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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비기능적인, 비의도적인 움직임REVIEW/Dance 2026. 1. 31. 22:11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이라는 제목1은 부정의 부정을 거듭한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무엇으로 특정 가능하다는 것을, 어떤 의미를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것은 적어도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경유해서만 자신을 그것으로서 드러낸다, 적어도 이 문장에서는 말이다. 〈아닌 것이 아닌〉은 곧 이 아무것도 아닌 무엇으로부터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움직임을 추출해 내려는 어떤 시도들이다.아마도 내장까지 숨을 불어넣어 쉬고, 하품하고,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로 흔들리는 어떤 일련의 과정은, 움직임의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 절차들이 곧 움직임임을 나타낸다. 그 안에서 어떤 소리가 불거지고 몸을 지배하고 주요한 매체 표현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일견 황수현 안무가의 〈카베에〉(2023)를 비롯한 구음을 활용한 일련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닌 것이 아닌〉은 소리의 가시화 자체가 표현의 완수가 아니라, 움직임의 통로로서 이전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분기된다―황수현의 작업에서 소리는 그 소리라는 매질 자체 외에도 그 몸의 통로로서 경로를 동시에 완수하는 것인데, 이윤정의 작업에서 소리는 오로지 몸의 중간 과정으로서만 획득되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이 소리를 내는 통로로서 몸이라는 매체로 모든 것은 귀착되게 되는데, 이는 일견 소매틱 작업 양식으로 불리는 작업들의 이미지를 견인해 온다. 몸은 최적의 이완 상태를 찾아야 하며, 그것은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차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닌 것이 아닌〉의 제목은 바로 그러한 상태가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곧 부정이 아니라는, 부정의 선언인 셈인데, 이윤정의 지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소위 ‘내장 감각’이라는 비가시적인 감각의 차원을 가시화하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떤 너무나도 실체적인 무엇을 가시화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 하염없이, 하품하는, 정말 질리게도 계속하는 존재들은 일견 우스꽝스러운데, 그것은 감수되는 것이다, 춤의 근본적 작동 원리라는 차원에서 말이다―그것이 상징적 의미를 띠는 것은 일상의 차원이 춤으로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부정될 수 없는 춤의 확장된 정의를 도리어 체현한다. 반면 그것은 순전한 몸의 연장으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춤의 이상에 대한 접근이기도 하다. 〈아닌 것이 아닌〉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이 숨 쉬는 신체에서 확장되어 가는, 변주되는 움직임의 양상이, 4면으로 열린 큐브의 무대 양상을 띠는 것으로만 제대로 감각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물론 이 움직임에 대한 감응 상태가 곧 춤에 대한 단 하나의 고유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오는 신념에서 온다.
어쩌면 춤의 또 다른 원리는 그러한 전염과 전파 가능성으로부터 오는데, 하품하는 무용수들은 그것을 따라 하기보다는 서로에게 그것이 옮아간 것에서, 개별적으로 객석에 난립해 하품을 방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적어도 대등한 바닥의 견지서 이 움직임들은 상호 모방의 가능성을 극의 동력으로 가져갈 수 있는데, 이것이 처음부터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은 이 상호 모방의 동력이 순전한 주의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형의 급속한 전파 아래 시차를 둔 연속의 차원으로 전개된다는 사실과 연관성을 갖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외부 접속이 내부 피드백 체계의 주의를 깨뜨리는 단계―감은 눈과 외부를 인지하는 눈의 사이에는 어떤 다른 단계가 없다.―에서 전파의 작동 원리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혹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방사형의 움직임에 구심점이 생긴 후에, 사실상 하나의 스피커의 위치, 곧 그것의 물리적 위치를 지정하는 특정한 좌표의 기원이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이 집단의 체적을 묶는 소리는 그 위치에서뿐만 아니라 그 내용적 차원에서도 특정한 사물이 일으키는 소리로서 물리적인 구획의 경계를 표시한다. 이때 발생된 소리가 그려내는 물리적 환경의 기원이 스피커의 물리적 위치가 갖는 소리의 기원과 완전히 혼동되지는 않음으로써 가상의 소리는 재생의 차원임이 인식되는데, 그것이 공간 전체를 반향하는 대신, 특정 좌표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소리는 물질적인 것으로 자신의 장소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분리’된 스피커로부터 소리의 기원을 이중적이고 복합적으로 새겨 넣는 방식은 그것이 움직임에 대한 동기화를 기도하지도 또 기도할 수도 없는 차원에서 또 다른 몸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공간을 지배하지 않아서 몸과의 동기화에 있어 직접적이고도 부수적인 역할을 떠안지 못한다. 그 소리의 기원을 결국은 시차적인 물리적 좌표의 차원에서 이중으로 지시됨으로써 그것은 그 자체에 대한 추적을 기하거나 또는 움직임의 불순물 차원으로 기입된다.
이때 움직임은 서서 터덜거리는 걸음이 채 되지 않는 움직임, 마치 수면 중에 있어 어떤 특정 방향도 지시하지 않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 같은 움직임이다. 이 몸은 다시 두 팔을 모은 채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몸을 순간적으로 뒤집는 움직임으로 변화한다. 전자에서 하나의 발이 바닥에 붙어 있음을 유지한다면, 후자에서는 두 팔이 골반 아래쪽에 붙어 있음을 유지한다. 신체의 제한이 걸림은 그것이 비의식적인 차원에서 연유한다는 것과 결부되는데, 이는 신체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어떤 차이로 연장될 수 있을까에 대한 사고 실험적 차원에서 시작되는 안무의 특질을 가시화한다.
〈아닌 것이 아닌〉의 마지막 장면은 단체로 집산해 밀집된 원형의 대열에서 구음에서 음악적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연출하며 끝나는데, 이는 ‘아무것도’에서 ‘아닌 것이 아닌’의 사이가 극단적인 간극을 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은데, 곧 아닌 것이 아닌 것을 평범함의 숭고함으로 둔다면, 이 소리가 지닌 본래적인 의도 없음의 성질이, 비구상적 차원의 성격이 일종의 명확한 형태, 표현의 질적 가치를 띤 차원으로 급격하게 전이되는 걸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을 비약으로서 승화가 아닌 자연스러운 도약으로 다시 재위치시킬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음악적 공명으로서 신체 테크닉이 전면에 나오는, 곧 음악적 매체로서 신체의 가능성을 짚으며 신체 표현의 전이된 양상이 지닌 새로움을 보여주는 황수현의 안무 메커니즘과의 차이가 좁혀지는데, 그것은 능동의 메커니즘, 고도의 표현 기술로서, 직전까지 〈아닌 것이 아닌〉이 보여주던 비질서적인 몸, 의지를 배반하는 몸, 내가 제어할 수 없지만 나를 장악하는 몸의 움직임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숭고함이거나 평범함을 배반한 숭고함이 아닐까. 이 지점에서, 〈아닌 것이 아닌〉의 기초적인 몸의 움직임의 기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결코 발전될 필요 없이 불명확한 기원의 시점에서 무한한 유영을 기도하는 것 역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곧 그것만이 차이를, 차이의 힘을 낳지 않을까.김민관 편집장

- [1] 이윤정 안무가의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이하 〈아닌 것이 아닌〉)은 부정의 뜻을 병렬시키는데, 그리하여 분별되는 이 세 가지 어구는 마치 각기 다른 주어라는 혼동을 준다. 아마도 ”아무도“와 ”아무것도“가 주어이며 ”아닌 것이 아닌“이 서술어로 수렴될 때 그것은 제대로 읽은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이 세 개의 구별로 인해, “아무”, “아무것”, “아닌 것”이라는 주어가 ”아닌“이라는 서술어로 수렴되는 것 같은 착시를 주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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