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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석현 작/연출, 〈흙사람〉: 한일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등정
    REVIEW/Theater 2026. 3. 3. 20:29

    백석현 작/연출, 〈흙사람〉ⓒ장호. 출처=https://jangho.work/2024/08/16/흙사람(이하 상동).

    〈흙사람〉은 태봉등이라는 가상의 산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갑자기 솟아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가정이 한일 관계의 틈을 육박하는 산의 장막으로 형상화하되 그 실제적 원인으로 기후 변화라는 상대적으로 더 체감되는 이슈를 경유한다고 보인다. 곧, 〈흙사람〉에는 한국이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문화사회적 메타포로서 한일 관계와 심각한 기후 위기의 전세계적 상황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혼재되고 절합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 둘 중에 어떤 명제가 주도적인지 또는 다른 하나의 명제가 기능적인 차원으로 적용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흙사람〉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정들은 무력화되는 듯 보인다. 곧 하나의 맥거핀이거나 또 다른 문제를 다루기 위해 기능화된다. 두 문제 모두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그와 같은 의제에 대한 대응으로서 극은 전개되므로, 극이 좇는 방향성은 적어도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흔적이 각인될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단서를 찾아내는 데서 〈흙사람〉을 시대의 일상적 문화양식이자 문화양식의 특수한 사례로서 정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흙사람〉은 객석을 가로지르는 중앙의 계단 통로를 활용한 낙차적 설계, 산악의 표층을 재현하는 바퀴 달린 구조물들의 끊임없는 이동을 통한 재구조화로써 객석을 초과하고 무대를 뒤덮는 빙산의 태봉등을 등정하는 등장인물들의 자취를 형상화한다. 이로써 관객은 스펙터클한 상황에 접면하게 된다. 일종의 SF 차원의 가정은 상상적이기보다 수행적이고, 실재적이다. 이는 시간에 대한 감각의 차원에서도 그러한데, 장소의 끊임없는 이동은 인물들을 그 장소/위치에 고립시키고 한정시킨다.

     

    장소는 대화와 관계를 분절하는 동시에 한시적인 것으로 바꾼다. 등정 과정에서 달라지는 지형지물의 감각은 무대에서 끊임없이 조정되는 공간에 대한 적용으로 이어지며 관객에게도 절대적인 감각으로 수여된다. 곧 배경-상황이 절대적이며 대화-관계는 좁아지고 시간의 차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또는 단단한 구문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물론 의도적인데, 생생한 감각이 전해주는 상황 아래 판단과 결정의 몫은 빠르고 거의 다른 여지를 두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고립된 비사회적 공동체의 형상 아래, 역사는 희미해지고 미래는 상상되지 않는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갑자기 당도한 과제에 대한 대응이 있을 뿐, 그러한 처지의 곤궁함을 보여줄 뿐, 이를 자유자재로 다루거나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은 없다. 산은 문명이 이룩한 높이를 초과해 있고, 그럼에도 등정은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지만, 자연의 위태로움과 숭고함은 그 너머에 있다. 중반을 넘어서면, 시련과 실패의 그림자가 부상한다. 따라서 〈흙사람〉은 죽음의 경계에 선 인물들의 결핍과 등정에 대한 동기의 파편들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

     

    새롭게 생긴 영토를 먼저 등정하는 국가가 차지한다는 하나의 룰에 따라, 국운을 건 중차대한 임무는 목숨을 건 등산가들의 물러서지 않는 명예로 곧장 치환되고, 그들에게는 돈과는 상관없는 숭고한 자기 임무로 명명된다. 일종의 한일 대항전이라는 역사의 원한 감정에 대한 이벤트적 유희/게임이 극단적으로 비장한 버전으로 전제되고, 이는 고립된 임시 공동체의 몫으로 전가되면서, 국가와 국민의 자리는 실종되고 또 이들 내면으로 전이되는 데 그친다. 중반까지 이를 따르던 기자 역시 국가가 부여한 의무가 아닌 자신의 자율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드러나는데, 자율적이든 비자율적이든 간에 전문적인 등산가가 아닌 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건너편에서 마찬가지로 등정을 하고 있으며, 발파해서 산사태를 두 차례 일으키는 일본의 등산가 팀은 보이지 않지만 테크놀로지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그로써 폭력을 통한 지배적 형상을 연장한다. 발파는 인간이 초래한 일시적 위험이며, 그에 대한 응전으로서 등정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등장인물들의 과도한 시도로 이어진다. 일본은 지정학적인 하나의 특수한 과제이지만, 극단적 자연의 형상은 절체절명의 인간의 자리를 근원적으로 지정하는 듯 보인다. 그 둘이 겹쳐지는 자리가 등정의 막바지에 자리한다.

     

    자연의 절대적 숭고는 역사의 원환적 무게로 얹힌다. 〈흙사람〉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지배적 형상을 공간 연출의 현상학적 차원과 그 안의 실존적 과제로 전이시켜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집단 무의식적 과제를 출현시킨다. 이 극장 전체를 재편하며 객석을 가로지르는 경로까지 연장된 거대한 스펙터클 아래, 인간 존재들의 분투와 급변하는 정동은, 국가 스포츠의 대항전을 진지하고 비극적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그것에 대한 희극적 면모는 이 실존적, 현상학적 풍경 아래 봉쇄된다.

     

    그러니까 승화가 실제 조작하는 바는 일본의 강제 차원의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그것이 굴절된 우리의 현재적 풍경 자체일 수 있는데, 이는 일본과의 불가능성의 대화 차원을 진작하는 듯 보인다. 곧 일본이라는 적대가 개인의 실존을 건 승부로 전이되는 지점에서, 곧 일본의 비주체적인 진정성의 측면이 마치 산과 같이 단단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비가시화된 상대편을 가정한 외로운 한국 대표 격으로 소환된 개개인의 고투라는 방향 속에 반향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흙사람〉은 이런 비정치적 관계의 두 국가의 대립된 현실을 승화하는 데 실패한 한국인 주체의 무의식을, 결코 승화시킬 수 없는 각자의 ‘고립’된 현실의 아이러니한 사태를 굴절된 차원으로 재가시화한다고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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