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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공동체 아르케, 〈셋톱박스〉: 부재하는 혹은 삼켜진
    REVIEW/Theater 2026. 3. 7. 14:34

    창작공동체 아르케, 〈셋톱박스〉[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셋톱박스〉에서 주인공 남자(송현섭 배우)의 고통은 대위법적으로 교차하며 그를 곤궁으로 모는데, 가장 심각한 건 일종의 정체 현상으로서, 신체적 차원에서 내장에 음식물이 가득 차 더이상 먹는 것도 싸는 것도 불가능한 사태를 겪고 있는 것, 그리고 정신적 차원에서 그가 보지 않는 TV 요금이 징수되고 있음을 발견했지만, 그는 TV를 보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TV를 본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범주이지만 실은 하나의 문제인 듯 보이는데, 계속해서 극은 그에 대한 추리를 유도하며 결국 발화하지만 무위에 그친다. 이는 곧 그의 내장에 셋톱박스가 들어 있다는 것.

     

    그의 집에 셋톱박스가 있다는 것, 그래서 신호가 잡힌다는 것은 그가 TV를 과거에 신청했다는 기록과 함께 TV를 보고 있음의 증거가 된다. 이는 두 입장의 발화가 모두 진실이라는 전제 아래, 어쩌면 추정해볼 수 있는 가정이다. TV가 그의 배 속에 있어 그가 집에 있을 때 셋톱박스가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 이는 결코 사실일 수 없지만, 그가 겪는 이중의 정체가 그의 정체성을, 그의 중핵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둘 다 현실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며, 실은 설명될 수 없는 차원에서 실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극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건 서사의 정체가 아니라 정체 자체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내장에 하얗게 퍼져 있는 음식물 존재는 직사각형의 셋톱박스와 닮아 있다. 남자에게 부재하는 셋톱박스는 실제 그가 보지 못하는 그의 속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진짜 원인을 알 수는 없는 그의 정체된 위장의 내용물로 그의 실제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의 육체적 고통과 순전한 정신적 고통의 시기는 공교롭게 같아 보인다. 여기서 그가 실제 TV를 보고 있는 시기가 아닌 그가 실제 TV를 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한 시기는 시차가 있는데, 후자 이전의 전자의 범위는, 곧 그가 계속해서 TV 요금을 포함해서 통신 요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그것은 의도적으로 회피되어 처리되는 것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중요한 것, 아니 그보다는 인식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며 따라서) 그가 원래 TV를 신청했었다는 상실된 기억의 사실은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그러니까 진짜 기억을 상실한 부분은, 아니 인지되지 않은 부분은 그의 내장에 셋톱박스가 삼켜진 또는 ‘삽입된’ 어느 시점이 아닐까―그것이 진정 이상하다면 어떻게 음식이 그것처럼 단단한 무엇으로 응결되어 내장 전반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해명되지 않으며 해소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은 그가 다다를 수 없는 차원에서 그를 공략하고 흔들며 곤궁으로 몰아간다. ARS 시스템의 배경 음향으로 시작되는 극은, 남자와 상담원들과의 지난한 전화통화가 당연하게도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대화이며 단절되어 내통되지 않음을 새삼 강조하는데, 이는 남자의 상대역이 비인간적이며 정해진 체계를 서술하는 데 그치며, 그의 호소는 그에 막혀 어떤 근거를 그 자체로 얻을 수 없는 무용한 발언의 결과를 초래한다.

     

    남자의 호소는 일종의 법정에서의 항변에 가까운데, 그 양태는 부조리극에 가깝다. 그의 말은 주체의 공백을 향해 나아가며, 그의 가없는 내면으로 소급된다. 곧 〈셋톱박스〉의 직접적 참조점은 카프카의 법정극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삶 전반을 건, 아니 그의 삶 전반이 걸리는 그의 무력한 항변의 무한한 반복이 〈셋톱박스〉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실제 삶을 추월하는데, 회사 상사의 임원 대상 프레젠테이션 작성에 대한 계속된 수정 요청과 결혼을 앞둔 여자(정다정)의 여러 결혼 준비 요청사항들은 그를 옥죄며 곤궁으로 모는 부가적인 차원의 대위법적 요소들이다. 곧 그의 정체를 규정하는 두 가지 문제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하는 그 둘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셋톱박스는 그의 삶의 중핵을 차지한다. 그의 X-ray 사진 속 뱃속 형상은 부재하는 셋톱박스라는 진실을 유일하게 가시화한다. 하지만 셋톱박스의 존재 자체가 맥거핀인 셈인데, 그것은 그의 집 대신에 그의 뱃속에서도 검출되지 않고 끝‘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맥거핀이며 실제로는 실재의 조각인 것이다. 남자의 이 정체를 현대 사회의 소통의 실패, 소통의 외양을 띤 수많은 대화의 양상으로 인한 고립과 고독의 차원으로 확장 혹은 환원하는 것 역시 가능해 보인다.

     

    그것이 환원으로 보이는 까닭은 남자의 호소가 향하는 바가 일종의 무심한 신에 대한 단독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사소통의 절대적인 분리는 그것에 부속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원활하지 않은 의사소통은 그의 곤궁의 원인이 아니라, 그의 내속화된 곤궁이 맞닥뜨리는 우연한 현상들로 보이는 것이다. 곧 남자의 대화 양상에서 주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그의 진정한 곤궁을 초래하는 건 셋톱박스를 경유한 일련의 대화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사소통 자체의 실패라기보다 존재 증명 혹은 등록의 상징계적 절차의 근본적인 실패의 부분이다.

     

    남자의 많은 대화는 전화통화로 이뤄지는데, 그것이 서로 다른 두 장소를 연결하지만 진정한 소통의 실패로 연장된다는 건 공통된 부분이다. 이는 단순히 상대를 마주하지 않는 데서 나아가 각기 그 다른 장소가 결코 연결될 수 없음을, 곧 그로부터 두 사람이 결코 소통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곧 환유적 차원에서의 분리를 조각하기 위한 명목적 장치이다. 이는 스크린 활용으로 이어지는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만드는 카메라를 중계하는 스크린의 영상은 남자를 그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지배적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스크린의 활용은 우선 실제 중앙과 상수의 각기 다른 단―중앙의 안쪽으로 높아지는 경사의 단과 그 높이와 얼추 맞물리는 상수의 평평한 단―과 하수의 바닥까지 세 개의 층 차를 갖게 되는 무대에 산포하는 존재들의 미끄러짐을 포화시키기 위함으로, 이는 결과적으로는 다중적 장소의 낙차를 하나의 평면 안의 계급적 위상으로 전도하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무엇보다 이 분리의 재통합이라는 측면이 사후적인 봉합이며 기인이라는 것, 곧 통합을 위한 의도적인 분리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영상은 계속 변용되며 그 스크린 역시 자유자재로 활용되는데, 그것의 위치와 크기, 활용 개수 역시 계속 변화한다. 실제 천장에서 롤 스크린이 오르내리고 또 벽면 자체가 그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상수에 위치한 물리적 지배 구조의 상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중앙 영사막만 쓰인다면, 상담원과의 통화에서는 중앙과 그것이 더 클로즈업된 상수 쪽 조금 더 앞쪽의 두 영사막이 동시에 쓰인다. 남자의 공허하고 막막한 심경을 투영하는 배경 이미지들―안개와 연기 사이의 어떤 모호하고 불투명한 경계의 이미지에서 파란 하늘로 잿빛 하늘로 전환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벽면에 가로가 하나의 긴 직사각형 크기로 체현된다.

     

    아마 유일하게 상투적이지 않은 남자의 만남이 있다면, 클럽과 비슷한 카페에서 일하는 그의 선배인데, 그는 여행을 좋아하며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장례를 위해 여행 중 돌아와 있는 상태로, 마지막에는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정체는 다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그가 하는 말들은 거의 다 철학의 상념들이다. 이는 남자의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단지 유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차원에서만 메시지인 듯하다. 반복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남자의 말이 무화되는 지점을 신학적 차원에서 변주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곧 그의 곤궁의 내적 중핵은 (어차피 인간 사회 내에서 이해될 수 없으니)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배의 존재는 다분히 환상적이고 잉여적으로, 그가 구축한 세계의 이 비현실적 풍경으로부터 그 “문 바깥”이 “비현실”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는 특히 도드라진다. 곧 이 발언은 이 공간에 대한 아이러니를 추동하기 위함보다는 그 문 ‘바깥의 바깥’으로서 실재 세계가 임시적으로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곧 이곳의, 자기의 부재를 입증하는 남자의 내적 속삭임으로 소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물론 〈매트릭스〉의 유명한 메타포를 참조하는 것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꿈의 신’ 모피어스가 실재의 현실에서 가상 현실을 지시하는 차원의 말이 마치 반전되어 드러나는, 곧 그 바깥의 핍진한 지난함의 현실이 진짜인 것처럼 감각되는 것에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말로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선배라는 존재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잉여적인데, 마치 그의 수사가 어떤 진리도 없다는 장광설 같은 수사들의 나열로 보이는 부분에서 그러하다. 이는 포스트모던적 유희의 언어 양상처럼 비치는데, 곧 진리의 수사로서 그 언어들이 결코 남자에게 도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배의 말은 “무감각”한 배(신체)와 “잡동사니”로 가득 찬 뇌(의식)의 문제를 일원화하며 그의 사태를 유일하게 조망하지만, 문제는 그의 말이 닿지 않는 남자의 위급한 상태 자체이다. 남자는 어떤 음식도 또한 어떤 말도 집어삼킬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함의하기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남자를 경유하지 않을 때는 일종의 시대 착오성으로 드러나는, 히피의 정신과 태도를 주창하는 것 같은 그의 삶과 한물간 철학적 수사들로 점철된 발화는 남자의 실재적 사태를 단지 유예하고 지연시키는 의사-진정한 삶과 가짜 진리로 보인다. 선배와의 만남은 유일하게 대위법의 양식으로써 드러나는 남자의 곤궁들로서 현실들과 다른 궤도를 그리지만, 그것과 진정한 시차를 지닌 채 유명무실해진다.

     

    결국 〈셋톱박스〉는 닫힌 소통 시스템 안의 고립된 개체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일까. 그것은 순전히 비관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인가. 상수 단에서 바지를 내리고 변을 보려고 용을 쓰는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과 함께 이 비관적 세계에 희망의 틈을 내어 극 전체를 승화시키고자 한다. 반면, 그것은 해결책으로서는 너무 부족한데, 그의 배를 가르고 응고된 음식물을 추출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좀 달라 보이는데, 거기에는 미묘하게도 뭔가 진정한 희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인내하거나 발화하는 대신, 그것을 내재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배출하려 하는 첫 번째 시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까.

     

    그의 곤란한 얼굴이 전도되는 시점에서와 같이, 확대된 얼굴이 변경되는 시점이 존재한다. 이는 상담원이 그의 호소가 절정에 치달으며 감정이 실린 대화를 요청하는 시점에서 그 역시 감정이 그 얼굴로 번져가게 되는 부분으로, 이는 소통의 차원이 성립되는 시점이다. 이는 서로를 마주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마주하게 됨으로써 상대에게 진정한 자신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됨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소통을 이야기하며, 소통의 정의를 내재적 차원의 진정함이 응결되는 시차적인 시점들의 연결로 재정의하는 부분이다.

     

    남자의 클로즈업된 마지막 얼굴은 그 직전부터 출현하면서 평상시에 그 바깥의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인물의 초점에서 나아가 남자의 얼굴을 마침내 그 스스로 의미를 수여할 수 있을 때를 비춘다. 그것은 마침내 문 바깥의 자신만의 공간을 찾게 됨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희미하게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따라서 허무하게 비쳤던 선배의 철학적 진리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남자에게 응결되어, 오로지 그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어떤 틈으로부터 마침내 구현되는 것일까.

     

    〈셋톱박스〉는 결국 소통 불가능성의 현대가 지닌 부조리성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물론 고전적 차원에서 정의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현대의 고독한 남자의 자화상을 비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90년대 가장의 무게를 지닌 실존적 위기에 휘말린 남자를 어렴풋이 연상시킨다. 그것은 구체성이 소거된 이념형으로서 존재에 어렴풋하게 남는 인상 정도다. 하지만 이 전형으로서 남자의 특성은 한국 사회에서 남성 주체가 지니는 한계의 차원에서 작품의 근원적 진리의 형상을 수용하는 대신에 근본적으로 작품을 내파하는 비판의 지점에서 불순물처럼 부상하는 듯 보인다.

     

    곧 남자의 이름이 없는 것과 같이, 그는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데, 그러한 부조리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한 개인의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그것의 공백으로서) 수여되기 위함인 것과 같이, 현대사회를 신의 부재로, 그리고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소급하는 데 있어, 오히려 남성 주체의 한계는 동시대에서 함께 다뤄져야 할 부분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타인에 대한 감정적 동요로서 여성 상담원의 공감은 작품이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보여준 소통에 대한 가능성이자 작품의 내재적 한계에 대한 균열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 기획초청 Pick크닉] 셋톱박스〉

     

    * 일 시: 2026.1.23.()-2.1.() / 평일 1930, 주말·공휴일 15(화요일 공연 없음)

    * 장 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 소요시간: 100(인터미션 없음, 변경될 수 있음)

    * 관람연령: 13세 이상 관람가(20131231일 출생자까지)

     

    스태프

    /연출_ 김승철 기획_ 김영경 음악_ 공양제 조명_ 김성구
    무대_ Shine-Od 무대 어시스턴트_ 김종은 움직임_ 양은숙 영상_ 플레이슈터(강경호, 김대권)
    무대감독_ 박정인 조연출/음향오퍼_ 김성미 조명오퍼_ 박재이 영상오퍼_ 이정아

     

    출연진

    김성일_의사/부장 이형주_과장/전문의B 김영경_상담원2/전문의E 이홍재_선배
    민정오_지점장/전문의D 송현섭_남자 김보라_상담원1/전문의A 정다정_여자/전문의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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