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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세계〉: 불가능한 소통의 변증법적 귀환REVIEW/Dance 2026. 4. 10. 20:42

황수현, 〈세계〉©이지영[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황수현의 〈세계〉는 세계에 이르는 데 두 가지 다른 매체의 양식을 취급하는데, 그것은 신체 자체―존재의 이야기―거나 휴대폰―상호 연결의 분절된 대화―이다. 전자가 지엽적이고도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소구한다면, 후자는 너르고 또 닫힌 차원에서 관객을 스쳐 지나간다. 후자가 이미지라면, 전자는 말인데, 이미지는 텍스트를 신체에 새긴다면, 말은 이미지를 가정한다. 긴 후자에서 짧은 전자로 가는 과정으로서 〈세계〉의 변곡점은 곧 그 휴대폰을 공간 입구 맞은편 작은 테이블에 일제히 내려놓는 순간이다. 그리고 전동 블라인드가 올라가고 블랙박스가 한낮의 풍경 아래 재각인될 때, 이야기가 찾아온다, 또는 스며든다.
곧 텍스트가 정지되어 상영되는 화면의 그 휴대폰을 잡은 손을 반대편으로 튼 얼굴로 보내 슬며시 눈을 감고 마치 그 텍스트-빛에 의존해 중얼거리며 어딘가를 이동하던 신체들의 지속적 양상이, 그 전까지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였다면, 따라서 관객을 유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면, 더 정확히는 산만함에 안착될 수 있게 했었다면, 휴대폰을 놓고 놔서 세계의 연결된 상태 자체는 끊어진 것이 된다. 그것이 본래적 세계임을 드러내는 건 바로 전동 블라인드 개방 장면인데, 따라서 이것은 단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 아니라 거기에 부가되는 장면이다―그것은 실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그 자체로만 보았을 때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구현한 셈이 된다.

휴대폰에서는 세계가 울린다. 그들은 휴대폰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세계 안에서 휴대폰을 공유함으로써 잔향과 실재의 격차―시차적 연결과 분리된 편재 사이의 간극―를 가진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8명의 휴대폰은 동일한 하나의 휴대폰과 같다. 그것은 하나의 연결된 세계를 수신하며 그 세계에 기입되는 파편들로 ‘분화’된다. 휴대폰을 ‘갖지 못한’ 그 바깥을 떠도는 이들은 그 세계 안에서 ‘더욱’ 희미하게 발신되지만, 그것을 듣기보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것을 보기보다 그 발신의 광경을 수신한다(본다)―그의 귀는 휴대폰과 밀접하지만(‘듣는 귀’를 지향하지만) 단지 비유적으로만 그렇다, 그것은 스피커와 ‘떨어져’ 있다.
관객은 무언가를 말하는 거가 하나의 세계(의 입구)에 기입되(며 듣)는 것을 본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 울려 나오는 희미한 말과 그와 동시적으로 그 말이기 이전에 또한 희미한 그 말, 그 둘의 시차적 생산은 연결된 한정된 세계의 차원에서의 소외와 격리를 가져다준다는 실질을 안고 있는 공-세계의 허울을 이야기한다, 아니 이미지화하여 듣기의 필요성을 차단한다. “쉬/스” 하는 소리는 생명체라기보다 휴대폰의 통화시의 기저 진공음에 가까운 것 아닐까. 곧 내용이 아니라 환경 자체로 기입되는 신체-이미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의 소리로서 말이다. 관객은 그 존재들과 소통할 수 없으며, 그 존재들은 세계 ‘안’에 놓이고 있음으로만 기입된다.
이 세계의 무반성적 토대로부터 주어지는 게 산만함이라면, 분산의 심미화라면, 그것이 각각의 ‘자리’로서 안정화되는 건 이 빛 이후에 일이다. 처음 벽들을 단속적으로 띄어 바라보고 있는 개체들의 배에는 휴대폰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통화 중으로, 이 출산 ‘전’의 이미지는 알 수 없는 구음을 비순차적으로 내는 그 존재들이 그 안의 작은 세계를 품은 게 아니라, 그 작은 세계로부터 탄생함을, 곧 탄생의 주체가 전도됨―주체와 객체가 뒤집힌다.―을 또는 탄생의 시간이 전도됨―주체가 객체의 이전으로 돌아간다.―을 나타낸다.
그 출산이 탄생한 건 글자들, 문장들이 기입된 자동으로 빛을 생성하는 초소형 비석과 같은 것으로, 그 글자들은 이미 쓰였으며, 고정된 화면을 이룬다. 그 글자들을 관객이 응시하기는 쉽지 않은데, 존재들은 세계를 유동하며―세계의 ‘뱃속’에서 유영하며, ‘듣는 귀’로서 신체는 그 귀가 얼굴로 연결되며 전이된, 귀-얼굴의 신체로, 바로 귀와 얼굴, 그 틈을 봐야 한다는 것으로,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로부터 뒤틀리는 것, 곧 그 틈을 틈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자들은 이미지로서 일차 현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발화되어야 한다.’

후반 이들은 한 글자씩 문장을 소리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단어를 이룰 듯 말 듯하지만, 문장으로까지 확장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 소리-기표로 재처리할 때 그것의 직접적 효과보다는 문자-기의가 불완전하게 휘발된다는 유실의 간접적 효과가 강세를 보이게 되는데, 그로써 확실해지는 건 소리가 신체를 타고 나온다기보다 신체에 기입된다는 것이다. 곧 적힌 문자와 같이, 소리는 간격을 경유해 문자-이미지 자체가 반향되는/통과되는 텅 빈 매개체로서 신체를 ‘지시’한다. 몸을 앞뒤로 크게 진동하며, 헐떡이며 소리를 뱉어내지만 동시에 집어삼키는 것, 곧 하나의 음절로 ‘소급’시키는 행위로서 소리가 말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의도와 상관없이 관객을 포함해, 그보다 그 존재 자체에게도 ‘인식’될 수 있다는 건 그 같은 격차의 분절을 행하는 데 제약을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곧 의미를 연상시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상의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휘말리는 이 과정이 언어의 잔여적 질서의 차원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말들이 뱉어지면서 삼켜지는 것이라 한다면 과장일까. 곧 말을 분절해서 완전한 소리로 만들 때 역시 의미는 희미하지만 남는다. 또는 그 반대의 차원으로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의미는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며, 의미의 무의미화의 불가능성―무의미의 의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문장들은 의미로 갈음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계를 응시하고, 휴대폰을 후다닥 내려놓고 제각각 칸막이를 형성―우리의 신체가 본연의 아니 이전의 장소성이라고 하는 세계로 소급되었을 때―하여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그것은 분명히 어떤 문장에 가깝다. “숲속에 (따뜻해진/) 알루미늄 덩어리만 녹아 있었다.”와 같은 문장은 그 자신으로서 발화가 아니라 그 문장이 기입된 신체를 재생하는 것과 같다. 공교롭게 가장 가깝게 위치했던―모든 퍼포머는 각자의 다른 자리를 수호하고 반복하며 또 다른 자리를 수호한다―, 퍼포머의 문장은 휴대폰이 하나로 모인 세계의 비정형적 질서를 함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문학의 형식을 다만 추출해 온 것일 뿐이다. 그러니 ‘〈세계〉는 일종의 휴대폰 없으면 소통이 달성되고 세계는 자연의 모습으로 연장되어요!’와 같은 공익 광고의 한 모델을 수호하는 것일까. 세계가 휴대폰으로 잠가졌으며, 일시적인 해방은 그것을 소거할 때 열릴 수 있는 작은 틈과 같은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계〉는 동시성의 소통을 통해 지연된 소통의 차원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단속적 소리의 튀어나옴이 하나의 세계가 수용 가능한 부분이며, 그렇게 연결-종합되어 의미가 아닌 형식으로 자리할 때, 존재의 개체성은 고유한 것이라기보다 집단적 차원의 가장자리로서 귀속된다. 곧 소리는 우발적이지만, 그 반향은 존재가 아니라 세계로 ‘흡수’된다.
따라서 소통은 우리를 형성하기보다 우리라는 형상으로 존재를 묶는다. 그렇다면 휴대폰이 없는 세계로 우리는 돌아가야 하는가. 장소로서 창발되는 신체와의 대면을 통해 세계의 언어를 회복시켜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황수현의 〈세계〉는 소통의 가능성이 극대화되었을 때 언어의 불가능성보다는 언어의 불가능한 가능성 바깥에 위치하게 되며, 그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건 그 언어 자체라는 것을 발화한다. 그런데 그것은 앞선 문장처럼 세계의 되찾음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세계〉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를 가져가기보다는 그 상실감이 이미 유효가 다한 것이며, 우리의 자연 안에서도 여전함을, 우리가 그 절대적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음을 상기한다. 그래서 다시 극장 바깥을 나갈 때 우리가 되찾는 건 어둠일까, 휴대폰의 불빛일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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