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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소진, 〈파라〉: 지상과 지하의 관계에 대한 불가능성의 염원REVIEW/Performance 2026. 4. 10. 20:51

곽소진, 〈파라〉[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곽소진 작가의 〈파라〉는 낙하부대(Paratrooper)의 존재들과 낙하산(Parachute)이라는 물질 사이에서 합성되는 여러 관계의 양상을 하나의 안무적인 이행의 과정으로 기입하는 퍼포먼스이다. 제목의 “Para”는 앞의 두 단어를 묶는 접두사로서, 하나의 단어로서 전용된 것이다. 낙하부대에는 일종의 낙하산 포장병(박태준)과 낙하병(김산), 통신병(조승호)이 있는데, 각각 낙하산을 포장하고, 낙하 모의 훈련을 실시하며, 무선 통신(의 잡음)을 송신한다. 이때 낙하산 포장병과 낙하병은 지하와 지상으로 나뉘어 배치되는데, 이를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계단에는 통신병이 자리하며, 그가 내는 소리가 지하와 지상의 스피커로 전파된다.
스피커는 지하의 기둥에 달려 처리된 네 개와 지상의 바닥에 놓인 두 개로, 전자가 수직적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명시되는, 사이렌의 송출 장치인 동시에 공공 설치나 조각의 표지로서 기능한다면, 후자는 바닥에 놓여 스피커의 혼 끝의 드라이버 유닛에 연결된 긴 전선의 S자 곡선으로 공간 전체에 분포하며 느슨해지고 너저분한 대상으로 ‘하락’하는데―또는 하나의 신체에 가까워지는데―, 결과적으로 수평축으로 지하의 바닥에 놓인, 수직적 스피커와 대별되는 (스피커가 아닌) 그 낙하산에 대응하는 것이다. ‘수직적’ 스피커가 공간을 포집한다면, ‘수평적’ 스피커는 공간을 분산한다.

전자가 팔루스적 기호이자 우상 숭배적 관념이라면, 후자는 페티시적 대상이거나 토템적 사물에 가깝다. 지상에서 바닥 중앙을 가르고 있는 스피커는, 그 휘어진 선의 차원에서 유효한 대상으로 부각하는데, 이는 공간 자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 바닥을 약간 상회하는 높이로써 관객이 넘나들며 발밑으로 그것과 마주하게 만든다. 곧 엄밀히 전선은 작품이라기보다 대상이며, 거기‘에’ 붙은 스피커가 물신적 대상이 된다. 그것은 입보다는 성기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스스로 탈락되며 바닥과 새로운 배치-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적어도 ‘근엄한’ 무엇이 아니며, 관계를 요구하는 대상에 가깝다.
낙하산 포장병이 낙하산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순간, 낙하병은 후반의 특정 순간―두 번 이 퍼포먼스를 보지 않는 이상, 두 개의 공간, 더 정확히는 세 개의 공간 모두를 보는 건 불가능하다.―, 이 스피커를 등지고 1층 바깥을 향해, 곧 대상 없이, 하염없는 몸짓을 반복해 수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안으로 수렴하는 지하의 몸짓과 달리 개방의 형용 모순적 조건―완전히 다 보이지만 실제로는 닫혀 있는 문―을 지시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공간은 더 확장되는데, 곧 건물 바깥으로이다.
그것은 부유하는 몸짓으로서, 지하의 부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그에게는 낙하산과의 ‘교미’가 없는 탓이다. 또는 그가 웅크려서 바닥에 놓여 스피커들과 삼각형을 이루는 것처럼, 그 자신이 관계를 요구하는 스피커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성적 관계의 기호적 차원에서 〈파라〉를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인데, 그것은 ‘소중한’ 대상을 다루는 낙하산 포장병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인 순간적으로 낙하산 한끝을 들어 올려 공기를 한껏 부풀리고 아래로 하강시켜, 낙하산의 주름을 곧게 다시 펴는 작업, 곧 처음으로 낙하산의 순수한 형상으로 되돌리는 일, 반대로 그것이 발현될 미래의 순간을 예기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까 만들어졌을 당시의 과거와 일어날 미래가 계속 교차되는 게 낙하산 포장이 보여주는 바인데, 이 시공은 ‘불행하게도’ 낙하산 훈련과는 물리적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다. 굳이 이 역설을 작가가 수용한 것은 이 단절의 차원이 갖는 소통의 불가능성으로써 낙하산과 관련된 존재와 낙하산과의 관계 차원을 승화시키는 작업을 의도했으며, 그에 따라 의미는 표현을 초과한다. 곧 전자로 소급되는 후자의 재배치되는 양상으로써 낙하산은 관계의 형이상학적 혹은 추상적 서사를 함축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공간의 단절성을 부각시킨다.

부풀리는 행위로써 상상적 차원의 과잉 기표로 나타나던 낙하산은 이제 수평적 차원에서 바닥과 붙는 가장 얇은 면들로 재축적된다―수축되기 위해 축적된다. 이때 수직적 압력이 가해져야 하며, 여기에는 체중을 싣는 누르기와 함께 납 주머니를 접힌 낙하산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압력을 일정하게 투여하는 대상을 경유한 누르기가 있다. 수직적 누르기는 수직적 눈 맞춤을 상정하며, 이는 외부에서 낙하산에 완전히 몰입한 존재-대상의 관계를 시각적 장으로 연장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그것이 볼록한 모양으로 최대한 압축되는 결말에 이르러 갈 때 낙하산과 포장병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며, 이때 마치 낙하산은 숭고한 대상으로 전이되는 듯하다.
낙하산이 예외적으로 가시화하는 그 비물질적 공기 ‘안’에, 그 좁은 터널 (어쩌면 포털) 안에, 지상은 대부분 사로잡혀 있는 셈인데, 그것은 공기가 접히지 않는, 열려 있는 세계 한가운데에서, 곧 차폐되지 않고, 차폐시키지 않는 공간에서 낙하병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서 통신병은 공기에 놓이기보다 공기를 주입하는 쪽에 가깝다. 더 정확히는 공기와 직접 마찰하는데, 입으로 공기를 불어 넣거나 옷에 문지르거나 하여 소리를 만든다.
이는 어떤 의미라기보다 의미를 통과하는, 메시지의 나머지인 잡음의 양상으로 나타날 뿐인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두 단절된 공간을 잇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흘러 들어가는 스피커들을 통한 유일한 물리적인 신호가 된다. 그러니까 그 둘이 하나의 연결된 층위 아래 놓인다는 유일한 표식이 곧 스피커의 긴 전선이다―그것이야말로 공간을 초과한다. 어떤 기호도 그 잡음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메시지도 담기지 않는다는 건 무전기가, 나아가 통신병이 신체성 자체를 처리하는 도구로서만 기능함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낙하산이라는 미래의 두 측면을 따로따로 현상하는 〈파라〉가 갖는 유예된 시간성, 그러나 분명한 신체성과도 연관성이 없다. 오직 낙하산이 펼쳐졌을 때, 그리고 낙하병이 낙하할 때만이 그것과 다른 동시적 공간 안에서 그 신체성이 발현될 수 있는데, 이때 거기에는 분명 메시지가 기입될 것이다. 어쩌면 이 무의미한 또는 어긋나 있는 통신 시스템으로부터 과거와 미래로 전이되는 중간 지대를 재조립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미래를 예기하는 과거와 미래에 펼쳐지는 장면 사이를 오가는 일종의 포털로서의 시간 층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병의 움직임이 철저하게 대상을 다루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또한 대상과 틈 없이 밀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명확한 안무를 보여준다면, 낙하병의 움직임은 대상을 부착하지 않고 허공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 둘은 (후자에서 전자로 나아가며) 안무로서 묶일 수 있는데, 전자에서 움직임은 ‘행위’ 자체로 보이지만, 심미화된 기호의 표식에 가깝다. 그러니까 포장병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사물과의 강렬한 접촉의 차원에서 특이성의 정동을 획득하는데, 그것은 어떤 ‘사랑’의 차원이 아닐까.
어떤 바람이 만드는 빈 공간으로서 내부는, 면과 면 사이의 최대한 틈을 소거하는 행위, 곧 공기를 최대한 빼는 행위로 이어지면서 바람의 지지체로서 가장 얇은 면의 확장됨을 예비하며, 가장 단단한 차원의 수축됨으로 바꾸는 것이 포장병의 그 일이라면, 그것은 손과 낙하산이, 그리고 낙하산 안의 수많은 주름이 계속 축적되어 맞닿는 접촉의 누적됨, 강도로서 접촉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거기에는 유예된, 가상의 신체가 있는데, 이는 지상층으로 수직으로 상승하여 고공의 이미지를 불러오며, 물리적 단절을 시간의 분절로 재기입한다.
이 강도 높은 행위가 타자로의 이행을 가정하는 지점에서, ‘벙커’의 빈 시간의 차원에서 묵묵하게 기입된다는 점에서―그는 예컨대 고립되었다.―, 연습과 훈련의 차원이 아니라, 사물-신체의 이행적 장면‘들’을 하나씩 펼쳐놓는다는 점에서, 오직 스피커를 통한 매개의 ‘한’ 단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철저히 ‘바깥’을 향한 움직임 아닐까. 그렇다면 반대로 낙하병은 그 직접적 바깥이 아니라, 낙하에 대한 가상훈련, 또는 낙하하는 병사에 대한 어떤 수신호, 그리고 나아가 그 자신이 낙하산이 되는 것과 같이, 그 스스로가 미래의 질서를 또한 연기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낙하산의 환유로서 (스피커와 맞물리며) 자리한다.

그 중간의 소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말이 되지 못하는 신호로서, 현장을 증명하는 기저음인가. 연결된 존재의 신체를, 그러니까 말을 가정하는가. 조은호는 말을 하는 대신, 사물이 되어 사물에 말을 건다. 그것은 또 다른 접촉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한의 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바람을 활용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소리는 두 개 층의 각각의 존재에 어떤 발신으로 기능하거나 그 둘의 대화를 매개하는 건 아니다. 반면, 그건 철저한 외부로서 단절된 두 층을 잇고 그 단절을 지시하며, 그 단절이 가져오는 어떤 불가능성을 염원한다.
〈파라〉는 ‘더 윌로’에서 서서울미술관으로 이동하며, 단절된 두 층을 연결함으로써 분리된 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서사를 설정한다. 이때 낙하병의 시뮬레이션 동작이 생겨나는데, 원래 낙하산 포장병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더 밀접한 관계의 양상이 사물-존재의 도식을 중첩적으로 보여주면서 강화했는데, 훨씬 확대된 공간에서 그 ‘빔’ 자체를 더 두드러지게 현상하는 방식으로 곽소진은, 존재를 분배하며 특이화한다. 이는 서서울미술관에 대한 메타 서사를 구성하는 것과 같다, 건축을 일별하고 공간에 처박히는, 곧 확연하게 분리된 지상-지하의 은밀한 넘나듦/탐험을 통한 경험으로써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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