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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1〉: 경계를 간직하기 혹은 흔들리는 주체에 머물기REVIEW/Theater 2026. 2. 20. 13:55

박소영,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1〉[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박소영의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1〉(이하 〈경계넘기〉)는 공고하고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치부되어 온 아버지 성 대신에 어머니 성을 씀을 선택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아래, 여러 시도를 해왔던 과정과 제반 리서치를 전한다. 이는 후반, 그가 어머니 신진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시화되는데, 어머니의 삶을 존중하고 그 중요성과 가치가 승인되고 기념되며 설파되기를 바라는바, 그 흔적이 자신을 타고 각인되기를 소망함에 따른 것으로서 비로소 그 의미가 결정된다.
그가 이름을 바꾸게 됨에 일정 정도 주저하는 바는 그의 행동이 페미니즘 운동으로 읽히며 그가 페미니즘 전사로 명명될 수 있음에 따른 부분도 있는데, 그보다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그에게 올 어떤 즉자적인 변화가 근원적인 변화로 그의 삶을 변경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전제된다. 전자의 측면에서, 그의 태도는 방어나 회피와 같은 차원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그가 페미니즘 운동을 부정한다거나 그것과 전적으로 선을 긋기 때문이 아니라, 성 바꾸기 행위가 단지 여성의 권리에 국한되어 읽힐 수 있음에 대한 우려를 포함해, 합리적인 이유와 논리를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극의 맥락에 따라 추정해야 하는데, 더 근본적으로는 그의 행위가 인간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권리가 아닌가라는 반문을, 더 근원적으로는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어머니가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며 자신을 키워 온 개인적 전사의 고유함을 사회적 차원의 어떤 범주로 ‘증대’하고 ‘고착’시키는 것에 대한 우려 혹은 두려움 때문으로, 이는 그 역의 차원, 곧 페미니즘 이념 차원에서 자신의 행위를 고찰하는 접근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소영의 렉처 퍼포먼스는 개인의 차원으로 닫혀 있는데, 곧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고 결정하고자 하는데, 이때 그 고유성의 차원은 ‘개인’을 걸어잠그면서 그 개인으로서 영역을 풍만한 것으로 만든다. 곧 이 퍼포먼스의 개체적 분별은 그의 고유성의 영역을 확인하고 승인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기도 하면서, 그것이 사회적 범주의 차원에서 확장성을 갖는 것에 대한 메타적 접점을 단지 기대해 볼 수 있기만 하다.
가령 그가 다른 어머니 성 변경 사례를 “연출노트”에서만이 아니라, 공연 내에서 가시화하거나, 그 다른 사례들로 리서치의 범주를 넓힌다면, 그가 순전히 자신의 수행성에 기초한 공연을 벗어나, 다른 개체의 고유성들에서 공통의 언어를 향해 나아간다면, 공연의 바깥으로의 확장성이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성찰과 연대의 실제적 기초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 향후의 과제쯤으로 정의될 수 있는 ‘또 다른’ 경계 넘기의 일환과 다른 경로로서 〈경계넘기〉의 박소영의 캐릭터화됨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미덕으로 분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계넘기〉의 고무할 점은 아마도 아버지 성에 대한 관습성과 양성 쓰기 운동에 따른 예외적 표지로서 명확한 분별 사이에서, 곧 어떻게 보면 성(姓)에 대한 고민과 행위의 단계, 곧 개체의 서사는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곧 성을 바꾸지 않은 과도기적이고 잠재적인 단계의 차원에서 박소영의 렉처는 몇 가지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성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그의 방향성은 실제적인 것을 향하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그에 따라 이는 성 변경의 결과에 대한 재현에 그치지 않으며, 그의 퍼포먼스는 끊임없이 그의 현재 생각과 고민과 현동화된다. 또 한편으로, 이름의 자의성만큼이나 성이 지닌 자의성이 특정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율성―그것의 예외적임―으로 가시화되는 동시에 환원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과정에서의 개인의 고유한 생각이 지닌 입체성과 복잡함이, 아울러 실제적인 처리와 법적 해석의 차원이 드러난다.
〈경계넘기〉는 민법 781조 “자의 성과 본”의 항목에서, 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으로 전제되고 있음의 사실과 자의 자율적 성에 대한 선택의 가능성이 변경 가능성으로 일부 확장된 6항 역시 비교적 근래(2005년)에 신설된 조항임을 전한다. 또한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 심판청구서”에 첨부된 동의서 역시 함께 검토되는데, 공연 전에 마련되었던, 그리고 미처 받지 못하고 입장한 관객들에게 공연 도중에 나눠준 이 심판청구서를 박소영은 실제 성 변경 시에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곧 〈경계넘기〉가 커튼콜을 대체한, 두아 리파(dua lipa)의 〈levitating〉을 부르는 박소영 뒤로, 가정법원에 가는 경로를 찍은 짧은 영상 클립이 보여주는바, 이 A4 종이 더미는 성을 실제적으로 바꿈을 전제하는 수행적 퍼포먼스의 물적 증거이자 방편이다. 더 결정적인 건 가정법원의 회전문을 밀며 입장하는 박소영의 모습에서 ‘회전’하는 이 영상의 그 마지막 분기점으로, 이는 법이 전적으로 무거운 형식으로서 작용함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아직 성을 바꾸지 않은 작가의 내재적 차원에서의 모호함이 징후적으로 표시되는 것에 가깝다.
어쩌면 가정법원의 법적 공간 앞에서 박소영은 개인적 차원의 심미적 쾌락을 성취하는 것으로써 저항과 갈등의 차원이 아닌, 그 반대의 차원에서 개인의 고유한 자유와 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설파하는 것에 가까운데, 이것이 만인을 위한 노래가 아님은, 그가 관객에게 가도 좋다고 하며 관객의 퇴장을 부추기는 몇 번의 멘트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그로써 성립되는 서사는 그 시간은 단독적인 시간의 잉여를 산출하고자 함에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곧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어떤 보편성을 띠는 것―또는 납작해지는―에 대한 불편함 혹은 두려움은, 개인의 차원에서 고양되고 격상된 의미의 두꺼운 지층을 만드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는 홀로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 곧 사회적 차원에서 가장 축복의 의미가 큰 예외적 순간을 어머니-나의 관계를 성 바꿈을 통해 합치시키는 것으로써 긴밀해진 관계성을 드러내는 순간으로 갈아 치우고,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프로포즈와 축사, 주례 따위를 대신하며, 가족의 본래적 의미를 재승화한다. 그리고 뭔가 기이해지는데, 그것은 무언가 아버지의 성을 마침내 되찾은 자식의 명예로운 성취의 순간이 시대 착오적으로 회귀하는 순간처럼 감각된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단절되는 여성 성의 계승에 대한 회복이라는 표면적 차원의 전복의 서사 너머에서 말이다.

앞선 동의서가 어머니로부터 연장된 것이 아닌, “친부, 계부, 조부모용”이라는 단서가 전제된 것처럼, 그것은 성에 대한 전적으로 타동적 권리의 차원과 함께, 아버지 위치에서의 용인과 점검, 허락이 지속해서 성 변경에 미치는 힘을 증명한다. 이는 더 중요하게도, 박소영의 말처럼 어머니의 부재하는 입장, 공백의 위치를 더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소파에 앉아서 자신으로의 성 변경이 관습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음을 말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관성적이기보다 초연한 것으로 보인다.그 과정에서 박소영 자신도 아마 감지하게 되는 것처럼, 그의 어머니 신진순의 어머니 성은 김씨(김말녀 분)이라는 것에서 오는, 실은 분기되며 혼합되어 수많은 성들의 결합에서 선택된 성의 일의적인 효과라는 걸 전제하고서라도, 이러한 성 변경의 수행성 자체를 ‘시험’하는 것 속에서 어머니에게 반동적으로 대응하려는 건 개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착종됨―어머니는 개인의 고유성으로 소급되는 대신 사회적 개인으로 환원되고자 한다.―으로부터 개인의 혼란과 충동의 모호하고도 양의적인 차원의 정서가 연장됨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 보인다.
순수한 상징계적 위치의 함의가 지닌 비틀림, 곧 남성, 여성의 순이 아닌 여성, 남성으로 기입하는 것만큼이나 근원적 차원에서 양립할 수 있는 토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함에는 사회적 운동에 전제된 피씨주의 이전의 반동적 차원의 무의식을 비추는 한편, 중심된 자리에 어머니를 위치시키는 일종의 개인적인 차원의 미소한 표지로서 언약과 그것에 대한 다짐이 박소영을 자신과 결부된 고유한 어머니의 위치 너머에서 사회적 존재로 자신을 다시 위치시키는 어머니의 말을 부정하기보다 부인하며 기피하고자 하는 태도로 구성한다.
박소영의 투쟁은 사회를 향해 있으며, 또한 그 사회를 체현하는 역설적인 여성의 위치를 겨냥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 차원의 주변을 바꾸는 것의 어려움과 지난함이 역설적으로 사회적 변화의 상을 추상적으로 매듭짓는 것 이상으로 크며, 그 투쟁 과정에서의 자신의 붕괴와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계넘기〉는 보여주는데, 여기서 인상적인 건 결국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작가는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성의 선택에서 자율성이 큰, 스웨덴, 몽골, 미국, 중국 루구호 주변 소수민족 모쒀족의 사례를 리서치한다.―에서 내파하고자 하며 또한 페미니즘 운동의 차원에서도 접근되는 남성 성을 물려받는 것의 기이함, 관습성의 차원의 명시에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차원과 내재적인 차원이 착종되는 사회적 개인으로서 장소의 유동성, 불안정함의 측면이다.
박뽀또라고 이름 붙인 강화도에서 입양해 온 집의 구성원인 개 역시 이는 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두는 어떤 ‘진일보한’ 관념의 차원보다는 아버지의 성을 임의로 의식 없이 붙였음의 반성적 태도에서 비로소 조명되는데, 사실 이는 어머니 성 역시 그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과 같이, 이 성의 인간주의적 관념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나타내는 것에 가깝다. 원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개에게는 박뽀또든 신뽀또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박보영은 운동을 실행하는 자이기보다 운동으로 나아가는 개인적 주체의 다종 다기한 한 경로를 보여주면서, 예외적이고 고유한 주체의 고민과 사유를 보여주는 지점에서 불안정하고 유동하는 의미를 그야말로 수행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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