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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진, 《해금을 켜는 사슴》: 과도기적인 작업 혹은 시간성
    REVIEW/Visual arts 2025. 11. 2. 23:30


    조영진 작가의 《해금을 켜는 사슴》은 반구대 암각화의 모티브를 가져오되 이를 동학의 이념들을 산출하는 방법론적 양식으로써 활용하는데, 투박하고 명확한 선분들로 새겨진 기호들의 배치, 생명의 묘사와 압축의 표현 방식을 보이는 암각화의 형식은, 오목하고 볼록한 평평하지만은 않은 동시에 결과 살, 선분을 지닌 비정형적 평면으로서 석벽이라는 지지체라는 특징에 조응하고 결부되며 지지되는데, 곧 내용적 유비, 곧 형상을 싸고 있는 이 배경의 특질을 그 형상과 함께 어떻게 회화적으로 처리하느냐가 실은 까다로운 부분이 되며, 조영진의 추상회화가 본질적으로 형상에 대한 독해, 재현의 차원에 수렴되지 않고 그 매체의 독자적인, 독립적인 분기를 이룰 수 있느냐의 분기가 된다. 

    대부분의 작업들에서 형상과 배경은 뚜렷하게 나뉘어 있고, 배경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그러나 실재적으로 암각화의 그것에 대응하는데, 그것이 읽을 수 있는 차원에서 또한 표현될 수 있는 차원에서 그 지지체를 상대해야 하는 부분을 사전 작업의 매듭으로 가져가야 하는바, 작업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완성의 기율을 만드는 작동의 방식 자체를 고려해야 함을, 그것이 드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암각화의 배경이 시간의 우연적 결정을, 비인간적 차원의 형식을 따른다라는 점에 유념해 암각화라는 형식을 고스란히 빌려올 때, 배경은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상에 대한 지지체로서 순수 형식적인 차원에서 가늠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물론 딜레마는 이것이 암각화, 암각화의 재현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며,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회화이며, 또 회화여야 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배경의 무의미함은 그리고 형상의 그로부터의 자유로움은 모두 오로지 합목적적으로 회화 안에서 해소, 완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무의미함과 자유로움은 모두 그 반대의 차원에서 획득되어야 한다. 

    결국 이는 하나의 평평한 평면으로 복귀되는 과정이므로, 관객의 입장에서 그 표면은, 배경은 형상의 독해 이전이 아닌, 형상의 독해와 함께 또는 오히려 그 이후에 그와 조응된 차원에서 부상하며, 여기서 형상과 배경의 본래적 분절은 실은 조화는, 암각화, 곧 석벽 더하기 기호라는 그 둘의 간극에 대한 매끄러움이라는 재현의 범주 차원으로 소급되기보다 매끄럽지 않음의 차원에서 다시 강조되는 부분이다. 곧 이러한 작업은 암각화의 이전과 맞물리며 석벽에 대한 첫 번째 대응으로서 선사 시대 사람들의 관점을 투사해 내는 작가의 회화에 대한 실험, 그 굴절된 실험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시도로 연장된다. 

    전시명과 동명의 작업 〈해금을 켜는 사슴〉에서 시작하면, 사슴은 투박하고 대담한 몸체로 배경으로 뒤섞이며, 그 위에 마구 (사슴의) 눈들이 씌는데, 그리하여 뒤덮여 있는 바로 형상으로 인지되지 않는 어렴풋하고 투박한 커다란 형상으로서의 몸체에 가변적인 기호들로서 눈이라는 대응은, 그 중심에 놓인 해금의 뚜렷한 형상의 부상 아래, 색상적으로, 순서적으로 더 희미한 것으로 눌리게 된다. 

    나아가 눈은 신체의 이탈 자체로서 독립된 기호로 산출되는데, 해금이라는 가장 재현적인 시각 기호의 상단에 위치하며 해금에 부속되면서, 그 범위 아래에서 자유롭게 촉각적이고 청각적인 시간의 과정적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눈은 위치상 손을 대체할 수는 없는데, 따라서 연주는 시각적 응시로서, 듣는 것은 보는 것의 증폭됨을 수반하게 된다. 

    여기서 암각화의 첫 번째 특징, ‘투박한 기호로서의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눈은 결정적으로 신비한 존재 혹은 신비한 효과에 대한 결정적 표현이 되며, 무엇보다 그것이 어느 정도 해금이라는 악기에 대한 제목의 재현성을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눌려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는데―기호와 표층의 회화상에서의 대립을, 뚜렷한 분기를 해소시킬 수 있는데, 여기서 때마침 부상하는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곧 하단의 배경색이 눈의 흐릿해지는 색상의 표현으로 연장됨으로써(이는 그 눈과 비슷한 혹은 더 늦을 수 있는 시기에 그려졌다.) 암각화의 표층의 무의미함은 회화적으로 납득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눈들의 경계와 사슴의 형체, 아래의 상당 분량의 배경색은 사실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얼굴’로 특정해 보고자 하며, 이는 다른 몇 개의 초상 작업이 갖는 추상성의 도해로서 실험을 극대화한 부분에서 거꾸로 그렇게 인지 (불)가능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곧 캔버스 위의 커다란 네모난 덩어리의 유착됨으로서 조영진의 배경적 형상의 특징을 추출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정되는 얼굴은 오히려 하나의 덩어리로서 전체라는 점에서, 그 전체가 배경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그 안에서 순수 형상의 전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그 덩그러니 놓인 평면을 눈코입의 분별을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곧 나머지 공간의 덜어낸 공간 차원으로 두는 대신에, 오히려 눈코입이라는 위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는 분기를 형성한다. 이제 눈코입은 ‘그중에’ 어떤 부분도 어쩌면 될 수 있고, 더 정확히는 어떤 부분들을 비켜나며 ‘다시’ 선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얼굴은 다시 얼굴이라는 지칭이 수여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추상성을 띤 하나의 덩어리, 무언가의 형상들이 조합되는 공간의 도해에 더 가까운데, 가령 〈이수인의 초상〉(2024. 캔버스에 유채, 117×91cm.)이나 〈해월의 초상〉(2024. 캔버스에 유채, 53×45cm.)에서 그것의 식별 불가능성, 형상으로서 역치를 넘어선 자유도의 실현은, 암각화의 형식이 역사의 특정 인물을 직접적으로 통과하기보다 그 인물이 역사를 통과해 내는 방식으로서 경유되고 있음에 해당하지 않을까. 

    곧 역사의 특정 이미지가 아닌, 역사라는 배경 안의 이미지로, 역사로부터가 아닌 역사에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결과는 아닐까. 이는 형상을 알 수 있는 해월과 형상을 실제 알기 어려운 발굴된 대안 역사에서의 이수인을 평평한 무엇으로써 평평한 차원에서 다루며 병치시킬 수 있는 방식이 된다. 결과적으로 얼굴은 상징 도해를 구성하는 특정되지 않은 기호들의 조합이 되며, 이는 순수 형상으로서 실험을 증폭하고 확장시킨다. 

    암각화의 두 번째 특징, 생명에 대한 표상, 생명에 대한 생명력 있는 서술의 측면은 동학이라는 이념을 침투하는데, 이는 거꾸로 시간의 너른 범주의 전개, 연결, 접속의 차원에서 동학이 특정한 시기로 조명됨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해금을 켜는 사슴〉은 압축된 생명성의 기호를 하나의 세계로 펼쳐낸 것으로, 그 너른 시간의 범주를 동학과 상관없이 또는 동학을 가로지르며 가리키는데,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선포한 제사법, 제사상을 조상이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손으로 전도시킨 〈향아설위〉(2024. 캔버스에 유채, 130×97cm.)에서 그 주체들은 오히려 암각화의 동물적 생명력으로 대체된다. 또는 동학의 이념은 암각화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는 환원된다. 

    하얀 선분으로 흐릿하게 제사상의 집기와 프레임을 하단에 덧대어 놓음은, ‘본디’ 있었던, 합산된 덩어리들 안에 머리와 상체 일부가 빠져나오는 까마귀의 형상을 온전히 처리, 포획하는 힘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은 듯 살아 있거나 거의 산 채로 잠자코 있을 뿐이다. 이는 중단의 새 두 마리, 태양의 기호, 그 위 상단의 솟구치는 고래 세 마리와 비교되는 어쩌면 제사상 안이 아니라 그 제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제사의 주체를 명기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제사는 생명의 약동을 기록하고, 그것을 마주하는 차원에서 기입된다. 

    투박한 기호의 유희와 생명 서술의 차원으로 연장되는, 중첩되는 순간은 〈현람애월민〉(2024. 캔버스에 유채, 117×91cm.)에서 드러나는데, 간략화된 상단의 하늘색 인간 형상들의 손 잡음은 단순한 기호의 차원에 대응하면서도 중단에서 하단 사이의 더 큰 인간 형상, 두 눈으로 분별되는 이 신체로부터 그의 축소된 버전으로서 기입됨으로써 그것이 지닌 장식의, 표층의 가벼움을 상쇄한다. 반면 노란색 애벌레 같은 기호들은 하단에서는 명확하고 그 이외에는 장식으로서 특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또한 중앙의 커다란 인간의 눈 주변으로 자연스레 합산되며 합목적적 경계를 이루며, 크게는 노란색과 하늘색으로 구성된 인간 형상으로부터 확장되는, 전체의 범주 아래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수왕무〉(2025. 캔버스에 유채, 91×75cm.)나 〈수왕희〉(2024. 캔버스에 유채, 91×75cm.)의 경우, 배경은 단순화돼서 배경으로만 정착하는데, 그것과 조응하는, 그것에 대응하는 드로잉으로 처리한 기호들 역시 희미하거나 간략-명확하다. 석벽이라는 지지체는 〈수왕희〉의 경우, 거의 고분에 가까워지며―고분을 단일한 색상으로 재현하는 듯 보이며―, 배경의 형상에 대한 응전이라는 작가의 방식은 기호들을 중앙 쪽에 또는 배경을 잠식하기 전에 고정함으로써 오히려 형상에 부여되는 특정 의미들의 발화 대신에 그 형상의 형식으로 수렴하는 경계적 차원을 엇대어 보는 차원에서 유희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수왕희〉의 비교적 평행선상에 놓이는 눈들의 기호적 탐침의 지배적 효과는 사슴과 고래가 접촉하는 중심 옆으로 좌우로 각각 커다란 하나의 눈과 하나의 얼굴 위의 눈은 인간 존재의 부차적이고 연대기적으로 뒤늦은 차원의 개입과 함께 추상적 의미를 불러오는데, 이는 고대의 세계관과 역사의 특정한 이념의 접합이라는 차원에서의 전시의 출발점에 있어, 고대와 역사의 그 틈새를 메우기보다 오히려 그 이음매를 드러내는 차원이다. 

    〈해금을 켜는 사슴〉은, 곧 그것이 전시로 표상됨으로써, 이 두 시간대의 봉합이 아닌 종합의 차원에서, 신화적 세계관, 동물과의 영적 교류가 가능했으리라는 믿음의 시간대를 앞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종의 대명사로서 음악의 효과가 잠재됨을, 그것이 고대-역사-동시대의 3항을 연결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는 듯 보인다. 

    역사의 인물들은 차라리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접속 가능해 보인다. 〈수왕희〉의 상대적으로 떨어진 오른쪽 끝 얼굴의 구체성은, 곧 간략화되며 힘을 얻는 암각화의 기호에 비해 추상적이며 감정적인 차원에서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 얼굴은 〈세 엄마〉(2019. 캔버스에 유채, 72×61cm.)의 경우에서처럼 확대되어 온전하게 화폭을 잠식하게 될 때, 곧 그 두 다른 기호를 (스리슬쩍) 병치하는 대신에 단일화했을 때, 회화는 갑자기 이질적인 것―그것이 너무 단순하며 구도의 차원을 부러 어긋나게 한다는 점에서―으로 다가온다.

    오른쪽에 생긴 방의 입체적 공간성과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얼굴의 평면성의 대비가, 곧 그 조화롭지 않은 배치가 결과적으로 뒤틀린 시간―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시간―의 차원에서 결정적으로 그 얼굴이 부상된다는 인상을 주며, 나아가 그 불가해한 얼굴에 대한 절대적 해석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해석의 절대적 우위는 이 회화 자체의 불안정성, 더 정확히는 불완전함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공간은 이 거대한 얼굴로 인해 쪼그라들며, 일부분으로 기각되기까지 한다. 반면 얼굴의 평면성이 갖는 차원의 몰입은 이 입체적 공간으로 인해 심각하게 방해받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석벽에서 완전히 어긋난다―그 석벽이라는 지지체의 실험의 이행으로서 자리하지 않으며, 이질적인 느낌은 여기에서도 비롯된다. 

    언캐니한 도상 또는 왜상적 흔적으로 발현되는 그 인물은 사실 들뢰즈적 도식에 따른 냉정한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정전적 재현 혹은 반복으로, 동시대의 부재, 또는 그 동시대성이 미끄러지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곧 상징적 차원의 내용적 거리는 그 이미지와 동시대의 거리, 나아가 작가와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물의 무의식적 경유가 아닌, 그 인물과의 도달할 수 없는 심리적 거리를 명시하거나 그로부터 움츠러드는 작가의 무의식에 대한 메타-언급이 아닐까.

    암각화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표층의 기호학이며 그 기호들은 강력한 상징성을 산출하는 한편, 형상은 그 ‘배경’으로부터 추출된다. 여기에 색이 개입한다면이라는 변수적 상상력은 작가에게 내재적 과제로 인계될 수 있는, 인계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회화의 색-마티에르의 배치, 쌓아 올림, 구성을 실험하는 그의 (추상회화의 실험으로서) 기존의 토대이자 그것을 이미지와 이념,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역사의 간격을 새롭게 조율하는 미지의 그리고 미완의 시도가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해금을 켜는 사슴》은, 그리고 그 ‘해금을 켜는 사슴’이라는 제목(의 우선함)은, 그리고 그로 묶이지 않는 다른 여러 시도와 현격한 차이―봉합되지 않는 차이―는 그의 회화처럼 ‘뭉뚱그려져’ 과도기적으로 또 앞당겨서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결과적으로, 이 뭉뚱그림의 비구조적 구조, 비질서적 질서야말로 그의 회화가 가진 특색이자 어떤 미덕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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