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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렉티브 뒹굴, 〈꿈의 방주: Demo〉: 방주 너머 꿈 그리고 누수되는 방주REVIEW/Theater 2026. 2. 24. 19:43

콜렉티브 뒹굴의 〈꿈의 방주: Demo〉(이하 〈꿈의 방주〉)에서 무대는, 극장의 위험과 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이 형식적 차원의 안내 멘트로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점의 시작으로서 형식 자체가 된다. 이 발화는 그 자체로 내재화되고 육화된 하나의 가설 공간으로서, 외부의 형식으로부터 파생된 차원을 뒤집어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에 철저히 붙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대 상수의 사선으로 놓인 창고에서 주인공이 등장하고 공연의 이전과 바깥의 경계에서 안내하는 건 공연의 외부가 아니라, 공연에 달라붙는 그 외부가 바로 공연의 중핵이라는 데서 공연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정초의 움직임이 된다.
“기후정의 창작집단”으로 콜렉티브 뒹굴을 소개하는 것에 이어, 기후위기 속 그것과 너무 지나치게 결부된 결과, 우울의 상태를 겪는 한 존재에 대한 서사임을 소개함은, 이 창작집단 자체의 분열과 곤궁, 과도기적 상황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기후정의라는 사회로 확장되는 운동성의 방향이 내부로 미칠 때, 내부에서 고착될 때 생기는 어떤 균열의 초상이 이후 검출되는 방식이, 곧 이 이야기 화자 속 내면의 뒤집힌 존재들로 가시화되는 것, 그러니까 그것들이 화자를 대변하는 가운데, 이 주인공으로서 화자는 잠과 꿈의 공간에 빠져들며 이야기의 수면 아래에 잠기며 전도되는 건 일종의 실재와 재현의 경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면서 그 재현의 방식이 실재를 표현하고 그에 접근하는 것에 어떤 한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콜렉티브 뒹굴이라는 자기 지시적 차원에서 실재적 지시점으로부터의 재현이 심리적 실재의 표상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또는 직접적인 발화의 방식이 아닌 내밀한 심리의 차원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 화자 자체가 매개된다는 것은, 무대의 이후 환상성이 오히려 더 진실한 것임을 드러내는 한편, 그 내상을 더 분열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또한 진실해진다. 곧 그것을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진술하거나 발화할 수 없음의 차원을, 그것이 이후 무대에서처럼 극단적인 혼돈과 기이한 정동의 세계로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서사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존재의 죄의식이 극단화되는 시점에서 착종된 자아의 곤궁을 나타낸다. 행동과 실천, 그리고 외부의 심리적 기제와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와 간극 사이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무력해지는데, 개개인의 페티시즘적 부인에 대한 무력한 용인, ‘비꼬는 것도 반어법도 아닌’ 무력감의 연장에서 하나로 드는 예시를 택해 풀어보자면, ‘나는 기후위기를 잘 알아. 그렇지만 이번 한 번 정도는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음료수를 마시는 거야.’와 같은 일상의 심리구조에서 근본적으로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관객에 반향하기보다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읊조리는 데 가까운데, 그것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용인이나 우리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마주하며 강제할 수 없는 자신의 곤궁 자체가 단지 삐져나온 데 가깝다.
이 서사는, 그리고 서사의 방식은 기후위기를 서사로 다루는 이 자체의 심급에 다가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다분히 분열증적이라는 점에서, 전윤환의 〈기후비상사태: 리허설〉1 을 상기시키는데,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로서, 오히려 기후위기에 대한 서사가 봉착한 위기의 한 예시로서 징후적이다. 그러니까 〈꿈의 방주〉의 윤리적 차이는 그것을 다루는 것의 곤궁함이 아닌, 그것을 다루고 있는 이의 곤궁함이 위기임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자기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 또는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차원으로 매개하는 것의 실질적인 효과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기후위기를 일종의 소재적 차원에서 인용하고 시대적 정의의 차원에서 필요한 심급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개인의 위기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꿈의 방주〉는 시작하며, 이는 일견 제도적 차원에서 기후위기 서사의 특이점을 내재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개인의 일종의 번아웃의 상태라는 점에서 해소 불가능한데, 곧 기후위기를, 집단의 위기를 해결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인의 차원에서 닫힌 피드백의 원환을 그린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그러니까 ‘나는 인류의 위기임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보지 않겠어.’가 아니라, ‘나는 인류의 위기임을 알고 있지만, 나 역시 위기에 봉착했어. 그런데 그것은 결국 모든 이의 절멸 가운데 한 조각일 뿐이야.’라는 점에서, 꿈의 방주에 탑승할 인원은 소수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한, 자기로부터 기각당한 이의 굴절된 헛된 꿈의 잔재 같은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꿈의 방주〉는 히스테리 증상을 드러낸다.
이 히스테리증자에게 방주는 뒤집힌 꿈인데, 곧 미래를 기약하는 희망의 씨앗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이의 사라짐을 바라보는 이의 절망의 무덤과도 같다. 따라서 그가 우리의 의식 없는 일상의 행동에 대해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건 우리의 행동을 수긍하는 것도 부인하는 것도 아닌, 그것을 그 자체로만 지시하며 그것을 바라보면서 낙담과 체념의 상태에 젖어 드는 자신의 한숨 같은 읊조림이다. 그러니까 그는 방주에 올라타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그는 무대 상수의 커다란 방주를 눈앞에 두고 등을 돌려 스마트폰만을 훔쳐본다.
방주는 알고 보면 커다란 관이고, 그곳을 지연된 시간과 함께 화자가 나오면서 극이 시작되고, 접근성 안내를 연장한 낮은 온도의 유머로 점철되며 극의 영점을 비튼 채 시작을 유예하는 그는, 안내 멘트가 끝나자 등에 멘 돌돌 만 매트를 깔고 스마트폰의 세계로 곧장 빠져든다. 그를 대리하는 세 명의 행위자는 그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에 그의 환상으로 그를 대신해 들어간다기보다는 그의 환상이 그토록 무력하기에 그 무력함으로부터 그를 끄집어내며 표현하는 데 가깝다. 곧 그들은 발악하며 그와의 간극을 좁히려 애쓴다. 그것은 곧 화자 안의 분자들이 아니라 화자 바깥에서 화자를 수행하는, 화자 바깥에 있는 자신을 화자의 자리에 놓기 위해 애쓰는 주체들이다. 그러니까 그 애쓺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주체들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자가 지닌 주체의 공백을 표하면서도 그것과 자신의 간극, 재현의 간격을 그 과잉의 표현 안에 뒤섞게 된다.
냉장고와 세탁기 소음이 확장된 공간, 러브버그가 그리는 경로를 바닥에 새기는 조명, 신파 조로 읊기, 악쓰고 소리 지르기, 마지막으로 뒤늦게 합류한 자신의 곤궁을 그대로 노출해 버리기와 같이 〈꿈의 방주〉는 중심 서사를 그 서사와의 시차, 오차 속에 드러내며 관점을 이동한다. 그것은 어긋난 주체로부터 어긋나는 또 다른 주체의 자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 증상은 전이되고 점입가경의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니까 〈꿈의 방주〉는 끝없는 탈락과 미끄러짐의 주체들의 고장 난 합창 기계와도 같은데, 발화의 특권이 맞물리는 자리들 속에서, 혼란의 환경 속에서, 그 주어들은, 그들의 행동들은 시끄럽고 산만하며 분열증적으로 갈음되지 않고 다만 흩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공연은 어지럽고 심지어 피곤함을 안기는데2, 그것은 과잉된 자아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확정 짓지 못하는 분열된 자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처럼 방주를 수식하는 건 꿈이 아니라, 꿈이 파쇄되는 방주 자신이며, 그 열린 방주 바깥으로 풀려나오는 각각의 치열한 옹립은 애초에 방주의 온전한 누수 자체만을 증명할 것이다.
〈꿈의 방주〉가 드러내는 건 기후위기라는 정체성을 표방한 하나의 그룹이 그것의 주의·주장을 철회하거나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과의 간극 속에서 내재적인 차원의 위기를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가 아닌 자신과 불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분열증적 초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나간다. (기후위기라는) 사회적 대의로서 코드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메시지로 승화, 수용될 때 거기에는 피씨함에 대한 맹목적 사로잡힘이 전제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의제나 논의의 균열점을 봉합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동시대적이지 않고 현재적인데, 〈꿈의 방주〉는 그 균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동력 없음의 동력이 동력이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제도적 추인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마치 소진됨의 정체성에 주는 안식과도 같은 것이다. 결국 기후위기 활동가가 지닌 위기는 그것을 예술로 다시 표현해 낼 때 겪는 고민과 갈등으로 연장될 수밖에 없으며―거꾸로 그러하기에 그는 활동가로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예술가의 또 다른 성찰이 요청된다.―, 이는 그러한 개체의 위기를 예술의 근거로 삼는 예술가의 (자)의식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작품’으로 가시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종의 기후위기 서사의 메타 서사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예술가 자아의 갈등과 분열의 서사로서 〈꿈의 방주〉에서 기후위기는 부차적인 차원이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 1. https://www.artscene.co.kr/18476 [본문으로]
- 1. 이 부분을 재구성할 의지가, 엄두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글은 부족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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