 또는 이후의 작업에 대한 또 다른/동일한 방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사건이 국가 폭력과 피해자의 뚜렷한 지위로 수렴시키기에는 복잡하고도 난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역사의 자리에서나 온전히 위치 지어지지 않는 불순물의 자리를, 작품에서 유령적 존재의 자리―〈항해〉에는 예외적으로 마지막 연주자인 임지인을 제하면, 재일한국인과 일본인만이 출현한다.―로 대신한다.
그 전에 이 항해의 공식적인 결말이 아마도 한일 교류의 평화적 진작이라는 환원으로 오인되지 않으려면, 국가적 폭력의 주체를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민에게 가해진 부분과 한 국가의 내속된 국민에게 가해진 부분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 어딘가로의 항해는 목적지는 명시할 수 없더라도 누군가의 항해인지는 알 수 있어야 한다―앞선 ‘손’은 임흥순이 아니라, 텅 빈 주체 그 자체를 물화하는 것일까. 애도는 두 다른 역사를 총칭하면서 환원하고 봉합하는 기제로서 접근되는 듯 보인다. 역사를 현재로 불러오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로 수렴되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첨예한 정치적 지형의 결절점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탈정치적 몽상에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손의 여러 위상들
〈곁에 머문 부재(そばにある不在)〉, 2025, 아카이벌 피그번트 프린트, 21-138.4 × 30.5-138.4 cm (× 19점)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몽상하는 신체, 또는 몽상에 젖어 드는 신체로서 ‘임흥순의 손’, 곧 또 다른 작가의 손은 타카하시 켄타로의 〈곁에 머문 부재〉에서 반복되는데, 이는 대신에 역사의 증거로서 사진―“오키나와에 거주하며 알게 된 일본군 ‘위안부’ 첫 증언자”의 기록 혹은 그―과 그것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이 동시에 출현하는 사진이다. 이는 (역사의) 장면을 가로막으며, 그 역사에 가로막히는 (또는 그 역사에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 역사를 가로막으려 하는) 주체의 증상으로서가 아니라, 역사를 목격하는 자의 (그 사진을 붙들어야 하는 실제적 차원으로 증명되는) 의지를, 역사와의 간극이 아니라, 역사와 현재의 공존을 드러낸다.
반면, 이 손은 작가가 아닌 타자의 것 자체로 전시에서 또한 드러나는데, 다름 아닌 문상훈의 〈손〉이 그것으로, 이는 레즈비언 커플들이 서로를 모델로 또 사진사로 나뉘어 결속하는, 대리 위임된 퍼포먼스-사진 기록으로, 작가는 큰 틀에서 개념을 설계하는 데 그친다. 이는 역사 속에서 타자성을 찾아내고 정의하려기보다 타자성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망각되며 다시) 드러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이 손은 다시 권은비의 〈공동세계〉에서 ‘더’ 명확한 우로보로스의 매듭으로서 맞잡은 손들의 도상으로 이행되는데, 이는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에서의 타자를 호출하고 환대하는 몸짓을 손의 이행과 연장의 차원에서 ‘직조’로써 이념화하는 것 안에서 타자의 내재적 차원이 아니라, 타자와 주체의 연대 차원에서 정치를 모색하는 공동체의 자리로 확장하는 상징 기호로서 나타난다.
역사를 재서사화 혹은 탈서사화하기
윤지원, 〈무제 (현대❘사진)〉, 202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서울시립미술관 제작 지원. 역사의 무거운 대상/주제를 다루는 〈항해〉에는 그로부터 작아지는/형해화되는 주체의 모습이 증상적으로 출현한다면, 곧 임흥순의 ‘손’ 혹은 누군가의 손이 ‘다른 강에 스며드는 증상적 주체’의 모습으로서 그 작품의 알레고리적 결정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윤지원 작가의 작업들은 대체로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의 자유로운/가벼운 속성에 기대어 있는데, 이는 산만하게 그보다 헐겁게 존재들의 흔적을 기워 내기 위해 분투하는―거꾸로 역사의 흔적들을 하나의 서사로 통합하기 위해 헐거워지는―, 임흥순의 작업의 인터뷰라는 형식 대신에, 위임된 이의 내레이션을 통해 변화해 가는 화자의 차원 안에 바깥을 매끄럽게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두 편의 ‘무제’라는 작업이 가령 〈무제 (강원도 여행)〉에서와 같이, 주제를 명시하고 그 제목을 다시 괄호 안에 가두며 겨우 부재가 되는 건, 부재인 척하는 건 이 주체의 (매개하며 사라지는) 자리가 될 것이다. 기행의 형식을 취하는 이 작업은 그 기행의 주체가 가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의 자리를 (〈항해〉에서처럼 실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피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내가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에 떠난다’는 몽테뉴의 어록을 통해 간단히 명시한다.
강원도 여러 곳을 무턱대고 항해하는 이 기행―임흥순의 작업에서는 비극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는―은 역사의 다양한 흔적을 들여다보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AI에게 이미지화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주체에 의해 역사가 재맥락화되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그것을 간신히 지탱하던 주체의 의식의 흐름 너머를 기술에게 간단하게 이양하려는 듯 보이는데, 이는 물론 도피의 마지막 행보라기보다 그 의식의 자유 연상 기법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의 가시화에 대한 불가능성이 도래할 미래에서 여전히 영속됨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AI가 어떻게 새로운 주체의 얼룩을 잠재하는지를 가늠하는 차원으로 나아간 호 루이 안의 작업(출처= https://www.artscene.co.kr/1713)과 비교하면, 이는 여전히 AI의 현재성을 클리셰의 차원으로 답습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유머를 위한 기능적 전유이겠다.
한때 북한의 땅이었던 이승만별장―작가는 이를 새로 지은 이승만대통령 화진포기념관에 들른다.―과 같이 언캐니한 역사의 흔적이 뒤늦게 도착하고, 원주의 1000년 넘은 기간 추산된 은행나무로부터 역사를 뒤엎는 서사가 솟아나는 구멍을 추상해 내며 역사와 서사를, 역사라는 (아이러니로서) 실재와 서사(라는 상상력)의 힘 사이를 오간다. 핍진한/해상도 높은 재현도를 높여 온 영화의 궤적에서 영화 〈Battle Zone〉(1953)의 이미지로부터 거기에 출연한, 안중근 아들이자 영화배우로서, 한국을 재현하는 영화에서 한국인을 표상하던 필립 안이 이북 억양으로 인해 한국에서 배우 활동을 포기한 일화는 그 전자의 대표적 사례로, 이는 남북 분단의 왜상을 이미지적으로 재표상해 낸다.
작가는 마지막에 ‘다른 강’의 정체를 밝힌다, 물론 ‘일임된’ 화자를 경유해서. ‘홀리듯 촬영‘하게 된, 화진포의 ‘폐허가 된 아파트‘의 한 틈새로부터 ‘“미래”라는 두 글자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과거의 잔해 이전에 이미 선취된 이 아파트의 표제는 (동시에 단순히 AI의 시대가 여는 희망찬 미래가 아닌 그보다) 뒤늦게 폐허로서의 미래를 예기하며, 일시적인 존재의 유령성을 구성한다. 역사를 보는 시점으로서 서사의 창안과 창안되었던 서사의 작동 기제라는 두 차원으로부터, 미래의 서사가 어떻게 누락된 과거로서 현실에 재기입되는지의 증거가 당도했을 때 서사는 곧 현실 자체이다.
강들은 제각각의 경로들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는 여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방대한 아카이브와 그로부터 자유로운 연관성을 맺으며 작품들이 출현한다. 그 사회학적 시간과 연대기가 각각의 다른 강‘들’이므로, ‘강’은 사실 그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는 바다에 더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사회학적 지층보다 그것들을 대면하는 작품의 태도와 관점, 아카이브의 시각화의 방식 자체이다. 어쩌면 더 필요한 건 이합집산의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공명하는 어떤 토대를 찾아 들어가는 지점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중요한데, 그 우리는 대상만을 겨우 확인하는, 곧 ‘스며들어’ 가는, 그 스밈에 경도된 단계이다.
따라서 전시를 하나의 차원으로 조망하기는 쉽지 않으며2, 개별 아카이브 및 작업 들을 잇고 꾀는 것 역시 어렵다. 오히려 그것들을 분화시키며 쪼개는 방식이 더 유효하고 적합하다. 그것들은 전시를 초과하지만 그것이 향하는 역사의 진실들 역시 우리를 초과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시(들)의 차원보다는 보통명사로서 역사를 대하는 몇 개의 태도들로써 작품들을 짚어보고자 했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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