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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노 세갈, 〈이 환희〉: 신체에의 음악적 가시화 또는 음악의 신체적 (재)용출
    REVIEW/Dance 2026. 2. 24. 20:23

    [출처=http://obscenefestival.com/festival/programs/thisjoy]

    티노 세갈의 〈이 환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 "환희의 송가"를 포함한 베토벤의 여섯 곡에서 발췌한 곡들을 스코어로 재구성해 이행된다. 이는 두 명의 퍼포머의 노래-연주-움직임의 어떤 계열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4시간의 러닝타임으로 예정되었었다. 이 두 사람 안의 공유된 스코어는 음악의 어떤 분기들 아래 있으며, 그 음악에 대한 상호적 교환, 침투, 공명 등에 대한 약속과 합의를 위한 조건 혹은 기억이 된다.

     

    두 명의 퍼포먼스 중 마르게리타 디아다모에게 주도권이 있는데, 이는 지휘의 역할이 주로 그에게 이전되었음을 뜻한다. 계단 아래, 분리된 위치에서 그가 연주의 시작을 음가로 표현할 때 길게 늘어뜨린 “This Joy”라는 표제는, 결코 표제음악으로서 음악이 아닌, 이 정전으로서 음악의 순전함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균질함, 불순함, 퍼포머의 자율성을 부각하는데, 그와 동시에 이 음악의 흐름이 이 모든 것의 표면으로 장식될 것임을 드러낸다.

     

    이 확약된 음악으로서 언어는 몸짓과 조우하는데, 그것은 음악에 부가적이면서 내속적이다. 또는 부속적이다. 아니면 음악으로부터 자율적이면서 음악을 내속시킨다. 이 두 의존적인 지위의 상대적인 차이는 일정한 음악적 흐름이라는 선형적 질서에 따라 주로 결정되지만, 곧 전자의 양상이 대부분이지만, 절합된 음악적 단위들로부터 스코어가 새롭게 분절될 때 움직임은 노래 혹은 연주 자체를 추동하는 절대적 역량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후자의 예외가 도입된다.

     

    음악은 일정 정도 반복적이다. 이는 환희의 송가가 끝나고 다시 시작돼서라는 점에서 물리적 차원에서 그러하지만, 음악의 재현에 있어 신체적 한계를 수반하고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움직임의 재현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또한 신체의 소진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지적 차원에서 오는 필연적 한계로 보이는데, 음악에 어떤 식으로든 조응되는 더 많은 움직임의 산출이 공식을 따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는 그것을 알 수 없든 간에 움직임보다는 음악에 대한 주의를 먼저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곧 음악에 대한 주의로서 움직임의 진행은 내재적으로 소진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더 이상 움직임이 음악의 부속적 차원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움직임이 음악을 듣거나 재현하지 않는 차원에서 자율적인 어떤 사태에 이르게 됨에서 연유한다. 이는 앞서 음악과 움직임의 상대적 위치에서 후자가 주도하게 되는 상황과 어느 정도 상응한다. 하지만 이상적 차원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는지, 또는 그 이상적 차원이 어떤 다른 지점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을 판단하기 전에 음악은 어느 순간부터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음악에 대한 주의를 계속해서 이끌어갈 수 없는 인지적 차원의 한계가, 퍼포머에 내속적인 것인지, 관객에게 그러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다만, 음악-움직임의 초반의 경험으로는 음악이 멈추는 순간에서도 음악은 진동하고 있었다. 이는 이들의 초반 재현의 범주로서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 구성을 고려할 때 이들은 그 사이를 절묘하게 공진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곧 주도하는 악기의 차원 아래 다른 악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표현하지는 않더라고 적어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종의 잔여를 직접 주도적인 것으로 뒤집어서 형상화할 수도 있었고, 그 잔여를 이따금 끄집어낼 수도 있었다. 곧 잠재된 것과 현동화된 것으로 이뤄지는 오케스트라의 범주를 재현할 때 이들은 그 이행의 정도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두 가지 차원으로서 오케스트라를 가시화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 둘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표상되는 것 너머의 그렇지 않은 것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를 가지나 자율적 표상의 주체로서 그것을 가능성으로 떠안고 있는 이들에게 이는 ‘가정된’ 것에 가까운데, 그 가정된 것은 이따금 튀어나왔다, 우발적인 것으로 말이다.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것은 곧 그것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셈해지고 있음의 상태를 함께 추적해 나가는 것이 곧 음악을 듣는 것이 되는데, 이 음악을 듣기로서 이 연주-움직임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던 부분이, 후반에서 움직임만의 일시적인 세계, 또는 음악이 끊겨 나간 자리에서의 움직임만의 단독적인 세계로서 그 양상을 달리하는 부분을,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의 주의력 저하의 한계로서 해석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이 설사 맞는다면, 툭 튀어나온 그것은 표상되기 전의 것이자 가정된 것이자 표상되는 것의 질서에 틈을 내는 것과 같다. 곧 기존의 것에 삽입되었음의 경계가 표시될 때 그것은 가정된 것의 실체로 드러난다. 그것은 삭제된 것이 아니며, 비가시화되었을 뿐인 무엇이다. 어쩌면 이는 이따금의 아카펠라에서 비트박스로, 후반의 그로울링 같은 특정한 장르적 변화와 함께 그 음악의 틀을 구현하게 되면서부터 그 음악으로의 현전하는 몸은, 앞선 음악으로서 현전과는 거리를 두는 듯 보인다.

     

    노래하는 데에는 또는 순수한 음가를 재현하는 데에는 조음기관으로서 몸이 우선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음을 낸다는 것에 조응하는 몸의 기호가 부착되는데, 이는 대표적으로 손가락을 구불거리는 동작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음에 대응하며 또한 음에 동시적으로 그러하지만, 그 음을 내기 위한 차원에서 수행되기보다는 그 음이 구성되고 있음을 따름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곧 그것은 음을 나타내지만, 그 음을 실행하고 있음에 대한 인지를 전제한다. 그것은 그 음을 연주하는 이의 움직임에 배가된 동시에 그 움직임에 조응된 움직임이다. 곧 그것은 음의 ‘어떤’ 가시화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음가를 악기로부터 구현함을 이행해야 할 때는 신체를 음악이 아닌 악기라는 지지체로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때 악기-신체는 악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체의 발현이다. 일종의 공명통의 역할을 하며 나아가 그 음을 공간으로 확장하거나 굴절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악기는 공간 내에서 미세 조종 가능하며, 그것은 악기의 연주 위에 입힌 신체의 연주라는 독립적 행위로서 배가된다. 곧 안무는 악기로부터의 독립성을 그것에 대한 연주로부터, 그 연주에 의해 획득한다.

     

    이 둘은 서로 끊임없이 교신한다. 음으로, 눈으로, 곧 비가시화된 물질 차원에서, 가시화의 차원에서. 이때 소리는 상대에게 보내는, 상대의 응답에 요청해야 하는 신호로서 대화라는 코드를 전제한다. 거기에는 스코어의 어떤 약속과 명령에 대한 공통의 합의가 그 음악의 지배적 상관자, 주재자, 지휘자의 자리를 체현하며 오직 단둘만의 유대 공간 안에서 그러할 수 있음의 차원에서 조금 특별해지는데, 그것은 둘만의 조율에 대한 특권이 그 외부를 상정하지 않기보다 그 외부 자체를 포함하게 되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연한 틈새와 우발적 미끄러짐으로부터 연장되는 전체의 오차, 시차, 간격의 발생이다. 발신과 수신의 기제는 그 발신에 간격이 도입된다거나 수신에 지연이 생기거나 하면서 자율성의 구속이 나로부터 비롯될 때 선제적인 것, 또는 명령으로서 힘은 의미가 없어진다. 신체의 타자로서 자율성이 둘을 잠식할 때 스코어는 유보되거나 늘어뜨리게 된다. 대타자로서 안무자의 공백이 드러날 때 헛웃음은 그 균열을 황급히 메운다.

     

    그럼에도 그것을 봉합하려는 대신에 그들의 새로운 영토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그러니까 틀린 것이 아니라 철저히 달라진 상황에 놓인 것이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음악이 이 둘만의 고유한 상태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라는 것, 그 밖의 어떤 것도 그 안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완벽한 순서에 입각하기보다는 어떤 파편적인 것을 그러모은 것 정도로 충분히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부분이다.

     

    안무자의 지시, 음악의 온전함, 변형된 스코어는 선제적인 것으로서 이데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때 그 웃음은 대타자로부터의 자유를 확인하는 것이라기보다 대타자의 자리를 곧장 대체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곧 그에게 잔존하는 대타자의 그림자가 관객에게 전달되기 전에 스스로에게 그러한 규제가 처음부터 없었음을, 그러니까 이상할 것 없음으로 대체하기 위해, 웃음으로써 그 틈을 무마하는 것이다, 거의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이때 관객은 자유로워지기보다 음악이라는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그에 대한 강박적 구현의 압박 아래로부터 일시적인 해방을 맞는 동시에, 퍼포머의 웃음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바깥으로 인식하면서 말이다.

     

    ‘이 환희(This Joy)’는 동시대적인 것―contemporary―으로 명명된다, 일시적인 것 너머(로부터) 아직 (당도하지 않은) 무엇―yet beyond temporary―이지만, 그러한 마니페스토의 간격에서 조금 가까워질 수 있다. 또한 〈이 환희〉는 일종의 스코어로서 이전 다른 ‘This’로 시작되는 작업들의 계열 아래 속한다. 곧 아카이빙되며 과거화되어 너머의 시간에 도달한다고, 도약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비약일까. 일시적 순간들은 그것이 수행되고 있음의 차원에서 분명히 현존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것은 파편의 시작과 매듭, 파편-스코어의 대전제에서 기인한다. 신체의 소진이라기보다 신체적 소진이 연장된 ‘신체적’ 스코어의 수행 말이다. 그리고 이때 웃음은 그 파편의 외재적 솔기로서, 비가시화된 안무의 실체가 탄로됨에 따른 방어적 산물이겠다. 웃음은 또한 스코어의 한계가 아니라 스코어가 그런 합 맞춤의 과정에서 만들어졌음을, 곧 예기치 않은 우발적 몸의 침입이 스코어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스코어를 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기보다 선취한다.

     

    결과적으로 〈이 환희〉의 가장 인상적인 건, 이 둘의 놀라운 신체 움직임과 테크닉, 긴 시간의 지속, 둘의 호흡과 상호 작용, 그것에 전제된 스코어의 구성에 있기보다는 음악이 신체에 내속적이라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곧 〈이 환희〉는 음악에 따른 움직임의 측면에서 자비에 르 루와(Xavier Le Roy)의 〈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환희〉는 오로지 내재적 차원으로 음악을 승화, 각인, 배치, 기억, 용출해 낸다. 〈봄의 제전〉이 오로지 외재적 차원에 대한 신체적 대응으로만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 움직임이 근본적으로 의(구)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면―‘그것은 음악과 정확하게 대응되는가?’―이 있다면, 〈이 환희〉는 오로지 그 근거를 자신의 신체로부터 찾아오는 것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곧 〈봄의 제전〉이 음악과의 동기화로부터 근본적인 제약을, 그것이 지휘이든 춤이든 간에, 단지 수행으로 전화시키는 차원에서만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 환희〉는 음악을 신체로, 곧 신체로부터 또 다른 신체로 독립시킴으로써 이 음악적 변경을 신체 내부의 기전에서 동시에 자리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음악이 전적으로 사라진 자리를 신체가 갈음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 그 신체와 함께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차원으로 공명한다. 그러니까 〈봄의 제전〉이 가진 음악이 신체를 경유하며 확장되지만 단지 납작해질 뿐이라면, 〈이 환희〉는 신체를 경유하는 음악이 음악 자체를 재소환해 오며, 유령의 화성부를 결착하게 되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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