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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에스퍼의 빛〉: 서로를 반향하는 두 개의 분리된 장소REVIEW/Movie 2026. 3. 2. 20:28

정재훈, 〈에스퍼의 빛〉[사진 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상동). 〈에스퍼의 빛〉은 눈 덮인 산에서 빵조각들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온 이능력자 이마 기쉬에게 아이들을 돕는 행위는 이제 그만할 것을 충고하는 동료의 메시지와 함께 그가 그 고립된 아이들에게 생존 규칙과 몇 개의 통조림들을 나눈다는 두루마기 용지에 쓴 편지가 온라인상의 트위터 자막으로 번역되면서 일상 현실이 출현한다. 이 둘의 간극, 두 세계의 장소성은 봉합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그 순서상 이마 기쉬로부터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영화적 긴장감의 무대로부터 일상의 무미건조한 태도로 나아가며 균열을 일으키는 이 장면은, “TRPG를 온라인 가상공간인 트위터에서 플레이하는 10대 청소년들의 ‘자캐 커뮤(자작캐릭터커뮤니티)’를 기록”한다는 영화 설명과 같이, 오직 현실과 이야기, 이세계물의 세계를 작동시키는 현실의 플레이어들의 일상과 반대로 이세계물로 옮겨간 그들의 캐릭터들이 그리는 서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양립된, 사실은 하나의 세계는, 곧 이세계물의 ‘현실’에서 이세계능력자들의 고립과 온라인상에서 하나의 내밀한 커뮤니티를 이루는 단독자들로서 고립의, 오직 병행이라는 형식으로만 전개될 수 있는 두 세계를 하나로 종합하는 건, 일상의 아이들이 투사하는 가상의 세계가 그들에게 투영되는 하나의 심리적 공간이라는 점을 인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돌아오면, 이마 기쉬로부터의 메시지는 거꾸로 그들이 이마 기쉬에게 체현하는 자신들의 메시지이며, 자신들이 만드는 세계 안에서 그들에게 그 세계의 일부로 돌아오는 메시지이며, 동시에 그들이 구성하고 그들을 구성하는 심리적 상관물로서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가상의 세계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세계 안에서 (그것은 그대로 보존된 채) 무엇보다 심리적 추이로써 전개되며 각인되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게임의 고립이라는 내용은, 전제는 오로지 일상의 독립된 존재들의 감정 이입의 근거로서, 일상의 아이들을 경유하는 장소로 둘 때 의미화될 수 있다, 이것이 ‘가상’의 세계를 횡단하며 굳이 그 밖의 세계를 단지 플레이어의 일상으로 “기록”하는 영화의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영화의 시작 단계로부터의 잔여물이 아니라, 영화를 비로소 시작하게 하는 동기이자 매듭점이다. 이를 경유함으로써 생존의 고립이라는 서사는 심리적 고립의 메타포로 형질 변환된다.

어떻게 보면, 〈에스퍼의 빛〉은 로케이션에 구심점을 둔 영화로서, 영화 속 장소들을 실천하는 데서 멈춘다, 또는 그 실천에 급급하다. 장소는 거의 모든 것이다, 일상이 일상의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그것이 가상 너머의 실재적인 다큐멘터리적 조각이라기보다는 이세계의 한 대응 방식으로 혼동될 때, 곧 이세계로부터의 분화로 (오)지각될 때 거꾸로 그들이 그 일상의 작은 틈으로부터 (유일하게) 의미화될 수 있는 것처럼, 일상이 일종의 가상으로 ‘재’도입되는 절차에서 두 세계의 양립을 하나로 통합할 때만, 곧 영화가 목적하는 바에 따라, 두 세계는 온전하게 하나의 계열로 완성된다. 플레이어-캐릭터의 통합된 세계는 플레이어-아이의 실존적 양식을 비추는, 전도된 가상으로서 일상에서 수렴한다, 곧 가상을 보는 이에게 드러나지 않는 가상성과 그 배경으로서 일상성의 분화되는 장면으로.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은 굳이 스케이트보드를 하는 플레이어의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길게 붙잡고 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앞을 보며 마침내 플레이어가 온전히 캐릭터를 대체하게 된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따라서 앞선 영화의 설명은 결코 영화를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며, 영화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해하게 만드는데, 이는 영화를 보며 맞닥뜨리는 앞선 곤궁을 영화의 필연적 태도이자 의도로, 그러니까 합목적적 완성의 차원임을 수용하지 않은 결과다. 일상이라는 견고한 장소와 함께, 가상의 세계가 찾아가는, 또한 고립에서 사회가 아닌 장소들로 나아가야 하는 필연적인 서사의 차원에서 선택지로서 제시되는 장소들은, 캐릭터들을 단지 그 위에 올려둔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마치 플레이어들의 일상이 그들의 독립을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 이 장소들은 현실로부터 고립된 캐릭터들의 장소로서 의미화되는 데서 나아가, 근본적으로 그 장소가 다듬어지지 않는 장소 그 자체로서, 필터나 색감 보정, 때로는 극단적으로 컨트라스트를 높이거나 화질이 저하되게끔 촬영하거나 하며 하나의 배경 이미지로 전유되는 가운데, 그 ‘위’가 아니라 그 경계의 ‘형상’으로 단지 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영화가 일상을 전유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핍진한’ 일상이 거꾸로 그들이 이세계인으로 혼동되지 않게 만듦으로써 전도된 혼동을 영화의 일부로 이해하게 만든다면, 그러니까 장소를 꾸미거나 지배하지 않고, 그 장소와 인물이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동시에 일상을 비워내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그들의 고립으로 강조할 수 있는 자연의 장소들을 전유하는 방식은, 대단히 작위적이고 허술하다는 점에서, 거꾸로 플레이어들의 장소 없음, 또는 장소의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그 일상과 비교 가능한 견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선택지들의 하나로 무작정 찾아간 그 장소의 낯섦은 플레이어들의 안온한 일상의 대척점으로서 적당히 불편하면서 적당히 이질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애초에 동화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장소들이 일상과 도시 바깥의 비문명적 자연으로 표상되는 지점에서 집단의 행렬이 가장됨은, 그리하여 불완전한 공동체의 형상으로서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휴대폰을 들고 각자의 집에서 홀로 게임의 서사를 구성해 나갈 때 이 전지구적 편재성, 곧 그가 처한 장소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하나의 생성하는 창이 접속한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의 반대급부로서 주어지는 것 같다.

여기서 장소는 절대적인 하나의 매체인데, 그것은 그래서 우리가 휴대폰 없이, 휴대폰과 연동되는 세계의 또 다른 번역 없이, 정보나 좌표 없는, 따라서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 막막한 세계의 환경을 헤쳐나가야 할 때, 어떤 공통점 없이, 우위 없이 그저 하나의 출구를, 미래를 찾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결속의 지점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 장소는 도시가 아닌 동시에 의사-자연적인 것, 자연과 같이 보이나 자연이 아닌 것으로서 주어진다. 이는 결코 야생의 차원이 아니며, 오히려 도시화되기 직전의 장소이거나 도시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이후의 장소에 가깝다. 거기에는 생명의 해독 불가능한 기호 대신, 기호로 변용된 생명적인 어떤 것만이 있다. 그건 미션 클리어의 차원에서 임시적으로 놓이는 게임의 산물이다.
따라서 연대는 다시 앱으로 소급되며 서사의 문자적 생성 공간이 여러 차원의 시뮬레이션된 공동 환경의 일정한 표상들로 발현되었음이, 그것이 일종의 환상적 장면들로 단지 매개되었음이 환기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불가역적인 번역이다. 하지만 일상의 차원으로부터 그 너머를 추출하는 텍스트 공간의 구성적 역량의 불충분한 재현이 그들에게는 어떤 세계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펼쳐냄과 동시에 쥐려고 하는 피드백 고리를 짓는 형성에 가깝다는 것에서 충분하고 충만하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그것이 불완전한 환상이 아니라 환상의 현동화된 투여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국에는 게임 이후, 게임에 의해 달라진 일상을 영위하는 게임 바깥 존재들의 흩어짐을 보여주며 일상‘으로’ 나간 그들의 삶을 비춘다. 곧 그 안에 같이 있음에 몰입하던 이들의 변경된 지위는 진정 세계로부터의 이탈로부터 오는 불안정성, 이세계가 주는 그 같은 느낌을 겪으면서 일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다. 어쩌면 여기서 공동체는 게임의 서사와 게임이라는 형식 모두에게서 비장소와 연관되며 추출되는 개념인데, 전자의 장소가 이세계의 기이함이 반향하는 자리가 도시 문명과 떨어진 자리이며, 그로부터 어쩔 수 없이 엮일 수밖에 없는 우연적 연결의 차원을 구성한다면, 후자의 장소는 게임의 몰입적 차원이 일상과는 다른 하나의 불가능한 장소로서, 그곳에 같이 머무는 것이 곧 게임이라는 게임의 전제 차원을 드러낸다.
〈에스퍼의 빛〉은 한편으로 일상을 게임이라는 현실로 전유하고 다른 한편으로 장소를 게임의 상상적 배경으로서 전유한다. 어떤 식으로든 배우들은 야외 로케이션이든 스튜디오 촬영이든 간에 그것이 고스란히 투여된 장소 ‘위’에서, 때때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마치 상대방이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 발사하듯 선보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캐릭터 되기의 차원에서 배우들의 행위 양식은, 게임 아래에서 정확히는 자신이 그것과 친연한 것이 아니라, 인지하는 차원에서 캐릭터를 수용함의 차원에 조응하는 듯 보인다. 곧 그것은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캐릭터를 만드는 그 바깥의 또 다른 자의식의 분리된 지점을 언제나 가리키는 듯 보인다. 이처럼 〈에스퍼의 빛〉은 일상-게임-일상의 도식 아래, 일상을 게임의 차원에서 굴절시키며 동시에 그로부터 그 일상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게임으로의 환상적 횡단의 경로 자체를 가설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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