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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연출 김예은, 〈이 세상 너머〉: ‘너머’, 두 개의 세계로부터 분열되지 않고서
    REVIEW/Theater 2026. 2.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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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연출 김예은, 〈이 세상 너머〉 ©서민아[사진 제공=네이키드블루스](이하 상동).

    〈이 세상 너머〉는 주인공, 늑대족 소녀 모울을 경유해 주요한 두 축의 서사에 진입하는데, 이는 늑대족과 바깥 세계를 투과하는 예외적 존재로서 모울의 서사가 어디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른 차이로, 늑대족 안에서의 내재적인 분기, 그리고 이후 바깥 세계를 경유하여 성찰되는 변증법적인 분기가 교차된다. 이 둘은 모두 모울을 향해 있고, 모울의 성장 서사의 외양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마주하는데, 문제는 또는 본질은 그 두 방향성 모두가 모울이 감당하기 어려운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성장은 유예되며, 또한 그 충격의 간격을 봉합하기 위해 ‘성장’이라는 관념이 역설적으로 필요해지는데, 〈이 세상 너머〉는 따라서 문제의 중핵을 바라보고 성찰하기보다 그것에 절대적으로 휘말리는 주체의 불안정한 지위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에서 진정한 늑대로 변하게 되는 늑대족 내 성인식을 치르기를 거부하는,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오빠 나일의 서사가 중심이 되는 전반에서, 오빠의 부족 사회 내 적응의 실패는, 모울에게는 일종의 뒤늦게 찾아오는 실재, 미리 선취된 실재와도 같은데, 그것은 나일과 모울의 대화적 관계성에서 추출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나일의 경험이 모울을 투과해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일은 모울의 반면교사이자 또 다른 가능성의 경로이다, 오직 모울을 건너뛰고서만 말이다.

     

    곧 그것은 모울이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의 경험을 모울 너머에서 제시하는 한편, 자연스레 모울의 이후의 경험에서 트라우마로 반복될 가능성을 마찬가지로 모울의 너머에서 수여한다―나일의 서사는 모울을 경유하지만 모울에게서 미끄러져서 모울을 겨냥한다. 따라서 오히려 서사의 중핵은 결말에 이르기 전에 앞당겨 너무 빨리 구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금기를 결코 개인이 넘어설 수 없다는 비극적 차원의 메시지다. 모울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나일의 서사는 진정 주체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 허무하게 종착되며, 단지 모울을 통해서만, 모울에 이르러서만 비로소 의미화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의미화되지 않는다.

     

    나일이 마주한 실재의 곤궁은 해소되기보다 매개될 뿐인데, 모울이 바깥의 현실과 만나게 되면서 겪는 이질감과 당혹감, 불쾌함, 동시에 매혹의 감정 역시 그러하다. 곧 나일의 불가능성의 성장 서사를 모울이 다른 형식으로 맞닥뜨릴 때, 그것은 단지 타자의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모울 자신의 언어로 반추되지 않으며, 더 정확히는 반추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를 이곳으로 이끈 무용수 욘을 경유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모울의 시점이 아닌, 모울을 바라보는 욘의 시점이 모울 너머에서 모울을 향해 서사를 매듭짓게 됨을 의미한다―따라서 욘의 떠남이 모울과의 이별을 통해 기입되지 않는 건 필연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일과 모울의 간극과 모울과 바깥 세계의 간극은 모두 모울을 경유함에도 모울을 초과하며, 성장의 관문은 불가능한 실재의 경로로 주어진다. 나일이 윤리의 차원에서 집단 내 통과의례를 거부했다면, 모울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절대적 타자성과 타협해야 하는 집단 바깥에서의 그가 생각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변화를 겪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관객은 이 불안정한 주체들의 양상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는 지점에서 성장이라는 불가능성의 서사적 이념만을 단지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모울이야말로 그 이념에 대한 투명한 매개자가 아닐까―그 결과 그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모울에게는 세계를 먼저 고민하고 사유한 나일이, 세계로의 확장과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시선을 열어주고자 하는 욘이 뒤이어 자리한다. 그 둘은 모울이라는 존재를 매개하는 반면, 모울은 두 세계에 대한 거리를 완전히 좁힐 수 없는 위치로 끝까지 남는다―나일은 자살을 통해 그 거리를 포기한다면, 또는 그 거리로부터 기각당한다면, 욘은 이 세계를 다시 떠남으로써 그 거리를 해방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모울에게는 그 거리를 남겨둠으로써 예외적으로, 성장의 서사적 차원의 동기가 유지된다.

     

    나일의 마치 생리적인 차원에서 육식을, 다른 동물을 해침을 거부하는 것에는 신념이 전제되지만 그것은 그의 아버지와의 명령에 반하기보다 그렇게 부족의 규칙을 가짜로 가시화하는 전략 속에서 유지된다. 그런데 그의 비극은 그의 신념이 통과의례 속에서 결국 파기되는 순간을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 세계의 작동 방식을 그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도래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는 세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곧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예외로 남고자 하며, 다만 그 세계가 하나의 원리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취약해질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신념은 그를 주체적인 것으로 만들기보다 그의 비주체적인 양상 속에서 만들어진다. 곧 그의 연약함은 일종의 퀴어적 존재로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그것은 그것에 입각한 그의 정체성을 주조한다. 그것은 또한 세계가 만들어 낸 신념 체계 안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세계를 거부하기이면서 또한 세계 안에서 사라지기이다. 따라서 그의 비극은 그 자신으로서 발화 이전에 그의 정체성의 발각이 우선할 것임에서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취약함으로부터 견디면서 그것을 동시에 지켜내야 한다.

     

    2

    모울은 나일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을 지표로 보고 그것을 인지하고 감각하며 대화할 수 있는 방식을 다만 듣는다. 또한 모울은 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늑대의 사회가 강한 수컷이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협력 관계로써 구성되는 유연한 사회라는 사실을 다만 듣는다. 그것은 모울을 또 다른 주체로 각성시키고 변화를 끌어내는 동력이 되는 게 아니라, 다만 이 세상 너머의 가능성 속에 모울의 다른 삶의 모색 가능성을 ‘너머’에서 기입하는 데 가깝다―〈이 세상 너머〉는 곧 ‘저’ (다른) 세상을 확정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경계를 재기입하는 차원에서 주체의 변화 가능성을 단지 시험하고자 한다, 또는 확신하고자 한다.

     

    모울의 세계와 욘의 세계는 서로를 반향하며 우리의 세계를 성찰하도록 한다. 모울의 삶은 욘의 학교 안에서 성찰의 계기를 입는다. 나일과 모울의 부족이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늑대라는 신념을 갖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면, 학교에서 동물 에튀드를 연습하는 학생들은 대개 동물에 관한 인간의 우월함에 대한 신념을 갖는 가운데 그것을 다분히 기능적으로 실천한다. 반면, 욘과 모울은 그것이 예술적 차원, 곧 움직임이 아니라 춤으로 변용되는 지점에서 각자에게 순수한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먼저 자연―모울―에게서 오고, 문화―욘―로 되먹임된다. 욘을 통해 모울은 아름다움을 인지한다, 자신을 가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말이다.

     

    학교는 다양성의 공간이며, 여러 의견을 청취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공존하기보다 뒤섞이는 혼돈의 질서 아래, 중립적인 선생의 존재는 그럼에도 학생들을 올바른 앎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사실 선생은 나일/모울의 아버지 버크와도 과거에 관계가 있었으며, 그의 딸인 모울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세계와 늑대족의 세계를 절대적 차이로 구분하기보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동전의 양면임을 알고 있다. 늑대족이 전적으로 인간과 다른 종족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반동의 차원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여전히 인간으로서 겪는 모순적 삶의 간극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 없음의 상황 역시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의 행위 양식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음이 아니라, 인간의 새로운 표현과 변용의 욕구로서 예술적 시도라는 지점에서 재의미화된다. 곧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너머의 세계로 진작되고 나아갈 수 있음의 존재 추구의 양식을 개발하는 것에서 모울의 늑대-되기는 의미를 획득하며, 그것은 생존의 사투라기보다 아름다운 몸짓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늑대로 되돌아가는 의무가 아니라, 늑대가 되고 싶은 것에서 온다.

     

    모울은 선생의 조언에 따라, 그의 자신에 대한 지시에 따라, 스스로를 재인지한다, 스스로에게 재접지된다. 그것은 곧 그가 늑대가 아닌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식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영점의 좌표로 두고, 늑대도 인간도 아닌 그 자신을 고유한 존재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늑대라는 특이성의 경로를 산출하는 영점이 되는데, 그가 그렇게 늑대-기계가 되는 건 그가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식해서라기보다 인간을 재배치, 재연결하는 구멍들의 집합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야생으로 돌아가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으로서 그러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새로운 너머로서 자연이 자리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며, 가족적 관계에서 연장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모울을 찾는 와중에 들리는 늑대의 울음에서 늑대로서 모울을 식별―그것이 모울을 늑대로 식별한다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더는 모울을 모울로서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듯이 늑대족의 이념형으로서 늑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모울은 완벽하게 늑대가 된 것일까. 그것은 나일이 말한 “본능”의 소산일까. 거기에는 어떤 허무함도 없어 보이는데, 반면, 그 직전 욘의 떠남에는 주체의 공백이 있다. 모울이 늑대-인간으로서 각성한다면, 욘은 학교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며, 삶의 동기를 찾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1년 휴학 동안 그 도시의 화려한 삶과 그 무대를 그리워 하고 갈망하는 것일까. 그가 이곳을 떠나면서 어떤 해방감을 느끼지도 그것을 향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그것이 불안정한 삶―또는 그 반대의 차원에서의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선택이어서보다는 그가 아직 자신의 주체적 위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아니, 사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가 결코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꿈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숲에 있다 인간 사회로 나왔다 다시 돌아갈 때 도시라는 영원한 간극을 안고 살아가게 된 하겔의 위치와 조응한다―이는 버크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그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흔적으로만 남은 하겔은 나일로 투사된다. 반면, 모울은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숲에 대응시켜 그 둘을 분별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 사회의 규율은 춤이라는 예술적 인식의 근거 아래 자신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수렴될 뿐이며, 그것이 오히려 이전의 삶을 강화한 형태로 그의 미래적 삶을 예기한다.

     

    버크가 자신과 같이 늑대족에서 나와 인간 사회를 경험한 하겔을 비판함이 인간 사회와 교류하며 늑대족을 소비의 대상으로 ‘왜곡’시켜 갔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늑대족으로 완전히 고착될 수 없는 진실을 그가 담지했기 때문 아닐까. 곧 그가 다시 늑대족에 정착하고자 하는 합리화의 명목으로서, 인간 사회라는 삶의 또 다른 근거에 대한 부인의 기제를 폭로하기 때문 아닐까. 하겔의 실패는, 늑대족에서의 적응하지 못함은 원인이 아닌 결과에 가까운데, 곧 그가 늑대족의 사회 체제를 그가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가 다양성의 관점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너머〉는 마지막에 모울의 늑대 울음을 통해 진정한 늑대족의 이념을, 늑대-되기의 주문을 실현한 듯 보인다. 다시 대도시로 떠나간 욘의 미래상이 불투명하고도 찜찜하게 남는다면―그것은 선생에게 의심된다.―, 모울은 아버지의 법도, 과거의 트라우마적 기억도, 세계의 불안정한 경계도, 정체성의 균열도 갖지 않은 채 순일한 하나의 세계로 진입한 듯 보인다―그것은 선생의 승인 직후에 펼쳐진다. 그것은 사실 희망적 비약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의심도, 혼란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사실에서 말이다.

     

    선생은 모울의 꿈이, 곧 도시의 무대가 주는 자유로운 춤의 실천이 환상일 수 있음을 인지한다, 아마도. 또한 숲에서의 실천이 사회적 기율 없이 진정한 자기 실현의 춤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꿈꾼다, 아마도. 따라서 그는 모울이 겪을 사회라는 엄중한 기준의 세계와 사람들의 시선과 잣대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의 반대 지점에서, 숲이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는 더 나은 길로 판단하는 것일까, 늑대족의 사회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모울의 마지막 모습은 자연과 인간, 신화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적 분기로서 갈음되는 현재의 문명으로부터 도약할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 것일까. 〈이 세상 너머〉는 그것을 단지 ‘너머’로 남겨둔다.

     

    김민관 편집장

     

    *만든 사람들

    출연: 권은혜, 권정훈, 김재민, 김원정, 류원준, 박은경, 유채온, 장석환, 정유경

    /연출: 김예은

    각색: 황나영

    조연출: 정예진

    드라마투르기/무대감독: 장한새

    무대: 한성주

    무대제작: 올벗: (대표: 남기상)

    소품: 김예슬

    조명: 최인수

    조명크루: 배유나, 전수진, 양가영, 신희, 임창욱

    의상: EK

    음악: 베일리홍

    사운드: 이현석

    안무/움직임: 유동인

    프로듀서: 이정연

    프로듀서보: 우동완

    그래픽디자인: 정김소리

    사진: 서민아

    도움: 이창균

    주최/주관/제작: 네이키드블루스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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