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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 돌파구, 〈아이들〉: 주체의 선택을 예기하는 미래
    REVIEW/Theater 2026. 3. 2. 21:02

    극단 돌파구, 〈아이들〉(루시 커크우드 작, 전인철 연출)ⓒ박혜정(스튜디오 에이치) / [사진 제공=극단 돌파구](이하 상동).

    극단 돌파구의 〈아이들〉은 쓰나미로 인해 원전 사고가 발생하고 그 주변 지역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로빈(권정훈)과 헤이즐(윤미경) 부부를 로즈(조어진)가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부부의 거주 지역이 방사능 오염의 위협을 받는 황폐화된 곳임은 주로 그 효과의 차원에서 드러나기보다는 대응의 차원에서 짐작되는 사실에 가까운데, 이는 초반에 전기가 일상 대부분의 시간에 들어오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강조된다. 전기는 이따금 일정한 시각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전기가 나갔음이 사고의 여파 때문으로 판단되기보다 굳이 이곳을 버리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부부의 선택의 몫으로 환원된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방사능 오염의 결과는 비가시적인 축적과 영향의 범주로서 눈으로 확인되는 결과를 즉각 산출하지는 않는다는 하나의 전제를 가정한다면, 그 효과에 초점을 두는 대신에 그 환경에 처한 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의 차원이 부상하는데, 거기에는 물론 그것이 특정 주체의 선택의 몫이라는 전제가 있다―가령, 우리는 로빈과 헤이즐보다 그들을 마주하는 로즈에 이입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선택이 인류의 어떤 시점에서의 보편적 조건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는 점이 〈아이들〉의 동시대적 방향성을 나타낼 것이다. 이들의 선택이 철저히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따라서 예외적인 차원에 속하면서도 애초에 어떤 환경을 받아들이는 차원의 선택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함’은 부부의 숙명과도 같고, 도시 문명과의 뚜렷한 거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선택의 몫이 외부인 로즈와의 관계에서는 화두로 떠오르는데, 이는 논의를 확장하기보다는 단순히 차이의 부분으로 나타나며 일별되는 데 그치는 것에 가까운데, 곧 그 차이가 절대화되기보다 상대화됨을 뜻한다. 여기서 로즈의 시선은 도시 사회와 문명의 이기와 거리를 둔 유별난 이들의 삶이라는 테마를 시차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는 로즈와 부부의 차이가 설득되거나 발화되지 않고 드러나고 보이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따라 부부의 몫은 일종의 환상을 대리하는 장면으로서, 우리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결부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미래 사회의 우리의 몫이며, 이를 매개하는 역할로서 로즈가 투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곧 미래라는 시점의 부부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로즈가 대신 맡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삶에 대한 메시지 전달의 차원에서 직접적인 계몽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다른 삶의 추구와 실천이 기꺼이 누군가에게 선택되며 소박한 삶의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음을 발전적 생산의 지상주의를 좇는 문명의 전제 너머로부터 길어 올리며 이를 실험과 시도로써 쌓아 올린다고 할 것이다―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차적인 구축이다. 샐러드 외에 특별히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전기 없이 생활하는 것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금욕주의적이고 절제하는 삶의 주요한 상징으로 부상한다.

     

    〈아이들〉은 특정한 삶의 환유로서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고 제시하며, 또 다른 삶의 정치성을 화두로 꺼낸다. 이는 로즈라는 외부의 타자성에 기인하며, 로즈는 시간의 물리적인 격차와 삶의 다른 방향이라는 지향의 차이로부터 그 타자성을 생산하는 인물이다. 곧 원자력 발전소에서 함께 일했던 과거의 역사를 불러오며 그것의 새로운 연결-접속의 장면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 곧 과거와 약간의 미래를 연결하는 차원이 현재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의 먼 미래를 대신해서 정치적인 선의를 구사하는 것임을 호소하는 로즈로부터, 극의 국면은 결정적으로 전환된다.

     


    로즈의 호소는 불완전(불안전)한 다른 삶의 가능성의 삶을 도피적이고 자적적인 삶의 국면으로 전치할 가능성을 부상시킨다. 노년의 삶과 젊은이의 삶의 시간적 거리를 양의 계산으로 가치를 평가하면서 둘의 삶을 차등 지으며 결부짓고 위험의 몫을 전자에게 떠맡긴다는 점에서, 로즈의 호소는 합당하지 않지만, 강한 설득력을 띠게 된다. 이는 부부의 삶이 상징계를 벗어나 있었음을 지시하면서 그 둘이 사회의 일원임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 둘이 자연스럽게 상징계에 통합될 것임을, 곧 원자력 발전소에서 젊은 일원을 대리하는 늙은 무리가 기꺼이 될 것을 예측하게 하고 또 급격하게 성사시킨다.

     

    따라서 〈아이들〉은 하나의 고정된 장소에서 그 바깥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갖는데, 로즈가 부부를 외부로 끄집어 내는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을 지탱하는 일상의 지침과 방식 들은 윤리에 따른 것이지만, 사회적인 또 다른 윤리는 그것들을 마치 ‘쓰나미’처럼 밀어낸다. 곧 〈아이들〉은 소재에 대한 (윤리를 다루는) 것이라기보다 철저히 (소재 너머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인데―이를 기후 위기와 연관 지어 다루는 건 이 작업의 수행성을 유예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을 때야 온전히 가능하다.―, 곧 인류의 재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인간의 일상 윤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느냐의 차원에 다만 부가적으로 지구 환경의 전면적 위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서사의 전개는 타자성의 장면―로빈과 헤이즐―에 타자성의 존재―로즈―를 전치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흥미로운 건 미래에 대한 어떤 시나리오로서 새로움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나 인류를 일시적인 위험에서 유예하며 구원의 서사를 구성한다는 것보다는 그 선택의 몫이 우리가 지구의 위기로부터가 아니라 여전히 인류의 한 구성원의 자리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인시킨다는 것일 것이다.

     

    처음 부부의 선택은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독해되지만, 시종일관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행위하던 로빈이 갑작스레 피를 토하는 모습에서 그 선택은 삶이 아닌 일종의 죽음을 선택하고 향하는 것이며, 죽음의 장면을 트라우마로 수용하는 대신에 그 광경에 동화되어 사는 걸 택한 것이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요가를 하고 절제된 식사를 하는 헤이즐의 모습은 그가 발전소에서 연구원으로 종사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 이후 드러나고, 원래부터 그가 갖고 있던 삶의 강박을 고스란히 사고 이후에도 연장함으로써 온전한 삶의 장면과 건강한 신체 조건이 구성될 것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 것과 다름없음이 드러난다.

     

    〈아이들〉은 하나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반나절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리얼타임으로 전개되는 장소와 시간의 긴밀한 협착을 통해 구성되는 극이며, 총체적 위험과 위협이라는 너머의 장소를 떠안은 하나의 축소된 지형으로서 집에, 외부의 존재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사건을 들고 옴으로써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는 그 장소의 의미가 환기되며 재조정되는 과정으로, 무엇보다 그 장소의 함의를 다각적으로 분화시키며 다시 쓴다는 점에서 밀도를 유지하며, 연극의 고유한 절대적 존재 조건인 장소에 대한 합목적적 유인으로서 극을 연장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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