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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더릭 와이즈먼, 〈발레〉: 전표현으로서 움직임, 그리고 무대라는 실재
    REVIEW/Movie 2026. 3. 2. 20:36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발레〉[사진 제공=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상동).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발레〉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무대 뒤의 연습과 훈련을 비롯해 리허설, 휴식, 물리치료, 의상 맞춤 등 공연이 이뤄지기 전의 거의 모든 과정, 그리고 사업적 논의나 입단 절차 등의 공연 외적 측면들, 발레 마스터들과의 짧은 인터뷰들, 그리고 마침내 앞의 연습 장면이 실제로 이뤄지는 두 개의 공연을 나머지 한 시간가량 직접 보여주는 대단원으로 나아간다. 공연은 앞선 연습의 실제적 성취이자 이상향적 구현이라는 점에서, 예술이 갖는 아우라는 인물들, 몸짓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관여된 상태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

     

    곧 전적으로 공연이 완성되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과는 다른, 그것들이 어떤 경로와 시간을 지나쳐 왔는지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그것을 거쳐 다다른 지점으로서 이 장면들이 주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공연이라는 이상을 향한 모든 시간이 자리했었다는 것은, 곧 공연 전의 수많은 시간과 공연의 찰나의 실제 시간을 교환하는 구성은, 이 공연 자체로부터 툭 잘려나가는 장면으로 끝맺음 된다는 것, 공연 자체의 끝과 그 직후의 시간도 아닌, 공연 이후의 이들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차원에서 끝난다는 것으로써 명확해진다.

     

    이른바 공연의 끝이 아니라, 공연으로서 끝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곧 앞선 장면들의 이전 장면들과의 친숙함의 인지가 기여하는 연계성을 뿌리친 채, 공연 너머의 것을 개입시키지 않고, 공연의 시간에 잠식되는 것으로 유예되는 이 공연의 절취된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격정적인 서로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도 그들이 감내할 현실과 그 억압을 상기하며 주저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관계를 일단락지은 채 황급히 줄리엣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에서, 난간에서 멈추며 고개를 아래로 꺾는 순간, 마치 그가 추락할 것 같은 순간으로 여겨지는 이 장면은, 어떤 뚜렷한 정합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무의식적 결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유추하건대, 이는 앞선 고공 놀이기구의 상승과 하강의 대비되는 장면과의 연관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 곧 상승되었을 때 상기된 발레 단원들에 대한 클로즈업과 엄격하게 대비되는 하강 장면에서 놀이기구와 일체화된 사물로서 드러나는 와이드 숏의 대비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단지 흥분과 쾌락의 차원에서만 결절되며, 그 반대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같이. 아님 더 넓은 차원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발레의 무의식적 충동을 그 ‘이면’으로서 결정짓는 상징성을 띤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결정을 의미화하며 그런 차원에서 필연적인 무의식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일까. 곧 무의식적 결정 자체의 가시화로 의미화할 수 있을까.

     

    〈발레〉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건 이 공연이 드러내지 않는 비가시적 시간의 엄밀함, 실재성, 두께이다. 그 반대의 차원에서 이 마지막 장면은 그 이면의 차원, 공연에 대한 반작용적 힘으로서, 공연 자체의 절단을 통해, 공연으로의 이입과 공연 너머의 변환을 함께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레〉는 이 가시화되는 육체들의 이전에 늙고 힘 빠진 육신들의 가시화를 실천하는데, 이 육신들은 몸짓들을 구현하는 대신, 완성된 몸짓에 대한 보족으로서 작은 몸짓들, 감정에 대한 언설들을 더하는 데 그친다. 이것은 엄연히 안무를 전달하는 경로로, 단원들은 이들의 말-몸짓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연되는, 매끄럽지 않은 그 자체의 전달로부터, 청자의 주저, 곤란, 주의의 파괴 같은 현상들이 따른다. 휠체어 위의 아그네스 드 밀레(Agnes de Mille)는 무용수가 ‘이상향적 몸짓’을 체현하도록 혼신의 힘을 짜내어 설명하고자 하고, 이 머릿속의 상과 실제 움직임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 곧 안무의 과정임이 명확해진다. 이 경청의 자세는 위대한 문화유산으로서 움직임의 지위와 안무가-무용수의 명확한 위계 관계가 절합된 것으로, 거기에는 절묘한 윤활제, 곧 의사소통의 지연 작용을 일으키는 신체의 노쇠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은 무언가를 더 말할 수는 있어도, 더 이상 무언가를 들을 수는 없다, 나아가 그 시간 역시 없다.

     

    이 이상이 하나의 신체와 바로 결합하는 순간, 육신은 무너지며 허망한 것으로 드러난다. 곧 말과 행위를 어느 정도 섞어서 진행하던 늙은 남자 발레 마스터는, 그 혼자 자신이 아마도 구현케 하고자 했던 몸짓들을 그의 이상에 따라 구현하는 순간, 그 몸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제약받지 않고 태연하지만(그 말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지만) 그 몸짓은 결코 어떤 상도 가리키지 않는다. 또는 상의 형해화된 모습을 실천한다. 이 전수의 경로로서 안무는 하나의 선택지이지만, 〈발레〉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다른 경로의 가능성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머릿속 상을 재창안하는 것으로, 이는 또 다른 젊은 남자 발레 마스터의 인터뷰를 통해 제시된다. 그는 조지 발란신에게서 배웠던 일화를 근거로, 그와 반대로,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독단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신의 방식을 강조한다. 발란신의 머릿속 몇 가지 내장된 움직임 스코어들의 일정한 순서의 지침을 동반한 결합 방식은, 전수의 절대적 내용의 질적 하락을 동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발레〉는 공연의 백스테이지를 지켜본다는 은밀한 충동을 충족시키면서 안무의 비가시화된 경로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그 언어-움직임의 번역 과정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해소해 준다. 전자의 측면은 무언가 충만하기보다 을씨년스럽고도 허무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아마도 관객의 자리가 유령의 차원으로 맴돌며, 그 응시의 시선이 탈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의 환상이 아니라 무대라는 실재를 함께 드러내기 때문이다. 후자의 측면은 육신의 공허함과 시간의 허망함 따위를 안기는데, 그것은 지나간 영예로서 또 성취로서 자리하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또는 덜 움직이고 있는 신체의 역설적 면모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두 지점으로부터 〈발레〉는 의도치 않게 죽음에 가까워진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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