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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2〉: 연쇄적인 이미지 기호들의 병치, 파국에서 쾌락을 맛보다REVIEW/Theater 2026. 3. 3. 20:23

극단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2〉(김현탁 연출)[사진 제공=성북동비둘기](이하 상동).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걸리버스 2〉(2025)는 영국의 풍자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의 4부로 구성된 『걸리버 여행기』를 모티브로 하는데, 〈걸리버스〉(2022)가 소인국을 다룬 1부를 가져온다면, 이번에는 2부의 거인국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4부는 차례대로 무대화되며 일종의 시리즈물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한다. 〈걸리버스 2〉는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걸리버스〉 자체와의 연관성을 맨 앞의 부재의 공간을 통해(서만) 구현하며 시작한다. 〈걸리버스 2〉는 〈걸리버스〉와 독립된 작품이며 바로 그 지점을 여기서 공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빈’ 형식으로서 인용이라는 점에서의 본질, 곧 공통됨이 성립한다.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배경음악으로 나오고 텅 빈 무대 위에 등장하는 건 관객과의 대화를 맡은 사회자,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건 공연을 끝마친 배우들이다. 이는 전 작 〈걸리버스〉의 끝(과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시작으로, 그 끝은 〈걸리버스〉의 부재를 잔여 차원으로 들려주며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걸리버스 2〉의 유예된 시작, 독립된 시점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유예의 시공간은 공연이 실제 끝났을 때, 공연의 끝에서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에 대한 형식적 유희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시적이고 반쪽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유희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대신, 내용상의 차이는 형식상의 실질로서 반복된다. 대중가요의 잔향 속에 견고한 춤의 끝없는 반복의 형식은 〈걸리버스〉의 반복이기도 하다. 그 잔향이 〈걸리버스〉를 불러오고, 다시 마지막 결말을 예고한다.
〈걸리버스〉라는 잔여는 또는 부재함의 시작은 (그 끝의 완성 직전까지는) 〈걸리버스 2〉가 엉뚱한 듯한 급작스러운 단락의 도입을 어색하지 않게 하는, 그 도입 자체가 하나의 극의 형식임을 알려주는 차원에서는 분명 중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끼워 넣기의 형식이 가리키는 순전한 내용은 관객의 시점과 참여를 한 차례의 도입을 통해 이미 다음 단계들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잔여가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극의 예시이자 표본이 된다. 그리고 부재하는 내용 아래 형식만의 온전한 투사―형식으로서 내용―는 오직 단 한 번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형식적 유희의 차원을 보여주는 최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반면, 이 빈 형식은 ‘걸리버스’의 표현 양식으로서 실질이(며 반복된)다.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갖춰진 무대 앞단의 의자들은 시작의, 두 번째 부분의 매개가 되는데, 이는 각하/전두환을 만난 대중의 경험들이 체현되는 인터뷰의 장소가 된다. 〈걸리버스 2〉는 역사와 문화의 이전 형식들을 가져오되 정동의 차원으로 재현한다. 미디어상의 역사적 추출과 문화의 인용 단계는 2차 재현으로서 표현적 실질로 변용되는데, 여기서 원본의 흔적과 함께 재현 양식으로서 제시의 성격이 뚜렷해진다. 곧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에 있어, 후자는 전자의 전유 차원의 성격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걸리버스 2〉의 역사는 유행하는 대중문화의 한 양식을 가리키며 또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 표현 양식이 기존의 것과 어떤 차이를 발명해 낼 필요성이 생겨난다. 거기에는 어떤 맥락적 전유의 단계임이 인지되어야 하며, 그 전유가 향하는 의도가 일종의 메시지로 파악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추출과 인용은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범주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파편들의 모자이크식 연결 방식은 그 자체로 미디어의 지형이자 우리의 산만한 의식의 체계를 연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산포된 소스들은 어지럽게 소용돌이를 이루며 걸리버의 기상천외한 세계들의 조우 속에서 혼란스러운 지각으로 이전된다.
역사와 미디어, 재현의 삼각 편대를 엮어내는 차원에서 〈걸리버스 2〉는 거침없이 행보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평가―내용―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표현 양식이 주는 지각 체계의 성립을 위해서 자리하는 듯 보인다. 전두환이 각하이던 시절, 하나의 고유명사로 하락하기 이전에 그의 실물적 존재감이 체현되는 사람들의 실존 경험담에는 놀라움과 신기함, 나아가 신적 존재에 대한 알현의 의의가 내포된다. 이는 미디어의 차원에서 재현에 대한 재현, 레트로 코드 자체에 대한 재현이기도 한데, 전두환이 아니라 전두환에 대한 인지적 차원에서의 과거 질서로 돌아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후 반복될, 이 재현 기계의 무의미한 몸들의 집단적 향연 속에 겪는 관객의 기이함은 동시대적 착란 상태를 가리킨다. 현재, 전두환은 제대로 처벌받지 못한 채 역사의 흔적이 되었고, 그것은 그 역사를 도려낸 역사의 유희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재현, 과거의 전적인 낭만주의적 수용의 재현 방식, 곧 레트로 열풍 자체 속에 처리된다. 곧 〈걸리버스 2〉의 전두환의 부재함의 기호는 전두환을 괄호 친 미디어의 재현에 대응한다. 전두환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전두환을 제대로 명명하지 못한 역사를 외설적으로 누출한다.
《개구쟁이 스머프》의 오프닝곡과 함께 두건을 쓰고 돌을 가공하는 여직공들을 보여주는 ‘착해진 가가멜’ 편은 돌이 아닌 그 속에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홀로 알고 아즈라엘을 경유해 이를 수탈하려는 피식민지의 행위를 자연 상기시키는데, 앞선 〈사계〉의 재봉틀 장면, 곧 근대의 여성 노동자의 장면의 전유 위에 다시 포개진 이 대중문화의 동화는 부재하는 대타자의 흔적을 굴절된 콜럼버스와 같은 제국주의의 ‘새로운’ 발견의 정동 속에 끼워 넣는다. 정렬된 집단을 조감하는 시선이 이를 반영한다. 반면, 가가멜을 퇴치하는 동화의 일반적인 공식 이후에 따르는, 노동을 선택하는 이들의 주체적 결정은 의미 없는 노동에 대한 관성으로의 회귀라는 지점에서 순수한 긍정이 아닌, 부정에 대한 긍정이며, 따라서 공허한 울림을 안긴다.

이 낯선 여행을 하는 순수한 악의 정념을 지닌 주인공의 시점은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의 노래 아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롯데의 역할로, 그와 함께하는 아즈라엘은 베르테르로 바뀌는데, 이 둘의 연관은 ‘괴테’라는 기호 아래 인접되는 기표들의 산출로, 이는 궁극적으로 각하에서 굴절된 가가린을 거쳐 롯데라는 한국 대기업의 대타자를 경유하기 위한 포석이다. 곧 롯데 기업에 대한 언어 유희의 차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롯데가 소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르테르의 롯데를 향한 사랑에 대한 표현은 〈걸리버스 2〉의 형식인 이미지의 환유로써 산출되고, 여기서 포스터에 나오는 이미지가 구성된다. 사다리 위에 두 팔을 달고, 맨 위로 손을 뻗쳐 달을 들고 있는 형상은, 다카라즈카 극단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배경이 된다. 달-인간과 그것을 실제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형상에 대한 원리가 실제 〈걸리버스 2〉의 근본적 형식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곧 배우들은 역할로서 자리 잡지 않고, 노동의 쳇바퀴를 수행하는 자로 부유하며, 끊임없는 환유의 알레고리 속에 대체 과정을 갈음하는 텅 빈 기호가 된다.
이미지의 기호 연쇄 작용 아래 배우들은 체스의 말들이 된다. 그리고 이는 맨 앞의 구술 인터뷰를 경유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라는 형식을 충족한다. 그리고 마지막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반복된 응원 춤의 텅 빈 형식이 보여주는 몸의 투명한 질서, 곧 부재하는 역할 속에 노동하는 몸의 충만함만이 공허하게 무대를 장식하는 것으로 수렴한다. 배우의 단단함은 그 반복을 정확한 틀의 산출로 유지하기 위한 순전한 고투로, 거기에는 어떤 정념도 투영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의 캐릭터들의 대결 구도는 자막의 원본과는 다른 한국 과자들을 일본어스러운 문체 속에 나열하는 것으로써 전유되는데, 다카라즈카 극단의 공연이라는 이미지와 일본어스러운 것, 곧 닫혀 있는 문화 기호의 외설성―다카라즈카 극단은 2005년에야 비로소 처음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은 과자라는 계열체의 언어 유희 안에 새어 나온다. 결국, 후자의 사실상 텅 빈 기호는 전자를 봉합한다는 명분을 선사한다.
이전의 베르테르의 롯데는 과자의 브랜드로서 암약하다 롯데 야구팀의 응원가와 치어리딩으로써 부상한다. 군부 정권의 시대의 시작과 그것이 전화된 사태로서 3S 정책의 일환으로 적극 전파되었던 프로 야구의 결말―다시 말해 지배 주체의 변이된 성격으로서 롯데가 형성하는 문화로 대체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략적인 〈걸리버스 2〉의 서사의 원환은 거인의 형상의 자리에 한국 사회의 통치 체제의 변경과 무의식적 지배의 주체를 위치시킨다.

달-인간의 오브제는 두 개의 이미지로 분화되며, 롯데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의 기호는 자본주의의 유사한 욕망의 기호로 전화된다. 먼저 극장 안쪽에서 소개하는 중개업자를 카메라가 따라 가는 촛대 타워―롯데와의 최소한의 발음적 유사성에 기초를 둔다.―에 대한 소개는 극장 곳곳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전유는 아이러니한 사기 수법의 현실로서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곳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소개될 때 부추겨지는 욕망의 과잉적 산출에 접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홈쇼핑 광고로 이어진다.
곧 그곳이 비좁다는 것은 그곳이 초라하다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데, 이러한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옥죄는 미로로서 공간의 형상화는 접근할 수 없는 상상의 이미지, 포스터 상의 초고층 빌딩 롯데월드타워의 이미지에 대한 상상이 긴박한 느낌 아래 실제화되었을 때,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 전체는 여전히 볼 수 없고 따라서 향유될 수 없는 무엇이라는 불가능성의 기호로 연장되지만, 그 감각은 꽤 불편하고 불쾌한 것임을 드러낸다.

먼저 거대하고 즉물적인 이미지의 차원에서 분화된 롯데는 미시적이고 점착되는 이미지의 차원에서 반복, 변주되는데, 과거 버전의 롯데 칠성사이다 병 이미지로 만든 팻말을 착용한 배우들에 둘러싼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두 명의 배우는 이미지로 잠식된 불투명한 초상이 된다. 사이다병이 아닌 평면의 기괴한 반사판의 이미지의 지배와 응시는 마주하는 신체의 가시성을 방해하거나 잠식하며 수많은 눈의 도열로 기존 신체와의 혼동을 초래한다. 텅 빈 무대의 아이스링크는 순전한 존재의 일의성을 함축하며 생명력을 상정한다.
그것을 둘러싼/지배하는 시각적 표상의 불투명함은 비가시적 차원의 사운드로 대체되는데, 부재하는 각하의 환유로서 군사 정권의 총알로써 죽음이 가시화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영원히 제대로 죽지 않은 이를 죽은 이로서 신화화하며 승화하는 시작 대신에, 그에게 겨누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로 소급되는 동시에 그 이전의 시간으로 소급되는 이중의 선회를 구성하는 건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그 결말의 위상은 지배 주체의 상징적 위치의 부재를 승화하는 대신 소거하며, 죽음에 대한 부인―그를 살아있던 인물로 만드는 행위―을 부인한다. 곧 그는 죽음으로 기입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기입하는 존재다!

직전, 자본주의 팻말이자 진압 방패였던 보호막을 벗겨낸, 죽음의 (여전히 비가시적인) 지배적 형상에 대응하는 존재의 이 기투는,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경쟁 스포츠의 대열로서 중첩된다. 곧 피겨 스케이팅의 시작을 알리는 반복된 총성 사이에서 하나의 존재만이 살아남게 되고, 이는 오직 죽음들이라는 공통의 토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한 존재들과 살아남은 존재의 현격화된 대비로서만 거듭난다.
따라서 자본주의 방패는 그것이 하나의 이미지였던 것처럼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도 총알을 막고, 또한 권력의 총성은 뒤늦었지만 기원의 근거로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이는 야구 팀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응원 현장의 결말이기도 하다. 학살의 현장은 피겨 스케이팅과 소리로써 맞물리고 야구와 상의만 야구 복장이라는 물리적으로 결합되는 이미지로써 맞물린다―피겨 스케이팅은 야구 응원의 동작으로 변화한다. 곧 학살과 경쟁의 현장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울림 속에 시대의 정동을 피어 올리는 것 안에서 승화된다―또한 그것은 현장이 아니라 현장을 매개하는 것에 가깝다.

곧 생존의 양식이 삶의 유희적 양식으로 대체될 때, 폭력의 기원은 전치되고, 거대한 소리로부터 현장이 주조된다. 그 안에서 고유한 단독자의 비극적 형상은 의사 연기의 차원으로, 이벤트의 일환으로 거듭난다. 이는 ‘절합’된 이미지-사운드의 계열을 통해, 하나의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는데, 여기서 시간성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점조직들의 네크워크로서 분포하며 서로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건 야구로의 환원 곧 야구로의 승화가 아니라, 야구라는 승화의 기제가 이전의 폭력의 트라우마를 봉쇄하고 있었음을, 비가시화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이 장면은 진정 희비극적이다.
커튼콜 이후에도 살아남은 일자는 계속해서 춤을 춘다. 그것은 죽음의 형상들을 떠안은 산자의 처절한 고투 아닐까, 분쇄할 수 없는 과거의 이미지들을 안은 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응원의 형식으로 전유되어 수용할 수 있는 진정성의 차원으로 참작된다. 그 진정성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대가를 온전히 수용하는 몸짓인가, 현재를 뚫고 과거를 향하는 반동 어린 애도의 몸짓인가. 그것의 독보적인 차이는 후자를 감싸고 있는 전자의 표피를 거부한다.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균열 없는 증언은 살아남은 자의 애도하는 몸으로 체현되며 전도된다. 그것은 그렇게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하며 번복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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