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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민 호크미, 〈쉬라즈 Shiraz〉(2025): 의례가 구성하는 개인으로서 해방
    REVIEW/Dance 2026. 1. 27. 21:51

    아르민 호크미 안무, 〈쉬라즈〉[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아르민 호크미의 〈쉬라즈〉는 하나의 포즈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점차 변화되기도 하지만, 거의 일괄적으로 적용된다. 오른손을 얼굴께까지 올린 이 포즈는 오른발을 살포시 내밀고 왼발을 두 번 정도 더 재게 따라잡는 더딘 이동 안에 있다. 이는 신체의 전면적인 드러남이자 약간의 회피이며, 후자의 내면 공간 안에 침잠한 이들의 전체로서 후자에 고스란히 대응하는 표면에 대한 강한 인력을 낳는다. 이 포즈는, 신체는 직접적인 해석을 유예하고 인류학적 관찰의 시선으로 전이되거나 의례 혹은 명상 차원에 조응하는 감각의 전환을 요청한다―바로 전자에서 표층의 해부학적 기술이 가능하며 또 필요해진다. 

    ‘쉬라즈’라는 축제가 열리던 동명의 도시 공간에 대해 상기함이 감은 눈의 그들의 내면을 잠식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축제의 체현 장소로서 그들의 신체가 체현되는 것에 가깝다. 이들의 포즈를 더 자세히, 거의 나의 신체가 될 정도로 지각할 수 있고 기술할 수 있게 되는 건 거의 무한한 지속의 순간에 〈쉬라즈〉의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성적 관찰과 무의식적 도취 사이에 관객을 몰아넣는다. 무의식에 대한 관찰과 무의식 위의 관찰이 뒤섞인다. 꿈의 제스처는 분명한 현실 안에서 구성된다. 

    그 현실은 재현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므로 순수한 장소의 이름인가. 공연은 장소의 환상성만을 투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이를 채우는 존재들은 직접적인 관계로 연장되지 않으므로, 개체의 분포가 지닌 일정한 규칙 안에서만 자유롭게 공존하므로, 이들의 공통된 성취로서 포즈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형상을 드러내기보다는 공동체의 경계를 구획하는 데 그친다고 할 수 있다. 의례는 이들의 원자적 자리 보존과 바꿈의 공간 산출에 대한 너른 규칙이며, 따라서 그것은 공간의 경계를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의례에의 열중은 더 너른 범주의 이동에 대한 자유, 제한된 권역 내의 권리로부터 오며, 이는 순전한 잠재성의 영토로 보이는 원자적 회귀, 개체적 환원이 공통된 의례, 더 직접적으로는 동일한 움직임의 법칙으로 상승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이자 근거이다. 곧 동일성과 개체성을 연결 짓는 건 후자에의 순수한 몰입이라기보다는 전자에 대한 몰입, 전자 자체에 대한 엄격한 몰입이다. 이들이 드러내는 대신에, 단지 드러날 뿐이라는 건 그들의 몰입에 대한 좌표를 지정할 수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그들 내부로의 수렴이 공동체 내부의 비의와 규칙이 양면으로서 이뤄진 하나의 장소를 지정하는 건 분명하다. 

    일정한 공동의 물결에 대한 장소 안에 내부의 수렴점이 있다. 우리는 이 안에서 개인을, 유동하는 원소를, 고유성의 입자를 추출해 낼 수 있다. 얼굴께로 올라간 손은 일정 부분 감은 눈으로 인해 그 손을 본다라는 감각과는 다르지만, 그것이 감지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손에 붙들려 있는 신체는 신체가 붙들고 있는 손에 대한 양의 피드백이다. 손에 이끌려 가는 신체는 그렇게 손이라는 부분 대상의 독립적 힘을 순수한 시작점으로 인지한다. 따라서 이것이 깨어지는 순간, 곧 손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찰나의 순간, 그것은 ‘매끈하게’ 감각되지 않는데, 그것은 어떤 경로로서가 아니라 잘려나갔다 다시 붙는 것 같은 감각에 가깝다. 

    당연하지만 공통의 근거에서 추출되는 건 그 차이이다. 누군가는 그 손을 보고 있지만 눈을 감은 형국이고, 누군가는 그 손을 보지 않고 허공 위에 두는 데 가깝다. 누군가는 그 손안으로 숨어들어 간다면, 누군가는 그 손을 마주한 신체 전반을 바깥에 투사한다. 누군가의 태도와 표정, 몸짓의 특이성이 그 스스로에게 귀결됨을 부러 절감할 필요는 없다는 지점은 곧 이들이 각기 다른 체구와 신장, 성별을 갖는 지점과 만난다. 동시에 그 고유성의 기호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잠재성의 범위가 매우 제약된 형식 안에서 미묘하고 모호한 차원으로 연장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는 의례의 수행적 현장, 집단적 의례의 광경을 그렇게 관찰한다. 국소 부위에 도취되고 침잠되면서 그것이 그들만의 영토이며, 붙잡을 수 없는 시간으로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갈마드는 그 자체의 경로로서 감각한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매질을 체현하며 기억의 무덤을 성립시킨다. 오로지 현재라는 무게를 유예함으로써만 그 죽은 듯한 과거는 마치 보존된다. 시간은 영원한 순간으로 결정화된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의 유머와도 같은데, 이들의 동작은 무대를 빙자한 연습이며, 연습을 부정하는 실재의 바느질이기 때문이다. 
    의례를 적확하게 수행하기는, 곧 의례를 재현하는 건 의례가 주는 효과, 충만함을 안긴다. 이를 반복하면, 의례를 적확하게 수행함으로써만, 곧 의례를 벗어나지 않음으로써만, 그 의례의 형식에 충실함으로써만 의례는 의미를 부산물로 안긴다. 

    내면이 형식의 기입임을―예술가와의 대화를 참조하면, 무용수들은 그들이 움직이며 전체의/하나의 안무의 단위로서 동작들을 정확하게 셈하고 있다.―, 그리고 충만한 외양의 텅 빈 부산물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례의 본질을 바라다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곧 어떤 기호와 해석 작용 너머 이전에 도달하는 몸짓들의 기움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으로만 이뤄진다. 그것은 스스로의 도취 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동시에 그것은 감은 눈이 차폐된 시스템의 구조를 만들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의례의 안팎으로의 수행, 안으로의 수렴이 바깥과 정확히 공명하는 지점이 실은 체현된 바깥의 이면임을 인지하는 것과 더불어, 그 내부로의 침잠이 개개인의 서사 양식을 구성하기보다 동일한 집단 안의 이면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손은 무언가의 표지나 몸의 준거로 작동하면서 안의 오목한 공간을 만든다. 반면, 감은 눈과 안으로 들어가기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몸과 분리되어 있지만, 뚜렷하게 응시됨을 기피하는 주체의 굴절된 상태로 전이되면서 그러하다. 환상이 덧입혀지는 건 손이 아니라 그 나머지 영역이다.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 그 같은 기율에 대한 의존과 충실함이다. 이는 대타자의 응시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편이 아닐까. 대타자의 응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것을 곁에 두고 그것을 보지 않는 것, 잊는 것이다. 마치 해야 할 일을 적어두고 나서야 우리가 다른 여유를 즐기게 되는 것과 같이, 이는 관객에 대한 일차적인 방어막일 수 있지만, 대타자와 나를, 대타자와 나의 관계를 현상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도 수치심을 유예하는 한편, 대타자에 대한 신뢰를 외부로 산출할 수 있다. 우리는 손의 안팎에서 그렇게 서로를 마주한다, 더 정확히는 슬며시 감각한다. 그들의 몸짓은 규칙과 규제 사이에, 억압과 충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규칙으로 억압을 충동으로 바꾼 결과와도 같다. 그렇게 〈쉬라즈〉는 자유와 침잠의 내면 공간이 모순과 역설의 공간에서 배태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의 형식이 의례로서 형식의 엄밀함을 보여준다면, 하나의 의례는 내면의 기율 공간이 지닌 차이를 고유성의 발현으로 수렴하는 대신, 규칙이 성립하는 근거가 곧 신체의 다양성의 지표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쉬라즈〉의 엄격함과 자유로움, 한없는 부드러움과 단단한 중심축, 영원함으로 향하는 쾌락과 규칙적 강제가 지닌 오직 그 순간들 간의 대립 쌍에 대한 하나의 주요한 단서가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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