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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와이즈먼, 〈에세네파〉: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두 가지 판본REVIEW/Movie 2026. 3. 2. 20:33

프레더릭 와이즈먼, 〈에세네파〉[사진 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상동). 〈에세네파〉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찍고 그 영상들을 편집한 작업으로, 이는 그들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보다는 존재 간의 소통 (불)가능성의 대화로서 신과 인간의 거리,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절대적 거리 같은 역설적 차원의 소통의 면모에 초점이 실린다. 이는 처음 윌프레드 수사와 수도원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매끄럽지 않은 대화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이후 전자의 외부로의 독립적 장면에서의 뚜렷한 ‘변신’과 그가 없는 가운데 그와의 관계의 어려움과 곤궁에 대한 수사들의 수도원장에 대한 민원, 그리고 세계 내 균열에 대한 서사를 투영하는 리처드의 미사 안의 독백, 마지막의 수도원장의 두 개의 상반된 자아에 대한 강연으로도 마치 확장되며 갈음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비교적 직접적인 차원의 불만들 또는 일종의 소문들은 추상적이고 신학적 진리의 차원에서 번역되어야 할 상처와 통합의 전기와 대별되며, 그 후자의 시간에서 그는 직접 지시되지도 비추지도 않는 대신, 마치 상실되며 진리의 절차 안에 흡수, 통합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곧 후자의 영성으로의 정동, 고양, 신학적 경로로의 전치는 이른바 가톨릭의 세계 자체로 굴절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현실에서 영성으로의 ‘뜻밖의’ 전기를 만든다. 이는 마치 하나의 신학 차원에서의 신성한 교리를 만들고 체현하는 서사를 완성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에는 분명 비약과 분절이 따른다. 노동 장면과 윌프레드가 외부의 현실에서 걸어 나오는 등장 장면 등 일부 장면을 롱샷으로 구현한 것을 제하면, 대부분 인물의 발화와 심리 상태에 집중된 클로즈업에 따른 인물의 절대성, 또한 인물에 대한 의존도는 한층 강화된다. 이는 마치 전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무대’ 위의 현실에서 등장인물들의 발화 안에서만, 암시되는 틈새의 차원에 집중하여 서사를 매듭지으려는 전략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그 전략의 (합목적성이 아닌) 필연성, 곧 그것이 오직 하나의 전략임을 추정하게 하는 건 이 영화가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계성과 그 양면인 가능성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선 서사의 점진적이고 그러나 단속적인 전개 양상의 이 영화가 서사의 한계나 비약이 아니라 미결정된 서사를 합목적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는 (현실이라는 한계로부터의) 서사적 가능성의 일환이라는 사실, 곧 감독의 단기간의 수많은 촬영 아카이브로부터의 선택된 장면들이며, 서사를 만드는 일종의 결절적 행위와 그 의도 아래, (서사로의) 최대의 가능성을 끌어낸 결과임을 (재)파악하는 건 타당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진실은 서사로만 반영된다. 또는 서사 안에서만 작동한다.

애초에 현실은 파편적 재료로서만 존재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파편적’으로 그것을 취하지만) 진실을 조각하는 건 서사인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진실은 곧 현실이 전적으로 비틀렸다거나 굴절되어 흔들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전까지는 현실이 서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밖에서 현실을 이미 볼 수 없으며, 그 현실이라는 건 사실상 허구적 산물이다. 여기서 단절감 혹은 비약은 이 특정 부류의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과 착종된 한계를 가능성으로 치환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에세네파〉의 종교 영화로서 성취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성의 몫은 리처드와 수도원장의 자신의 현실을 다른 차원, 곧 신학적 차원으로 투과시켜 번역해 내는 특별한 지위, 역할, 본분의 몫이 이 수도원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 더 정확히는 영화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대단히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뜻밖의 인물들의 지위는 이것이 다큐멘터리 안에서의, 곧 그 바깥에서의 카메라맨의 생생한 대응임을 (인식하는 즐거움을) 제하면, 전형적인 종교 영화로서 클리셰를 조금 더 신선한 측면에서, 미세한 차이로 각색하는 차원에서 드러난다는, 곧 고난을 극복하고 영성으로 승화한다는 평범하고 부박한 서사에 대한 빈틈 어린 재현의 성취가 아니냐는 반문을 가져오는데,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영화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능성을 성취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것만의 특별한 서사는 무엇일까, 아니 다큐멘터리만의 다른 형식이 아닌, 다른 서사라는 것은 가능할까.

물론 이 같은 질문은 혼동되어 있다. 곧 특정 매체 속의 서사의 차이와 서사 일반으로의 환원된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매체의 차원을 형식적 차원보다 현실을 보는 관점의 차원에서, 현실이라는 메타포의 차원을 다루는 지점에서 바라본다면―어쩌면 그것이 형식적인 차원으로 결정되는 부분이라 상정한다면―, 다큐멘터리의 그것만의 특별한 서사의 성취는 결국 현실이 진실임을, 진실인 직함을, 진실함의 서사임을 ‘반증’하는 데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 영화의 성취는 현실과의 대조 속에서, 그것이 현실에서 왔다는 것 자체로만 부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물론 〈에세네파〉가 또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것, 곧 신성함의 환원이나 승화가 아니라, 현실의 차원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그 현실이 여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무언가를 더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의 감축인데, 곧 이 국소의 현실에서의 차이가 가상의 드라마가 주는 결말의 여운을 상회한다는 것이다. 윌프레드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으로 다시 돌아와 어떤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거나 그럼에도 다시 불경한 뉘우침 없는 태도로의 복귀, 사물로서의 지위를 고수하는 반전을 서사로 도입하는 또는 그 현실을 추출해 냄은 〈에세네파〉가 집요하게 인물들을 추적해 가며 성취해 내는 인물의 예측 불가능성과 동시에 불가역성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드라마틱하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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