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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전야제: 겨 터를 열다〉(2025): 리서치를 위한 대화, 혹은 대화를 위한 리서치REVIEW/Dance 2026. 1. 27. 21:25

조진호, 〈전야제: 겨 터를 열다〉[사진 제공=신촌문화발전소](이하 상동). (좌측부터) 조진호, 허윤경. 〈전야제: 겨 터를 열다〉(이하 〈전야제〉)는 겨드랑이와 관련한 여러 서사적 조각을 연결하는 조진호의 디에게시스적 경로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신체 특정 부위로서 겨드랑이와 상응되는 움직임의 탐색, 겨드랑이를 관계의 접합부로 활용하는 두 사람의 긴밀한 구조적 움직임의 실천이 경유된다. 처음 조진호는 무용에 입문해 레오타드를 하며 겨드랑이에 민감하게 된 자신의 원-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겨드랑이에 관한 애착 심리의 차원에서 자신의 무용사를 정리하는 것으로 연장하기보다는 밤 야(夜) 자의 상형문자 풀이를 통해 겨드랑이를 의식의 차원으로 고양해 내고자 한다.
제목에서처럼 겨드랑이를 하나의 터로서 확장된 의미의 공간으로 마련하면서 밤의 축제적 공간으로 그것을 재정립함에는, 갑골문에서 밤 야 자의 원래 형상이 팔을 벌린 거인이 겨드랑이 사이에 초승달을 끼워 넣고 있는 의미의 해석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조진호의 겨드랑이에 대한 태도는 수치나 부끄러움의 차원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전유하는 정치적 기호로서 마주하기보다는, 움직임의 동력으로, 구조에 대한 동기로서 대하며,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용에 내속하는 기호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섹슈얼함의 감각 자체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이는 페티시의 차원에서 겨드랑이가 물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겨드랑이를 의식하고 춤추기가 곧 겨드랑이를 드러내고 춤을 추는 것에 상응함으로써 초래하는, 몸의 열림에 기반한 총체적 신체로의 확장됨에서 겨드랑이가 하나의 비워짐의 공간으로, 움직임이 시작되고 결절되는 어떤 하나의 시작점으로서 부상하게 됨에 따라 조진호의 그러하다. 춤은 그 열린 통로를 따라가며, 그 모든 움직임을 배태하고 표출하는 어떤 잠재성을 갖는 신비한 구멍으로서 그것은 비가시적 차원에서 체현된다.
조진호와 상대를 이루는 허윤경의 도포 한 자락에는 앞선 밤 야가 그려져 있는데, 그는 후반에 가서야 발화의 주체가 되며, 그 전까지 그는 현실 바깥의 한 타자로서 서사의 변침을 끌어내는 데, 모티브를 제공하는 데 매개적 역할을 한다. 곧 그가 처음 길게 늘어뜨려 힘겹게 뱉어낸 말은 ‘달’로, 이는 겨드랑이와 달의 관계성이 그만큼 우연하고 자의적으로 드러난다는 차원에서 서사의 솔기와 그 서사적 동력의 투박함을 서사의 내속적 차원이 아니라, 불쑥 튀어나오는 신화적 모티브로써 ‘어렴풋하게’ 체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가 미스터리한 인물로 각인되는 것(이 일종의 맥거핀인 것)만큼 그것은 어떤 어설픔이자 미약한 서사의 전개를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는 다시 말하면, 허윤경의 매개자로서 역할이 그만큼 애매한 주체의 위치를 그려내기 위해 섬세하고도 까다로운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이 되는데, 처음 선글라스를 낀 채 혼자 유유하게 무대를 가의 직선 경로로 따라가면서 꾸물거리던 모습으로부터 그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무대를 장악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확정하는 조진호에게 어떤 새로운 차원의 입구를 열어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를 경청하고 따라붙는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식화되는 채널 바깥의 경로로써 그는 은근히 조진호에게, 공간에 배어드는 존재로서, 그가 서툴게 말 자체를 구사함은 그 경계의 침투에 이르는 조심스러운 타자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전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전야제〉가 실은 조진호의 일관되지 않은 렉처 퍼포먼스의 차원에서의 어설픔이 아니라, 그것이 전제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벗어나서 비일상적 차원에서의 정동을 끌어내기 위한 주체와 타자의 대화적 실천, 다성부적 공명에 의해 실천되고 있음에서 온전한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진호는 전 작 〈춤출 때 웃고 있지만〉(2024)에서와 같이 일종의 2인의 대화술을 전개한다. 반면, 이는 신화의 차원에서 또는 신화로의 환원에서 무언가 어떤 것들을 누락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겨드랑이는 춤의 테크닉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으며, 또한 개인 심리 차원에서도 크게 연장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허윤경이 축제에 깃든 어떤 신적 존재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후반 그 역시 평범한 현실의 주체로 소급된 후에는 슬픈 겨드랑이 증후군, 슬픈 젖꼭지 증후군을 나열하면서 림프샘과 연관된 신체 특정 부위로서 그것들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작동시키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 역시 여성의 특정적 정서로 확장되거나 심화된 담론을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이는 또 하나의 잔여로서 튀어나온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적 양상의 얽힘은 비가시적 서사의 핵심을 차지하는 데 반해, 그 둘의 진정한 대화의 결속이 가시적인 서사 차원에서 발생하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안쪽으로 머리를 향하며 누운 조진호가 든 두 발에 겨드랑이를 낀 채 정면을 보며 발화하는 허윤경은, 덜컹거리는 몸의 진동으로부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분하며 밤 야의 어원과 축제로서 의미를 비로소 설명하게 되는데, 이는 신화를 신화로 드러냄에 따라 그것이 함축돼 있던 캐릭터성의 비가시성 역시 가시화되는 과정의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것과도 같다. 곧 작위적인 분절은 덜그럭거림의 동일선상의 논리를 매만지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한 명의 지지체로서 몸과 그 바깥에서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데 기꺼이 몸을 맡긴 이의 결속으로, 거꾸로 후자의 맹목적 믿음으로부터 전자의 숭고한 희생과 끈기에 대한 의미가 구성된다.
겨드랑이로의 결속이, 기이한 신체의 끼워 맞춤이 하나의 빈 공간의 신묘한 장에서 나아가 어떤 연대의 힘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된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서사적 이념은 오히려 이 우정과 연대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데, 앞선 작품이 전제한 바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후 둘은 무대 안쪽 상부에 걸린 원형의 구멍이 뚫린 2겹의 얇은 천을 사선으로 끌고 오며 본격적인 축제의 막을 연다. 어쩌면 축제는 겨 터가 본격적으로 열린 가운데 무기력해지는데, 이 기원의 의미가 서사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전야제: 겨 터를 열다〉는 결국 겨드랑이에 대한 어떤 담론을 만드는 데 이르기보다는 조진호, 허윤경의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으로부터 마치 그 단편들이 우연하게 배열된 채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둘이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무엇보다 어떻게 겨드랑이에 대한 합의점과 흥미를 논하고 찾아냈는지, 그 과정에서 서로를 들여다보았는지를 언급하지 않는 것, 곧 겨드랑이라는 소재 자체에 대해서가 아닌, 그 둘의 시간을 상기시키는 성격으로서 단지 매개되는 겨드랑이, 곧 두 사람의 결속에 대한 매체적 특질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겨드랑이가 인용되지 않는 건 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어쩌면 겨드랑이라는 실체, 또는 그 실체 없음, 그것과 연루되면서 그것으로 되돌아오는 리서치 차원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곧 리서치의 일환으로 선보이는 작업의 함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곧 명백하게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강박, 또는 그 안에서 찾게 된 다른 것들을 그로 인해 보지 못하게 되는 결락. 조진호의 안무 방식은 어떤 우정, 연대에서 오는 건 아닐까. 따라서 매체로서 상대방에 대한 탐색과 연구, 대화의 기술과 그로부터 산출된 잔여의 언어들, 그리고 대화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디에게시스의 요소 등이 작업의 내용과 주제와 소재와 상관없이 자체적인 형식으로 전제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지점에서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은 그 대화의 차원에서 어떤 가능성의 차원이 짚어졌던 것 같은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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