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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랑콜리댄스컴퍼니,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 이동에 대한 열망 혹은 제약과 변용, 축적에 대한 욕망
    REVIEW/Dance 2026. 2. 20. 14:11

    멜랑콜리댄스컴퍼니,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AminuteFilmJ[사진 제공=멜랑콜리댄스컴퍼니](이하 상동).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는 전적으로 이동성을 지닌 도구로서 몸을 재편한다. 이는 일종의 두 개의 런웨이, 두 개의 직사각형이 X자로 교차하는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두 개의 경로를 이동하는 흐름으로만 구성되는데, 다시 말해, 모든 움직임은 이동성에 기초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몸에 특정한 제약을 거는 걸 의미한다. 곧 전진의 한 방향성을 지속하기 위한 혹은 힘을 가하기 위한 하반신에 초점을 맞춘 신체 전반의 운용은, 좌우축의 움직임과 수직축의 움직임을, 나아가 그에 수반되는 유연성의 움직임을 모두 제한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의 배제, 비자율적인 기계 장치로의 단순화는 다양한 형상이라는 대치, 이행, 변주의 차원에서 상쇄되는데, 그것은 질적, 내재적 차원의 전개가 아닌, 일종의 분류학적, 양적 차원의 축적에 기초한다. 이는 쉽게 말해 이동하는 기계 장치로서 몸의 다양한 형상들의 수집과 조합의 양태로 표현할 수 있을 텐데, 그로부터 기승전결이라는 서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를 수 없는 상태를 맞는다.

     

    이에 대한 해결은 또는 구제는 음악적 차원에 있는데, 곧 단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신호음으로서 사물성을 지니고서 시간을 전개시키기보다 물화시키는 음악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틀’은 대략 서너 번 변화하는데, 그것은 형상의, 서사의, 의식의 전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대신에,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한 이음매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속적으로 의식을 어느 정도 곧추세우고 또한 적정하게 마취시킨다.

     


    이러한 음악이 결정적이지만 또한 최소한의 요건을 지킨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는 있다. 곧 음악은 지배적이지도 보조적이지도 않다. 음악은 움직임이 이동이라는 단일 서사로 귀착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 바깥의 출구를 봉쇄하는 역할을 한다, 내재적인 차원에서의 미소한 효과로서만 말이다. 이에 따라 둘은 상응한다, 일방향으로의 움직임과 점멸하는 음악적 전개의 움직임은 서로를 닮아 있다. 거기서 생겨나는 동시에 부정당하는 질문은 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동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곧 왜 하나의 강제적 효과 안에 잠식되느냐라는 것이다.

     

    중첩, 축적, 대치로서 반복의 기전에는 물론 이동 그리고 일정한 속도 자체에 대한 열망이 있다. 처음 시작 전부터 중앙부에 다리를 벌리고 우뚝 서 있던 남자는 단말마와 함께 쓰러지고 나서부터는 두 팔로 바닥을 짚어 이동하는데, 거기서 몸의 변경에 대한 결정적이면서 미소한 계기를 인물의 전사로 특정해 볼 수 있겠지만, 이후 그와 연결되는 부분을 찾기는 어렵다. 기원의 신화가 곧 망각되는 건, 또는 서사로 구조화되지 않는 건 속도의 열망이 오로지 강박적 차원으로만 안착되는 것과 조응하는 것일까.

     

    하나의 신체가 앞을 향할 때 그를 마주하는 두 신체가 누워서 뒤로 기어가며 그의 이동을 지지할 때, 세 개의 신체는 접합되어야 한다. 이때 그것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결착―이는 해체될 때 탈착으로 나타난다.―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일종의 변신 로봇 트랜스포머의 신체 전환과 확장이 지닌 장치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곧 자동차와 같은 이동 수단은 신체 연장적이면서 또한 신체 환유적이다. 또 다른 신체가 되는 것은 긴밀한 결합의 차원에서 또 다른 신체를 입는 것이기도 한데, 그 결과 생겨나는 다른 신체는 앞선 신체, 곧 본래의 신체에 대한 메타포를 그대로 이전하는 것이다―곧 자동차의 심장은 엔진이고, 자동차의 폐는 배기 시스템이다.

     


    앞선 이 이동의 욕망은 표층적 이미지의 계열 아래 결국 풀 수 없는 과제로 남는데, 미시적으로는 주체의 동력학을 탐색하지 않으며―앞선 시작의 고꾸라짐이라는 사건은 분명 이를 예기한다.―, 거대하게는 자본주의의 물류 시스템을 토대로 한 그 근본적 양식 자체를 성찰하는 지점으로의 통로 역시 봉쇄된다. 따라서 그것은 이중의 런웨이가 상정하듯 다양한 자동인형들의 패션쇼라는 일관된 형식을 성취하기에 이른다. 패션쇼 역시 기계적 리듬의 일정한 속도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통제의 메커니즘이 갖는 어떤 성취이자 쾌감이다.

     

    정말 다양한 이동물로서 형상이 구성된다. 또는 신체들은 그 다양한 형상을 입는다. 그렇다면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의 꿈은 무엇일까. 하나의 직선을 통과하는 변형된, 제한된 신체를 통한 (‘단일한’) 속도를 생산하는 능력일까, 이동 기계 되기가 갖는 순전한 정념 또는 정념 없음의 기계적 신체가 갖는 매혹일까. 전자가 자유로운/유연한 움직임의 감축을 가져온다면, 후자는 단일하고 단순한 움직임이 주는 내적 충만함/온전함의 확장을 가져온다.

     


    인간의 기계 되기의 과정은 다시 그것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과 스트레스의 차원을 거꾸로 가시화하는데, 사실 전반적인 과정은 그 경계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이행이자 변신을 경유한 분투로도 보인다. 곧 모빌리티의 매끄러운 이동과 속도가 주는 쾌감은 덜그럭거리며 신음하는 신체의 한계와 고통과의 접점을 이루는 것에 다름없는데, 이는 이들의 닫힌 기호를 보존하는 방식의 움직임 자체가 극한의 훈련 혹은 억압의 메커니즘에 동조하는 것에 가깝고, 카모플라주 의상이 보여주듯 군대의 고전적 제어 메커니즘이 갖는 극기와 조응하며, 그것이 전이된 피학적 태도로부터 오는 쾌감에 이르기 때문이다―고통을 제어하는 지점에서 오는 쾌감이라는 부산물은 그 고통의 최종 목표로 재조정된다.

     

    비인간으로서 절대적 차이는 인간의 고전적 학습 혹은 수행의 양태, 어떤 적확한 움직임의 틀에 맞춘 몸의 기율을 체현하는 것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트랜스 휴먼 혹은 포스트 휴먼의 미래적 차원의 존재론적 질서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에서 기계로의 승화, 기계가 지닌 역능에 도달함으로써 획득되는 존재의 숭고함은 인간의 하락, 인간의 비자율성을 담보로 한 존재의 우스꽝스러워짐과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기계에의 결착은 나아가 고착은 인간의 전적인 차이를 만든다기보다 인간의 순수한 변형을 구성한다기보다 인간의 한계-가능성을 테스트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데 가깝다. 일정한 속도의 이동 구간으로서 무대는 일종의 컨베이어벨트 안에 순수한 인간의 기계학적 공정이 이뤄지고 있음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빌리티 ‘상품’ 자체의 무한한 축적―일정한 유행 주기에 입각한―으로 자연스레 연장되는바, 이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열망과 그 기호경제학적 차원을 상기시킨다.

     


    결국,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가 담지하는 새로운 모빌리티 장치에 대한 아카이브적 열망은 그 상품들 자체에 대한 순수 외양에 대한 도착―그것이 이동 수단으로서 기능성을 충족하는 것을 벗어나서―의 결과를 낳지 않는가. 여기서 컨베이어벨트-런웨이는 일종의 이동형 진열장으로 특정화되는 것 아닐까. 객석 일부가 돌아감으로써 모빌리티는 극장 전반으로 확장된다.

     

    이 포드형 생산 시스템, 또는 새로운 이동형 상품이 채워지는 진열장은 이러한 구조 자체를 재가시화하는 회전, 그리고 그 전의 어두워지며 뿌애진 시야 공간을 주는 특수한 조명의 변화 역시 이러한 중단 없는 실행, 끝없는 욕망의 충족을 저지하는데, 스케이드보드가 도입되는 후반 말미에는 희미한 아코디언 소리―반복된 음악이 가두는 일정한 에너지의 분배로부터 멀어진―와 함께 X자의 트랙 가에서 그 보드 위에 탑승한 존재들의 움직임이 멈추는 지점을 바라보는 존재로부터 어떤 멜랑콜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관음증적 시선을 전도하는 별도의 시선이 구성됨으로써 생기는 효과인데, 이때 움직임의 동력이 자연 발생적으로 서서히 떨어지는 것과 함께, 존재와 존재의 거리, 곧 트랙의 거리 자체가 시간의 멀어짐을 보여주는 차원―그 전까지 트랙은 생기론적 사물의 이동, 그 증폭됨을 통해 시간의 솔기를 지워 냈다면―으로 재현상되면서 다소 드라마적이고 극적 차원에서 급격하게 욕망을 꺼뜨리고 해소한다.

     


    거기에는 앞서 셀러리를 꽂고 결합―아마도 진정한 비인간적 제스처가 있다면, 이 부분으로, 거기에는 자연적 생명력에 대한 희구와 강박, 그리고 그것의 어울리지 않은 절합이 가져오는 기이함이 있다.―하며 무대를 누볐던 그 흔적이 무대에 간직되어 있고 이는 무상함과 기괴함의 정서를 복합적으로 전달한다. 마지막의 남자의 멀어짐을 향한 어떤 기약 없이 뻗어 나간 손은 앞선 처음의 고꾸라짐과 어떻게 만나고 또 미끄러질까.

    곧 속도와 이동에 대한 열망은 무한한 새로움의 전치를 통해서 연장되다, 그것이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음의 교훈적 차원의 메시지로 뒤집히는 것 같은데, 이때 신체에 일으키는 사고의 순간과 그 이후의 변용이 어떤 실패와 충격의 효과를 재상기시키는 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무한한 동력을 갖춘 기계의 생명이라는 것 역시 서사의 허구에 포함되므로, 그것은 의지적이고 주체적이기보다 일종의 서사 자체의 구조를 가시화하며, 서사의 자연스러운 진리의 도래라는 순서에 입각해서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이 지점에서 〈모빌리티 : 테스트드라이브〉의 원 동력과 모티브, 정초의 단계를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결국 자동화된 존재, 메커니즘적 존재가 어떤 간극을 인식하는 존재의 정서로 이행할 때 그것이 어떤 서사를, 움직임을 예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어렴풋하나마 어떤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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