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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에 대한 주석: 새로움과의 시차로서 주어
    REVIEW/Dance 2026. 2. 24. 19:59

    “거의 새로운 춤”은 새로움에 가깝지만 새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의 무용과의 관계가 새로움에 대한 강박 일변도로 흘러왔다는 전미숙 안무가의 말은, 언제까지 무용수로 무대에 설 수 있을까에 대한 조바심 혹은 걱정과 같은 정서를 안고 살아온 최수진 무용가의 발화 이후에 출현한다.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다만 마흔이 채 되기 전―39살이 되었다고 하는 최수진의 언급―의 무용수가 이미 그러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의 뉘앙스로부터, 65살이 되어서도 역시 무대에 서고 있는 자신의 삶의 차원에서 언제까지 무대에 설 수 있느냐의 부분은, 섣부르게 단정할 수 없는 영역이며, 너는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여지를 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반면, 여기서 여전히 새로움의 의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거의 새로운 춤〉은 전미숙이라는 매개자가 중간중간 무대에 출현해 발화하는 가운데 네 개의 “옴니버스”식 무대가 출현하고, 그 각각의 무대는 다른 안무와 무용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무대들은 무용에 있어 새로움에 대한 기준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거의”는 새로움이 외부의 기준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상쇄하려는 자기 안의 강박적 전제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 새로움에 대한 조건을 적당히 벗어날 수 있는 면피의 전략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39살과 65살의 거리가 분명 멀지만 좁혀질 수 있다는 것, 거기에는 자신보다 더 큰 삶의 힘 같은 것이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전미숙의 발화가 거꾸로 새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유예하는 것과 같은 약간의 방향 전환과 같은 것이다.

     

    새로움은 필요한 것일까. 이는 “현대무용”을 전공한 전미숙의 숙명 같은 화두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시간 지층이 뒤섞이고 떠오르며 침범하고 잠입하는 동시대로 이 작품은 진입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오히려 과거의 주술에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닐까. 곧 끝없는 현재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새로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차원으로 떠오르는 것―근원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이 역사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를 살피는 가운데 비로소 새로움의 의미를 획득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아카이브와 역사주의의 차원, 망각되는 것들의 재호출 등이 중요할 것이라는 점에서, 전미숙의 근현대적 궤적이 파편적 현재들의 종합으로 정리된다는 점은 아쉬운 지점이다. 〈거의 새로운 춤〉은 크게 두 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하나는 미래의 기술이 보여주는 춤, 그리고 전미숙이 보여주는 언어의 개입을 통한 무대 구성의 연장이다. 이는 모두 후자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이를 위해 “발제 안무”라는 새로운 개념이 고안된다.

     

    그럼에도 첫 번째 김보라 안무의 무대 “춤에 대해 춤 하기; 공연자 관점으로 보기”가 그에 상응한다. 출연한 김보라, 박상미, 최수진, 최낙권 모두 말과 움직임을 뒤섞는다. 세 번째 무대인 “춤과 노동 사이;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안무적 고찰”의 일부에 김보라 안무가가 크레디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서두를 신창호와 함께 여는 장면의 일부가 그러하고, 네 번째 무대 “새롭게 포맷되는, 오래된 춤과 새로운 설정의 공존”은 발제보다는 차진엽과 전미숙 안무가의 대담 형식에 가깝다. 두 번째 무대는 말이 없는 가운데, 일종의 무용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돌아가는 무대 위에서 일상 움직임을 소화하는 다섯 명 각자의 몸짓은 기억의 재생이라는 풍경이라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무대 역시도 포스트 휴머니즘적 이후, 안무에 대한 예시가 삽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거의 새로운 춤〉에서 전미숙은 춤이 제시되고 지시되는 감각을 주어주는 서술자로서, 그로부터 분기되는 춤들은 일종의 전거이자 자료가 되는데, 여기서 춤은 비판과 고찰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 새로움이 정의의 차원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거의’ 새로운 춤은 춤에 관한 메타 언술의 정교함을 띠고 있으며, 그 주어의 강한 확신과 논리를 수반하고 있는 대신에, 새로움과 먼, 노장의 새로운 것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의심이며 시차, 불확실한 읊조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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