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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혜진, 〈흐르는〉: 말과 움직임은 서로를 향해 어떻게 흐르는가
    REVIEW/Dance 2026. 3. 7. 15:10

    장혜진 안무, 〈흐르는〉ⓒ박상윤 [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흐르는〉 [각주:1] 의 천장 중앙으로부터 내려온 마이크는 중심 오브제를 넘어, 공간 전체를 환유한다. 그것은 구심과 원심의 자장 아래 있는 하나의 원의 공간이다. 이 마이크-공간과 하나의 신체의 상호작용이 곧 〈흐르는〉의 움직임이다. 공간과 신체 사이에는 마이크가 있다. 따라서 신체-마이크와 마이크-공간의 각각의 연합체는 신체-마이크-공간의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마이크는 점토가 덧대어 있고, 그 덧댐의 흔적이 전이되어 있다. 손(의 형상)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만짐에 의한, 만짐을 수용하는 사물이다. 동시에 마이크는 소리를 반향하는 사물이며, 그것을 당겨서 놓았을 때 그 자체로 공기를 가르며 내는 자신으로부터의 노이즈를 동시에 반향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반의 클라이맥스는 장혜진의 말, 신체를 마이크로 옮겨놓은 듯한 말, 곧 성대를 마이크로 이전하고, 몸의 무게를 걸터앉은 의자 등받이로 이전하고, 입술의 운동과 지지체로서 마이크의 연합 작용으로서 진행되는 이 발화 안에 본래의 기능으로서 마이크가 자리한다.

     

    장혜진의 긴 발화는 짧은 구문의 연쇄 작용으로 이어진다. A는 B에 기대어 있고, B는 C에, C는 D에 기대어 있음이 차례로 제시된다. 공간은 환유로 작동하고 있음으로 갈음된다. 나-입술-입천장-목구멍-폐-창자-골반-피부의 신체의 계열체로서 ‘나’는 다시 공간으로, 나아가 “우주”로 나아간다. 우주라는 끝은 다시 “작은 먼지”로서 리듬과 움직임의 기원을 배태하고, 갓난아이로 돌아와 “자장자장”을 낳고, 하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의 연합 작용은 결국 “극장”의 은유를 낳고, 그리고 신체 일부인 “혓바닥”으로의 돌아옴을 낳는다.

     

    이는 마이크와 신체가 하나의 운동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처럼, 그 운동의 원리를 풀이한다. 모든 것은 혼합되어 있고, 모호하게 뒤섞여 있고, 상호작용의 일부에 소속되어 있다. 입술이 볼록하다면, 입천장은 오목하며, 모든 것은 +와 -의 기호로 결착된다. 이는 앞선 움직임이 선취하는 부분인데, 마이크가 볼록하다면, 그 위의 점토는 오목하다. 처음 커다란 검은 점토 덩어리를 가져오며 든 채 그것을 일부 떼 낼 때 점토는 볼록하고, 손은 오목하다. 원을 가로질러 벽기둥에 그것을 찰싹 붙일 때 오목한 벽은 볼록한 점토를 수용한다.

     

    이 벽에 붙은 임시적인 그러나 뚜렷한 결속의 이미지는 공간에 붙은 하나의 신체, 하나의 신체로부터 파생되는 공간에 대한 뚜렷한 상징이다. 이 점토를 떼어낼 때 더 정확히는 늘어뜨려지면서 분리될 때 생기는 기포와 같은 막들은, 그 결착의 구조를 조금 더 면밀한 차원으로 지시해 낸다. 곧 모든 것은 매끄러운 표면이 아니라 다공성의 분자적 구조의 차원에서 울퉁불퉁한 경계면이다. 그것은 이미 무언가를 함입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

     

    하나의 완결되지 않는 무한한, 그럼에도 하나로 완결되는 이 계열체의 움직임은 하나의 구조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른바 모든 것의 연결, 어떤 것에의 다른 어떤 것의 연결은 하나의 구조라는 무한한 그러나 닫힌 원환의 분포이자 구속은 아닐까. 그러니까 계열체로부터의 탈구, 도주는 불가능한 것일까. 하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다시 하나이기도 한, 이 연결망의 세계에서 원의 경계를 파고드는 마이크, 관객을 향하지만 다시 안으로 수렴하며 닫히는 이 마이크는 사건이나 충격의 매체가 아닌, 기입과 수용의 매체로서 기능한다. 처음부터 전제되는 소음은 이 마이크로부터의 수음이 아닌, 그 바깥의 사운드를 내부적으로 심어놓는 것에 가깝다. 그것이 휘둘려질 때 역시 노이즈로서 증폭되기보다는 고체적 사물에 멈춤으로써 관객을 향한 거슬림, 나아가 충격을 최소화한다.

     

    또 하나 이 발화가 드러내는 철학적 이념은 안무에 대한 주석이자 해석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그것의 하나의 예시로 작용하는데, 이는 안무에 대한 개념의 차원을 벗어나 안무 자체의 실천으로 볼 수 있는가. 그러니까 말은 움직임을 완성하지만 움직임으로서 스스로 완수되는 존재인 것인가. 말의 비가시성은 신체의 어떤 리듬을 끌어내는가. 아니 그것이 어떻게 의도되어 있는가. 어쩌면 장혜진의 말하기에 동반된 자세, 말-신체는 전반적으로 이완을 향한다. 마이크의 자리는 비로소 안정화되고, 다시 말해 손에 쥔 마이크로서 재영토화되고, 어떤 불시의 긴장감은 아이를 재울 때의 ‘자장가’와 같은 분위기 안에서 언어적 세계의 확장 안에 가라앉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구되는 관객의 자세 역시 다른 것이어야 할까.

     

    마이크가 공중에서 선회화며 퍼져 나갈 때, 어쩌면 볼록해질 때, 장혜진은 휘청거리며 오목해진다. 그것이 종국에는 붙잡혀 있으므로 구불거리는 원심력을 표방하는 물체의 운동은 어떤 구심력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신체의 덜거덕거림과 유사하다. 공중에서 그어지는 경로는 몸으로 체현된다. 마이크의 출렁거림은 몸의 휘청거림과 같다. 후자는 전자에 상응하고, 후자는 지연되며 전자를 선취한다. 장혜진은 이 굴절되는 힘의 비가시적 육체와 짝을 맞춘다. 그 육체의 경로가 어포던스의 자리로 선취된다. 사실 장혜진은 안으로 향해 있다. 그가 하나의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반 두 번의 순간에서, 관객과 연합되는데, 그가 손을 내밀어 관객의 손이 이 공간 안에 개입될 때가 그렇다.

     

    반면, 그의 중심은, 시선은 전적으로 안을, 그 안의 마이크를 향한다. 고개가 정위되어 있는 만큼, 몸은 그 직선의 세계를 벗어난다. 그의 언어를 경유하면, 머리는 몸에 기대어 있다. 반면, 몸은 그 바깥의 경계를 함입한다. 그래서 덜커덩거린다. 머리―이성―는 기능 정지되어 있고, 안을 맹목적으로 향하는 몸에 의해 눈의 기능은 감소되어 있다. 그것은 바깥을 살피기보다 오히려 몸의 작용을 들여다보거나 듣는 차원으로 형질 전환되어 있다. (이는 또 다른 신체, 비인간의 그것을 재현하는 것일까.) 따라서 이것이 듣는 귀로서 신체가 전면화될 수 있는 차원에서, 터치투어와 음성해설의 접근성 회차가 마련되었던 건 합목적적 차원에서의 연장일 수 있다.

     

    〈흐르는〉의 말은 세계를 재표현하며 성취한다. 더 많은 연결-접속의 계열들이 세계 안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듣는다. 그리고 감각되고 또 감각되어짐을 본다. 우리의 공간 안에 수많은 것이 이어지는 장면 안에서 그것을 듣기 때문이다. 이 듣기의 차원, 말의 흘러감과 그 말이 가리키는-벗어나는 몸, 현실, 현재의 범주는 이 몸의 성대-특정적 차원과 직접적으로 조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신체는 그것이 어떤 명상 차원의 흐르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그 말의 지지체로 좁혀지면서 가장 내밀한 몸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신체로부터 지나치게 확장되거나 그리하여 사라지는 신체 그 외부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실재적 신체와 세계의 환상이 극단적으로 분기되면서 결합되는, 역설적 차원에서 내용으로서 텅 빈 몸에 대한 문학의 표현과 그 내용과 어떤 조응도 되지 않는 충만한 몸으로서 움직임적 표현이 덜그럭거리며 진동한다, 우주로 나아가면서 가장 내밀한 진동의 차원 아래 붙잡힌 채.

     

    말이 몸으로부터 독립적인 차원을 획득한다는, 그러니까 움직임에 대한 직접적인 차원으로 조응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없는 가운데 말은 흘러가며, 몸 역시 반대의 차원에서 독립적인데, 말의 견본이거나 예시가 아닌 차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흐르는〉의 (문학적으로) 장엄하고 (신체적으로) 일관된, 긴 후반부는 그 몸의 확장 불가능성과 물리적 고착됨의 연장 불가능성을 각각 단지 이행만이 있는 어떤 문학의 내용과 몸의 온전한 붙들림, 또는 움직임의 정지만이 있는 움직임의 형식의 절합을 통해 제시하는 셈이다.

     

    전반의 시간이 사물-존재의 네트워크를 움직임의 관점에서 연장해 냈다면, 후반의 시간은 비장소적 차원의 움직임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세계의 확장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움직임과 말의 비독립적 차원, 상응됨의 관계를 의문에 부치고 실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물론 그러한 지점을 고수하자면, 이 말의 함의는 우스꽝스러울 만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해독되지 않은 채 비의적 코드 자체로 닫히는 듯 보이지만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1. 1. 2021년 당시 공연이 2025년 재연된 것으로, 당시 관련 원고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17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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