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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판야무, 〈누수〉: 세계를 메우고 매듭짓는 존재의 기약 없는 몸짓들
    REVIEW/Dance 2025. 11. 4. 22:18


    춤판야무, 〈누수〉ⓒ 김신중[사진 제공=춤판야무](이하 상동).

    ‘누수’는 물리적 현상으로, 어떤 구조의 손실, 구멍, 빠져나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그 구조의 와해라기보다 누수를 갖는 구조 자체로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누수〉는 이 누수를 나로부터 찾는데―“나에게서 새어나오는 것”―, 이것이 더 큰 세계의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것으로 외부와의 연결성을 추구한다―“이것은 어디로 흘러 무엇과 만나지는가.”. 여기서 ‘누수’는 심리적 차원의 메타포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면, 무엇보다 〈누수〉의 즉물적인 표현의 층위에 의거해 일차적인 의미로 그 단어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인다. 

    무대 곳곳에는 테이프가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려 있다. 그 중앙부로 온 남자(금배섭, 등장인물들은 크레디트상에서는 모두 “누수공”으로 기재된다.)은 위아래로 시선을 규칙적으로 오가는데, 시선이 아래를 향할 때는 종이컵 뭉치의 바닥 모서리를 바닥에 찍는다. 이는 크게 이미지들과 소리로 이뤄진 세 개의 기호의 순환 계열을 만드는데, 아래로의 시선-종이컵 소리-위로의 시선이 그것이다. 곧 시선과 시선 사이에는 소리가 있고, 이는 자동 반사적으로 소리(의 “폭발”―작품 설명에는 여덟 개의 태그가 존재하고, 이는 “독립된 장면으로 나열된다.”―)에 반응하는 위로의 시선, 그 전의 소리를 향하는 아래로의 시선이라는 행위 몽타주의 계열을 만든다. 

    여기서 소리를 만드는 남자의 의지는 혹은 의지를 가진 남자의 존재는 단속적인 소리에 반응하는 자동인형 기계로 대체된다. 남자는 소리를 좇는 것일까. 그렇다면 남자가 위를 향할 때 소리의 근원지로부터 도리어 멀어지는데, 이는 소리의 근원을 오지각하거나 환상적으로 새롭게 매듭짓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아래를 향할 때 소리는 사물의 움직임보다 뒤늦게 출현한다는 점에서 남자의 시선은 모순적이다 또는 비논리적이다. 

    따라서 소리의 진원을 물리적 타격과 혼동하지 않아야 하며, 또는 주체의 의지에서 발현된 행위로 식별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남자의 행위는 단지 누수로써 새롭게 정초되는 세계를 목격하는 것, 세계의 누수를 감지하는 것임을 상상해야만 한다. 이 외부의 작용, 곧 천장에 소리의 진원이 있고(따라서 비가시적인 것인 무언가가 실제로 아래로 향하고), 아래로 그 물질적 차원의 효과로서 소리가 뒤늦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답은 종이컵이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물방울 소리를 환유하는 것이라는 것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 몽타주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부터 그 천장의 구멍과 바닥에 고여가는 물을 확인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수〉는 진짜 누수에 대한 물리적 표현이다. 그에 대한 근접한 몸짓이다. 물방울로부터 파생된 세계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다. (이는 금배섭의 춤이 오브제-세계와 연결되는 행위의 산물이며, 그 논리 자체임의 특질이라는 것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누수의 세계를 몸짓으로 반복해서 구조화하는 인트로는 지속의 시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다름 아닌 누수를 각인시키기 위해, 곧 누수의 효과를 상상하기 위해 또는 누수(에 대한 인지)가 몸짓으로 충분히 이행되기 위해. 그리고 이는 물리적 시간이 형성하는 물리적 지층에 대한 환상을 조각한다. 

    고갯짓을 같이하던 양옆의 두 남자 중 한 남자(이재윤)는 종이컵을 받아서 일어나며, 일어선 채로 종이컵 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치고 위를 보고 다시 돌아오는 동작을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번에는 받으면서 보는 것이다. 종이컵은 다시 남자의 입으로 향하고, 그 안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입에 끼운 종이컵째로 움직인다. 종이컵 하나를 입으로 받아든 다음 남자(조정흠)와 함께 삼각 구도로 몸짓은 확장, 파생된다. 종이컵이 빠져나간다는 것,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또 다른 누수의 관념과 연결 관계가 형성된다. 

    이제 누수를 잡는 몸짓들의 궤적이 곳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곳곳의 누수를 향하는 몸짓은 곳곳의 누수가 발생하는 현상이 체현되는 바다. 그리고 셋의 두 손에 들리며 위로 옆으로 이동하는 종이컵들은 물을 받고 비우고 다시 끼우는 과정에서, 하나의 탈착 가능한 오브제로 사용된다. 서로는 합산되고 흩어지고 그리하여 큰 틀에서 연결 가능성의 차원으로 존재한다. 종이컵은 나와 누수의 만남을 매개하고, 나와 너를 누수 작용으로써 연결한다. 

    처음, 전이로서 그 자체로 누수를 가리키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종이컵이 빠져나가는 순간은 소리 쌓기의 몽타주와 같이 강렬한 하나의 지각적 장면으로 인지되지만, 그 이후 하나의 행위 법칙으로 적용되면서부터는 “종유석”들이 맺힌 거대한 환경을 상상하게 하는 가속의 차원에서 예기치 않게, 긴박하게, 단속적으로 출현한다. 이제 또 다른 장면이 삽입되는데, 이는 면으로 연결된 관계를 다룬다. 

    곧 종이의 가를 두 손으로 잡고 마주한 남녀(이재윤, 윤혜진)는 종종대는 발디딤과 함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종이의 평평함을 전제로 한 펄럭거림을 만들어 낸다. 이는 인접한 거리를 소리와 가시적 떨림의 확장으로 확장시킨 “탱고”로, 여기서 그 거리가 필요함은 종이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 안에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속적으로 삐 하는 멜로디언 같은 악기의 소리가 나가는 순간이 오버랩되는데, 이는 물론 누수에 대한 환유적 차원의 소리이다. 종이는 바닥에 깔리며 춤이 벌어지는 장소를 현상하기도 하는데, 이때 ‘종이 카펫’에 선 여자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좁은 반경 안에서 멈칫대는데, 이는 자신의 분리된 단독 장면을 슬로우로 증폭시켜 부각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금배섭은 숟가락을 붙이며 등장하는데, 그 틈에 다시 등장한 남녀는 종이를 앞에 펼쳐둔 채 각각의 “코끼리”가 되는데, 남자는 상의 긴 팔 부위를 몸에서 빼는 것으로, 여자는 자신의 긴 치마를 수그리며 앞으로 젖히고 두 손으로 걸어나가는 것으로, 그 형상에 근접한다. 이어 종이를 무대 사선으로 길게 늘어뜨려 펴며 잡아당기다 종이는 결국 찢어지는데, 남자가 남은 종이를 구겨 나간다면, 여자는 종이를 말아 나간다. 이어 또 다른 중심 오브제가 등장하는데, 바로 부채이다.

    두 남자가 정좌한 무대 안쪽에서 양쪽 가로부터 붙여 나간 비닐을 들어 올리고 거기에 부채로 바람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그것은 “방울산”으로 증폭한다. 두 남자 사이에 여자가 서서 부채질을 하며 종을 울리는데 이는 후반부의 뒤늦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소리의 “파동”이 산으로 체현된다―사이이자 그 횡으로 위치한 여자와 남자의 합성은 “피에타”로 볼 수 있을까. 남자들의 부채질이 이 거대한 비닐의 파형 작용을 일으키는 차원의 기능적인 부분이라면, 여자의 부채질은 종의 울림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에 부속되며, 그 바람은 자신의 실루엣을 비닐의 경계로 옮기는 순간의 반대 방향에서 그 실루엣을 희미하게 하는 작용, 곧 그 비닐 ‘안‘의 차원에 그녀를 위치시키는 차원으로 특정된다. 

    여자의 재등장 전까지 두 남자는 하나의 존재로 갈음(되어 오지각)된다. 마치 비닐 안 조명으로부터 자신 너머 형성된 그림자를 마주한 한 남자의 좌선이 동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환상을 형성한다. 그것이 두 존재로 구분되며 하나의 평평한 세계에 이르게 되는 건 첫 번째는 앞을 분간할 수 없게 했던 조명의 낮아짐, 그리고 두 번째로 여자의 물리적 개입에 따른다. 나의 잔여로서 뒤의 환각, 또는 그 반대의 차원에서 잔여로서 앞의 환각, 그 중첩과 경계의 차원에서 하나의 신체를 오가던 것이, 곧 바닷속과 같은 미지의 공간 안의 신비로움으로 응결되는 상황―스펙터클 안의 존재―이 조명의 변화에 따라 실체로 분별되며 분리되고, 방울의 울림과 함께 ‘셋’의 현실적 지형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물리 작용의 순수 몸짓―스펙터클을 만드는 셋의 분주한 작용―으로 ‘비닐’ 안의 사투로 완전히 변환되는 것이다. 

    이제 앞선 숟가락 붙이기가 확장돼 나타나는데, 모두가 투명 테이프-종유석에 흰색 플라스틱 숟가락을, 그리고 땀 닦아낸 휴지를 다음 오브제로 붙여 나간다―이는 종유석에 붙은 “벌레”인가. 벌레는 사실 웅크린 몸에 더해지는 발사체로서 부채로부터 가시화된다. 두 무릎을 올리고 앉은 자세에서 가랑이 사이로 들어갔다 나오는 부채와 그 펼쳐짐과 접힘, 그 사이에 부침이 신체적 변형, 다른 생명체의 움직임을 가정하는데, 이른바 유동하고 확장하는 기관을 가진 다름 아닌 “벌레”의 형상인 것이다. 

    테이프들을 중앙으로 모은 후, 거기에 깡통을 하나씩 가져온 이들은 그것을 엎고 위로 들린 바닥 면을 한 대 때리고 들어 올리면 얇은 종이 자투리들이 쏟아지는 반복된 절차를 한 명씩 수행한다. 이는 부채로 부쳐 흡사 벚나무의 요란한 “파동”의 스펙터클을 만들기 위해서다. 순식간에 종이들이 부상하며 세계를 뒤덮는다. 다시 비닐을 나무에 두르고 계속 꼬아서 그 안의 테이프들이 칭칭 감겨 동여매진 채 일제히 바닥을 향하게 만든다. 곧 허공에서, 나무의 덜렁거리는 뿌리의 형상을 매듭짓는다. 그리고 뒤편으로들 사라지는데, 여기서 기타의 배경 아래, 일시 정지된 세계는 위로 솟구쳤던 종이가 하나씩 떨어지는 시간의 표현을 감지하게 하기 위함처럼 보인다. 

    다시 그 앞에 양옆으로 비닐로 울타리를 치고 나서야 공연이 끝나는데, 이는 비닐을 갖고 나오는 누수공들의 탱고이기도 했던 몸짓들, 그리고 무대 안쪽의 바닥에 비닐을 붙였던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구조적인 일상의 체계가 다시 반복된다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이는 아마도 허공에서 흘러내리는 누수의 구멍들을 하나로 엮어 처리하고, 그 앞에 지나다닐 수 없는 경계 막을 형성한다는 물리적 차원의 결말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곧 〈누수〉는 누수라는 즉물적 현상, 미시적인 차원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나간다. 그것은 춤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행위이다. 행위를 토대로 한 춤의 형식적 결정이다. 춤은 행위와 정합적이며, 춤은 행위의 규칙을 인계받는다. 그리하여 전체의 지형은 일종의 공작 놀이이기도 하고, 집념과 의지가 반영되어 쌓고 만드는 거대한 설치 구조물의 되어 감을 실천하며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춤의 실천, 행위-몸짓의 절합적 체계, 곧 세계를 구성하는 직조적 몸짓과 세계와 결부된 존재들의 질서 어린 표현은 의식의 바깥으로의 표현이 아니라, 표층적이고 또 일차원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질적이며 수행적이다. 그 시간은 철저하게 축적되는 시간이며 그렇게 세계와 존재의 정합적 관계, 필연적이고도 합목적적인 관계가 구성된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상상력과 관찰의 힘이 요청되며, 그리고 그 시간의 결정적 마디들에서 이따금 놀라움이 찾아든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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