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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용단의 《안무가 랩: 듀오》 ‘둘’이라는 실험적 요소 혹은 관계의 확장REVIEW/Dance 2026. 1. 31. 21:54

서울시무용단, 《안무가 랩: 듀오》 포스터. 서울시무용단의 《안무가 랩: 듀오》는 서울시무용단 내에서 짝을 이룬 듀오 다섯 팀의 공연을 묶어 보여준 것으로, 이는 2인무라는 긴밀한 협업과 지지에 기반한 창작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내부의 창작 역량을 고취하고자 한 프로젝트로,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은 소규모의 공연들이 펼쳐졌다. 둘의 관계 지향적 이행은 필연적으로 서사로 연장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대부분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이 출현했다. 그리고 이를 내용과 메시지로 가져갈 것인가 순수한 움직임의 차원에서 구현할 것인가가 작품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오정윤과 박희주의 〈니나〉(안무 오정윤)는 붉은 빛으로 채워진 좁은 네모 프레임 안에서 그에 맞추어 낮은 자세로 바닥에 밀착한 움직임들을 취하는데, 이는 숨에 기반한 의식, 수련, 기도와 같은 정신적이고도 내적인 심상을 몸으로 체현함으로 연장된다. 올곧게 세운 척추와 모은 손은 그것이 옆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도상으로서 효과를 강조하는데, 처음부터 횡의 축이 아닌 종의 축으로, 곧 위아래로 배치된 두 사람의 층위는 바깥쪽에 시선의 무게중심을 둠으로써 안쪽으로 향하는 시선의 방향을 수직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구성한다.
따라서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서사로 연장되는데, 이는 한 명의 숨이 둘의 행위 위에 중첩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의식의 주체가, 전체를 관장하는 하나의 시선이 둘의 평행한 움직임과 하나의 긴밀한 합의 공간을 지배하는 것인데, 이때 바깥에서 등장하는 정승준의 구음은 이 둘의 애달픔의 정서를 촉진하고 증폭하는 효과를 의도하는데, 이는 프레임을 벗어남에도 그 프레임 안으로 던져지는 또 다른 축의 시선을 더함으로써 내재적인 두 여자의 현실에서 그와 결부되는 전사를 구현한다는 혼동을 일으킨다.
‘니나’는 오정윤이 만든 조어로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두 개의 상징적 의미를 병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泥娜’, 곧 진흙 니(泥)는 “생명을 품은 대지의 자궁”을 아름다울 나(娜)는 “그 안에서 태어나는 여성적 존재”라는 걸 작품에 대입하면, 오정윤이 박희주에게 향하는 일방향적인 시선―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은 오정윤의 엄마적 존재 양상을 과거의 차원에서 박희주에 투사하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대입은 일종의 시차와 혼동, 환상의 횡단을 가정한다. 그럼에도 이는 그 미묘한 갈라짐의 세부를 인준한다고는 볼 수 없는데, 그러니까 이는 오정윤에게 박희주가 아니라, 박희주에게 오정윤은 어떻게 가정될 수 있느냐를 해소하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
그가 또 다른 엄마 되기의 시선에서 자신의 엄마의 어린 시절을 가정함으로써 생겨나는 애달픔은 어린 엄마를 보듬는 것으로 나아가지만, 이 두 존재의 시차와 간극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고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끄러지는 시간, 환상성의 층위, 어렴풋한 존재함과 의식(意識) 차원의 존재함은 어떻게 움직임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까. 이는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시선, 또는 프레임을 벗어나는 존재를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 등을 통해 일부 구현되는데, 〈니나〉는 후반 의식(儀式) 차원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여성적인 것들의 연대로 승화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물론 잔여가 있는데, 이는 둘의 관계의 격차, 한 명의 주도권 그리고 주체의 시선 등의 미묘한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노연택과 김은경의 〈홀드〉(안무 노연택)는 제목과 같이 두 사람이 서로의 지지체가 되어주는 전개 과정 자체가 안무의 근본을 이루는데, 여기에 두 사람의 시차가 환상의 내용을 입힌 서사를 구성한다. 곧 지지체가 무력해지는 순간에 두 사람 모두 각기 다른 감정이 실리는데, 이른바 대칭의 구도, 완벽한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몸의 관계적, 매체적 차원의 결속은 빈 힘과 수행의 여지로 전환되고, 그때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을 향한 여자의 시선과 그를 뒤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남자의 수직축이 그것인데, 이 감정의 서사는 너무 익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여자의 응시와 남자의 응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후자에는 실체가 결부되어 있다면, 전자에는 기억의 차원에 자리할까.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남자와 연장선상에서 놓이는 것일까. 결속된 두 신체가 거리를 형성하는 이후에는 그 시간성 역시 차이를, 그리고 그 간격의 어떤 모호함을 동반하게 되는데, 여자의 알 수 없는 시선으로부터 다시 남자의 시선이 그를 제어할 수도 교통할 수도 없음의 곤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까지의 현실이 기억이 되고, 그 현실과의 시차로부터 남자 역시 기억의 차원을 입고 있게 된다.
〈홀드〉는 결국 잡지 못하는 관계의 역설, 그 시차가 가진 ‘무거운’ 정서적 고통을, 현재에 있지 않은 마음에 상응하는 ‘가벼운’ 몸의 어떤 관계를 보여준다. 전자에게서 몸이 홀드되지 않는다면, 후자에게서는 마음이 홀드되지 않는다. 여기서 매체로써 결정지을 수 없는 마음은 일방향적인 잡기와 그것의 적극적인 실패 안에서 역설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데, 반대로 여자의 벗어남이 가진 적극성―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수동성으로 은폐된다.―은 시차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동시적인 것을 향함에도, 그 둘의 맞물림은 일방향적 운동에 의해 마음에 대한 시차로 각인된다.
곧 남자는 잡고자 한다면, 여자는 벗어나져 있음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이 둘의 시차를, 공동의 전선을, 그리고 그것의 간극을 현재로 동기화하면서도 동시적으로 포착하는 건 (근본적으로 단속적인) 피아노 건반의 연주에 따른다.
박수진과 은혜량의 〈바앙〉(안무 박수진·은혜량)은 레이저로 무대를 포집하고, 상수 안쪽과 하수 앞쪽에 각각 놓인 두 개의 의자로 두 사람의 고유한 차이와 지배적인 관계의 이미지를 선취하는데, 이때 의자는 은박지 같은 것으로 겉을 감싼 뼈대만 있는 구조이다. ‘바앙’은 방을 늘려 부른 조어인데, 의자의 간격이 큰 만큼 무대는 훨씬 확장되고 열린, 그러면서도 그 의자로 인해 자유롭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데, 의자는 둘의 접촉 즉흥적 긴밀한 결속의 움직임의 지지체로 적용된다.
살풀이를 소재로 했지만, 〈바앙〉은 앞선 〈홀드〉에서처럼 두 사람의 간극을, 따라서 생겨나는 환상을 다루는데, 이는 마치 좌판이 없는 의자와 같이, 그 의자가 어떤 덫이자 말려드는 구멍인 것과 같이, 박수진의 은혜량의 지배는, 은혜량의 어떤 무의지적, 무의식적 차원의 시차로써 맞물리는데, 이는 〈홀드〉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밀어 당겨 얻어지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거리 없음, 관계의 빗겨나감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내재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인데, 결국 외부의 함입에서 시작함에도 결국 내재적이어야 하는 살풀이의 경계에 대한 매체적 속성을 이 어긋난 관계, 마치 두 의자의 떨어진 거리와도 같은 관계에서는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의 멈춤에서 돌연 공연이 끝나는데, 이는 핀 조명이 사라지고 음악의 난도가 올라가는 지점에서 외부 장치의 힘에 순전히 의지해서 맞는 결과로 이어진다.
유재성과 한지향의 〈잔열〉(안무 유재성·한지향)은 〈홀드〉와 비교 가능한 작업인데, 두 사람의 대등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극적 서사가 탄생하는 〈홀드〉와 달리, 〈잔열〉은 시종일관 두 사람의 시차를 동시적인 것 안에서 포착한다. 곧 한 사람의 움직임은 다른 사람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데, 이는 유재성이 한지향을 톡 건드리면, 그에 반응해 정체 구간이 풀리면서 움직임이 흘러가는데, 이렇게 실체와의 근접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둘의 관계는 끊임없이 결속된다.
좁은 범주의 터칭은 상대방의 반사신경적 움직임을 산출하는데, 이는 일정한 간격을 띄우면서도 유기적으로 두 사람이 공동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모티브는 결국 〈홀드〉에서처럼 기본적으로 이 두 사람의 수직축의 시차적 결속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는 두 신체 움직임의 긴밀한 협응을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감정의 과잉적 순간과 그 비약의 차원을 상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기본적 원리로써 작품을 온전히 관통할 수 있게 된다.
분절에 입각한 움직임의 형식이 선택된 것도 인상적인 동시에 그것이 앞서 터칭과 같이 둘의 연결된 움직임에 조응된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곧 두 사람 사이의 최소화된 간격으로서 터칭을 바라본다면, 한 사람의 움직임의 가동 범위 역시 그 최소한의 유격을 유지한 것으로 거꾸로 분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펼침, 접힘 등의 커다란 동작들이 미시적 차원으로 쌓여가는 과정에서 그 개별적 차원의 움직임은 두 사람의 거리만큼의 분절을, 시차를 자체적으로 체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동작들의 직선적 차원으로 빠르고 선명하면서도 그 투박함의 차원을 시원한 느낌으로 상쇄했던 건 고채도 붉은색 한 톤의 하늘하늘한 촉감의 의상이 상하의 모두 길게 통일되었기 때문으로, 이는 시각적 긴장과 함께 동선의 유려함을 그것의 직선적 차원의 단조로움을 상쇄하는 가운데, 최적화 동시에 최대화했다.
최옥훈과 정철웅의 〈불어도 춥지 않던 바람〉(안무 최옥훈·정철웅) 역시 〈잔열〉과 같이 의상이 주는 효과가 큰데, 검은색의 하이그로시 재킷으로 통일된 두 사람이 마치 쌍생아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정면을 마주한 채 평행하게 선 두 사람이 두 팔을 거칠게 동시에 과장되게 구성하는 부분은 동선의 과잉과 동시에 유려함을 신체에 대한 확장된 포장으로써 반짝거림―의상의 광택과 조명의 기울기―으로 상쇄하는데, 이는 크럼핑의 형식을 완벽하게 구현한다기보다는 외양적으로 닮아 있음의 인상을 주는 데 가까운데, 그것은 곧 몸을 표현하면서 은폐하기 때문이다.
“카-키-케-코-카-크”라는 음악 아래 깔리는 음절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처를 줄 때” 쓰이는 단어들을 표현한 것으로, 이는 정서적 차원의 내레이션이 먼저 깔리는 무대의 시작에서의 연장선상에서, 곧 무용수의 내면이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따. “윤슬”, “귀뚜라미” 같은 단어들의 나열은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자의적이고도 불규칙적인 사물들, 이미지들로서, 〈불어도 춥지 않던 바람〉은 안무가의 자전적인 서사가 뒷받침되는 작품이다.
이는 내러티브적 몸짓으로 칭할 수 있을 듯한데, 곧 내레이션이 몸에 기입되며 몸을 추동하는 것이 그것이다. 영상 역시 지배적으로 무대를 잠식하는데, 해파리 같은 분자 구조가 드러나는 투명한 신체의 궤적이 그것이다. 조명이 한 번 객석을 투사하는 적이 있는데, 이때 중앙에서 두 사람이 겹쳐지는 모습이 연출된다. 〈불어도 춥지 않던 바람〉은 예외적으로 다른 네 작업과 달리, 자전적 목소리, 서사, 단어를 직접 노출하며, 그에 따라 듀엣은 관계의 밀도를 시험하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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