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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비밀기지, 〈몸 기울여〉: 하나로 맞물리는 다른 두 개의 세계REVIEW/Theater 2026. 2. 25. 14:02

극단 비밀기지, 〈몸 기울여〉ⓒSang Hoon Ok[사진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상동). 극단 비밀기지의 〈몸 기울여〉는 길고양이를 찾는 두 인물과 그 나머지 인물들을 평행 몽타주로 교차시키거나 대위법으로 교차, 중첩시키는데, 특히 후자를 통해, 분화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는 연극의 물리적 장소를 두 축의 인물이 동시에 경유하는 장면들을 적극 활용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프레임 바깥으로 비치는 단일한 평면에 모든 인물이 제각각의 포즈를 취하다가 음악에 맞춰 군무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몸 기울여〉의 심리우화적인 역설을 명시하는데, 이는 그 전에 서로 다른 목적으로 고양이를 찾는 두 인물과 거기에 더해지는 고양이는 삼각 편대를 이루면서 쫓고 쫓기는 인과관계의 폭력적 사슬을 환유적이고 실재적인 차원에서 감각화함을 하나의 코드로 완성 짓는 것이다.
곧 우리는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다라는 명제는 〈몸 기울여〉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제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의 태도를 요청하는데, 이는 길고양이 살해라는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며 결국 길고양이가 아닌 인간의 삶으로 도착한다. 고양이를 찾아 ‘몸 기울여’ 바닥을 기는 서라(강혜련)는 부재하는 고양이를 일정 부분 체현함으로써, 고양이가 아닌, 인간과 그 사회를 직시하는 폭력의 알레고리에 예속된 약자의 축을 체현하는데―그가 유일한 여성 등장인물이라는 점은 전면에 튀어나온 관성적 폭력에 길든 남자들의 사회의 반대 축으로서 날을 세우며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지점에서, 극 내에서 부차적인 페미니즘의 서사는 이미 하나의 대안적 영토로서 전제되어 있으며, 주제와 결정적으로 합치된다.―, 이러한 전이의 순간이 곧 대위법의 산물인 것이다.

‘몸 기울여’는 삶의 다른 태도로서 길고양이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 없는 인물들과 대비되는, 길고양이였던 망치와 모루를 찾다가 다른 길고양이를 찾게 되는 홍인(유독현)과 서라의 극 전반에서의 모습을 표기하는, 반복되는 상징적 구문으로, 그 반대편에서 군기지가 이전한 후 그 공터로 이전한 길고양이들을 싹 소거해버렸으면 하는 욕망을 아파트와 복합 상가 건설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치하는 두영(홍성민)의 말은, 그 자체로는 모호하면서 하나의 상징으로 각인되며 결말의 장면을 완성한다. 일종의 커튼콜적 차원이기도 한 군무 동작 이후, 무대 3면을 둘러싼, 뼈대로 남은 3층 높이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몸 기울여 그 반대편 구조물 아래 틈의 고양이를 찾는 서영과 홍인의 시선을 대비시켜, 그 둘을 하나의 모순으로 수렴시키는 장면이 그것이다.이 말이 모호한 것은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두영의 폭력성 자체가 아닌 그 폭력성을 특수한 개인적 차원으로 치환시키는 것의 위험성과 두영 자체의 주변 인물로서 위치를 고려했을 때, 곧 두영의 주동인물로서 동기를 예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세상의 법칙(으로서 폭력성)을 평범한 개인의 차원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인물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이 같은 말의 차원에서 두영의 일차원적인 폭력의 단초를 거기서 찾기에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은폐된 폭력을 기반으로 한 세계의 비윤리적 윤리를 한 사람의 특수성으로 소급시키며 처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반쯤은 내레이터의 차원에서) 그 말로써 그의 내면을 투사하는 게 아니라, 그도 알지 못한 채 일종의 진리를 어설프게 도입한다. 이 예외적 말의 솔기 어린 보편성을 전제할 때, 그 문장의 선후 관계도 비로소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심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다. ‘나의 아파트가 세워지면 좋겠어. 고양이들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은 나쁜 말이지만 실은 서툰 말이다.

야생-문명, 비인간-인간, 생명-발전의 이분법적 도식이 착종된 차원으로 우리의 삶이 ‘구성’된다는 것,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후자가 우선적으로 선택된다는 것, 그것이 무의식적 차원에서 두영에게서 응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직접적으로 일차원적인 폭력의 사슬 안에 있던 그의 무의식적 지각을 지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것은 후반에 제시되는 그를 포함한 일군의 사내들 안의 폭력적 유희와 계급 놀이로서, 그 안에서의 병민(조형래)과 동파(김상보) 간의 가장 큰 신분적 낙차의 관계 양상에서 중간자적 입장에 그 역시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에는 놀랍게도 고양이를 애타게 찾는 홍인 역시 속해 있는데, 그들의 놀이는 박스 안에 길고양이를 가두고 그 안에 비비탄 총을 쏴서 고양이를 괴롭히다 죽이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대장 병민은 최약자인 동파에게 그것을 강제한다. 이때 고양이를 찾던 홍인은 얼굴을 가린 그 무리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스며들며 그 기억을 마주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이는 그의 현재와의 대비를 통해 그의 무의식적 작은 균열점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지만, 동시에 동파의 현재의 분열증적 차원의 내면을 징후적으로 선취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오직 동파에게만 다른 장면으로, 의미 있는 장면으로 예속되는데, 그것이 곧 동파가 아닌 홍인을 통해 매개되는 이유이다. 결과적으로 동파의 트라우마를 우리는 홍인을 통해 관찰한다.
곧 그것은 홍인에게도 그리고 여타 다른 이들에게도 핵심적인 의미를 형성하지 않는 부분으로, 그 안에서 오직 동파만이 공격과 적대의 대상, 상자 안에 든 고양이였던 셈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병민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며 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무대화되며 다시 계승되며, 군수이자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동파와 그에게 구걸하는 병민의 현 위치를 반전한다. 곧 단 위에 오른 병민은 마이크를 잡고 지배의 위치를 전면화하는데, 이때 동파의 위축된 모습은 결말 장면에서 선연하게 명시되는 것으로 지속된다. 그는 건물을 올려다보는 대신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동파는 길고양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미션을 어린 시절 강제로 부여받고, 혼자 작은 틈 사이에 살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자 하지만 이를 거부당한 후 그것을 죽이고 얻은 쾌감을 어른이 되어서도 공터 고양이들에게 반복 실행하는데, 그러한 은밀한 성취가 그의 위치를 위협하는 그의 비밀로 자리 잡게 됨에 따라, 그는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반성적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명예의 성취를 위태롭게 하는 사실이 병민의 수중 아래 있다는 것, 곧 어린 시절의 예속됨을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차원에서 불가능하다는 것, 그의 표면적 성취는 그 예속의 실제 속에 단지 허울뿐이라는 것이 그의 위축을 영원화한다. 그는 그 비밀에 볼모 잡힌 채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승계할 수밖에 없다.여기서 고양이 살해에 대한 반성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행위로서 그것이 그의 반성이 아니라 그 단서로서 결정되는 부분에서 그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승화는 따라서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중적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것이 좌절됨에 따라 그의 반성은 타동적이고 도착적인 차원에서 ‘유예’되는바, 곧 그는 계속해서 폭력의 그림자를 안고 그로부터 내몰린 고양이의 불완전한 실존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주체가 되는 방안은 극에서 명시되지 않지만, 그가 국회의원의 자리와 모든 명예를 버릴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의 행위를 고백하고 그것이 발생했던 모든 과정을 기술해 폭력의 알레고리를 고지하고 끊는 것이 된다. 그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아마도 그는 그의 죄에 대해 인지하고 비로소 반성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모호한 두영의 기점이 되는 말을 전후로 하여, 현재까지 이어진 폭력 서클의 남성 연대의 무리와 그 바깥에서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두 사람의 모습은 모두 지지부진한데, 이것이 비로소 결정적 차원에서 응결되는 건 바로 이 과거 장면으로 들어가는 것, 동시에 현재로 찾아온 과거가 배어드는 것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몸 기울여〉는 처음부터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그리고 속된 남성 집단의 핍진한 대화들을 나열하는데, 가령 홍인과 함께 일하는 우석(박상윤)이 고기를 썰다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배를 찌른 걸 두고 ‘거기’까지 자르라는 병민의 말은 근본적 차원에서 여성 혐오적인 발언인데, 그것은 물론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즉물적 신체 차원에서 점유한다는 속된 인식의 발로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성의 잔여들이 군데군데 박히는 대화는 그 자체로 폭력적 구조의 의도적 가시화로, 그것이 ‘미약하게나마’ 현실을 재현한다는 데 목적이 있다―하지만 앞의 대사가 미약한 것으로 치부된 것이라면 이는 진정 문제적이다.―. 이는 사실 그들이 넘었던 담이 3층 높이인지 아닌지를 놓고 벌이는 두영과 우석의 실랑이는 꽤 길게 지속되는 가운데, 그것이 실은 감각의 고증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힘겨루기의 일환임을 보여주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반복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우석보다 더 높은 병민의 서열을 체현하는 말임을 드러내는 것임을 인지할 수 있지만, 그 말의 온당하지 않음이 온당하지 않은 사용의 차원인 것인지, 곧 적절한 것인지 또한 잔여로서 남성 집단의 무의식으로 저자 역시 침잠하는 것은 아닌지 결과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으로 사료되었다.
아마도 문명이 세워지기 전, 도시를 이루고 있는 아파트가 사후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이 모든 걸, 그리고 두영의 모호한 말을 봉합한다는 점에서, 〈몸 기울여〉는 우리 현실 바깥의 주변부적 삶이나 특수한 삶이 아니라, 일종의 우리 삶의 전 단계적, 원초적 삶의 전경을 제시한다. 그것은 따라서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곧 지역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우리의 왜상으로 드러내 각인시키는 절차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홍인이 자신의 폭력적 기억에서 홀로 이질적 형상으로 있던 것과는 달리, 곧 그 기억을 체현하면서 그 기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예외적 입장임에도 그에게서 어떤 놀라움이나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물론 이는 예외적 존재인 서라로부터 ‘방관’의 개념으로 비판받는데, 그는 군대와도 같은 그 상황에서 다른 행위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변명한다. 그러니까 그의 평온함은 그의 사후적 합리화에 의한 봉쇄 차원에서 획득되는 것일 수도 있다.―처럼, 우리 과거로부터의 무의식, 더 정확히 우리 본질적 측면의 무의식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차원의 시차이다.
〈몸 기울여〉는 그 문명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야생의 생명력을 들여다볼 것을 온당한 태도로서 제시한다. 그것은 문명의 찬란함에 경탄하는 시점의 수동적 소비자의 외양―도영의 앞선 폭력적 언사는 실은 이 더 쾌적한 삶과 그 바깥의 취약함을 전치하며 후자를 봉쇄하는 광고의 포장 기술과 닮아 있다.―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삶의 틈새를 찾는 구도의 여정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그 반대편에서 동파도 자리하며, 다만 그는 떳떳하지 못한 채로 굳어 있는데, 그의 수그림은 곧 적극적인 자기 주체성의 차원에서 발현되지 못함의 역설적 장면이다.

〈몸 기울여〉는 길고양이에 대한 이타심을 가진 두 존재와 그 공고한 남성 집단의 연대 안에서 자본주의적 성취를 욕망하는 바깥 존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서 교차시킨다. 고양이의 비가시적 경로는 이름 없는 존재의 움직임으로 지시되는데, 처음 반팔 위에 멜빵 작업 바지를 겹쳐 입은우석의 뒷모습과 그가 피우는 담배 연기,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틀어진 TV의 인트로를 지난 이후, 칼을 가는 홍인의 앞모습으로 그것이 반전되고 여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오프닝 신에서 끊임없이 무대를 치우며 분주히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남자(임솔균)의 또 다른 반복된 ‘등장’이 그것이다―그의 과잉으로서 움직임은 무대 자체가 과잉적으로 집적되었음에서 기인한다, 곧 무대는 그의 과잉을 만들기 위해 부러 잉여들을 산재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스태프의 모습과 중첩되며, 그동안 신진호 연출이 막의 사이에 무대의 뒷모습을 부러 가시화하는 것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른바 그것은 극의 내재적 이념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곧 공간의 사물들을 건드리는 남자의 존재는 존재와 사물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의 차원을 극장 차원에서 지시하면서 나아가 우리가 언어화하지 않는, 공간의 틈 아래 비존재적 양식이 실재한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증명한다. 서라와 홍인이 그토록 찾아헤매는 고양이가 이미 우리 삶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로서 말이다.

무대의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맨처음 우석의 앞에 놓인, 그리고 홍인이 선 무대 가로 길이에 육박하는 직육면체 구조물이 이동하며 가변적 구조를 구성한다는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그것이 안쪽으로 밀리며 그 옆 하수쪽 천장의 집게에 매달린 판지더미가 기계 소음과 함께 내려오고 무대 중앙으로 옮겨져 공터의 임시 고양이 보호소 역할을 하게 되는 전반적인 무대 변경은, 이 앞선 고양이-남자로부터 자연 연장되는, 스태프-배우의 아상블라주된 존재들의 개입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초과된 경계는 연극적 전제를 의도적으로 가져가는 것으로서, 공터에서 고양이를 찾는 동파와 서라의 각기 다른 시공간의 교차와 같은, 앞서 말했듯 쫓고 쫓기는 맞물린 폭력의 연쇄 순환 고리라는 이념을 체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이를 연극에서만 제약적으로 또한 제약적인 차원에서 활용 가능한, 일종의 장소적 대위법으로 명명해 본다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스태프와 배우가 하나의 무대에 동시 공존하는 순간을 가시화하는 것의 반대편에서 용인하는 관객의 그 관성적 사고 방식이 전제된 바다. 서라는 고양이 보호소와 자신들이 키우던 고양이 망치와 모루 중 망치와 다른 고양이 사체가 쓰레기봉투에서 발견된 장소에 각각 설치해 둔 이동식 CCTV에서 녹화된 영상 하나에서 길고양이를 살해하는 동파의 행위를 발견하는데, 이후 출현하는 동파의 공터에서의 고양이 살해를 위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며 어르는 모습과 이후 다른 고양이의 흔적을 찾아헤매는 서라의 모습을 병치한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건 고양이 탈을 쓴 남자로, 동파가 향해 다가가는 고양이는 그의 뒤에서 그를 향하고, 그 맞은편에서 서라가 고양이를 좇으며 앞서 언급한 삼각형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동파의 행위는 영상의 화면을 매개하면서 실제 그 과거가 현시되는 것이고, 서라의 행위는 그것을 인지한 후에 사후적으로 고양이의 다른 흔적을 찾는 모습이다. 고양이는 그 사이에서 과거의 동파에게 어름을 당해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고양이이면서 서라가 찾아 헤매다 만난 또 다른 고양이의 존재다.

동파가 과거로 소급된다면, 서라는 과거를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미래를 향한다. 그 사이에서 고양이는 슈뢰딩거의 착란적 존재 양상에 속하게 된다―둘의 행위를 진정한 동시성의 차원으로 상정한다면, 어쩌면 동파보다 서라가 먼저 고양이를 찾았다면, 영상이 펼쳐지기 전의 시간으로 소급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간의 앞당김과 미래적 현시가 공존함은 또한 하나의 장소라는 연극적 한계를 반전시킨 부분이다. 그리하여 이 둘의 같은 행위의 양상에 결부되는 인간의 목적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하지만 고양이가 아마도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는 건 비극이다. 따라서 인간의 죄는 명확하다!서라와 홍인은 고양이 찾기라는 명목 아래, 헤어진 부부의 인연을 이어간다. 둘의 관계는 〈몸 기울여〉에서 권력 구도와 이익 추구의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는 유일한 관계라는 점에서 차이를 갖지만, 그것은 재결합의 계기를 가져오지 않는 차원에서 끝난다. 이것은 단지 가상의 전제 아래 모호하게 시험될 뿐인데, 서라에게 삶은 동파라는 이미지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바, 사랑의 충분조건은 이곳을 벗어난, 그리고 남성 집단의 폭력을 용인하지 않고 동물의 권리가 존중될 수 있는 영역이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전적으로 두 사람만의 내밀함의 문제가 아니며, 이곳에의 적대로부터 묶이는 ‘우리’라는 개념을 사랑의 차원에서 재발명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들이 각자의 세계로 분기된 건 독특하게도 길고양이의 집사를 자처한 서라의 행위에 대한 동네의 수군거림으로부터 홍인이 맞서거나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여기서 윤리는 동물에 대한 애정이나 옹호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담론의 축으로 두고 사회와의 불화를 떠안기, 또는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 비판하기라는 입장으로 옮겨가는 실천적 차원에서만 모색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홍인이 서라와 기꺼이 이 세계를 벗어나는 ‘우리’가 되지 못하는 건 일차적으로 그가 그 윤리를 절대적인 명제로 내세울 수 없어서이지만, 곧 먹고 사는 문제에 비쳐 부차적인 것으로 유예해야 하는, 서라의 입장에 대한 변명의 차원의 판단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바깥으로 나아가기 자체가 아닐까라는 것이 예외적 존재가 지니는, 그러니까 ‘빻은’ 남성 다수의 연대를 소수의 힘이 무력화하는 서라가 가진 급진성의 부분일 것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홍인은 사랑을 반복해서 실패하게 된다. 사랑은 윤리를 동반하며, 사랑은 근본적으로 결국 그 바깥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윤리적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 이전에 이 둘의 조우와 분기는 진정하게도 부조리한 사회 구조로의 ‘봉합’ 이전에 그 대안의 틈새를 제시하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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