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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 〈X〉: 인간과 기계 사이의 혼종적 존재
    REVIEW/Dance 2026. 4. 9. 22:02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 〈X〉©옥상훈[사진 제공=SAL](이하 상동).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의 〈X〉는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경계에 있다. 인간적임과 기계적임은 서로를 마주하는 가운데, 대자적 관계를 이룬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이지 않은 무엇이라기보다 분간하거나 판별할 수 없는 것, 모호하고 기이한 것으로서 진정 인간적임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의심하는 차원에서 결정되지 않는가. 〈X〉는 빈 무대와 거의 움직임만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여러 스펙트럼을, 분간과 변용의 절차를 수행하고자 하는데, 예외적으로 가장 기계적인 대상으로서 주유기는 이들을 기계화하는 동시에 기계로서 분별해 낸다.

    막이 걷히고 하수 끝에 선 나시를 입고 짧은 반바지와 검은 롱 부츠를 신은 채 주유기를 든 여자(서이진) 앞으로 나머지 존재들이 도열하여 있고, 그 주유기와 다양한 양태로 흡착-결합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원을 보급하는 중앙 통제 규율 장치와 구성원들 간의 위계 구도를 개체적 차원의 다양성을 발현하는 성적 관계의 차원으로의 이행으로 도착되는 기이한 지점이다. 여기서 여자는 팔루스를 지닌 독점적 권력 또는 대타자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그는 기계에 주유함―또는 주유함으로써 기계가 (그제야) 만들어진다―으로써 그것과 결합한다. 

    이때 화학 물질은 본디 기계의 것으로 단순히 기계에 충당되는 것인가, 따라서 기계로서 그 존재를 식별하는 데 그치는 것인가. 아님 그보다는 기계를 다른 존재로 근본적으로 변용시키는 것인가. 혹은 기계에게 인간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인가. 반대로, 인간을 기계로 변형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이러한 행위는 그 존재들을, 그 관계를 진정 모호한 것의 차원으로 둔다. 이때 변용되는 건 그 주유되는 화학 물질로 인한 신체 내재적 차원인가, 아님 기계의 능동적인 양태로부터 연장되는 인간인가. 위계는 전도되고, 질서는 유희로서 전용된다. 

    〈X〉는 포스트 휴먼을 다루는 근래의 무용 작업들을 연상시키지만, 그것과 미묘하게 분기되는 지점은 교합과 전이의 중간적 과정에 대한 부분이다. 곧 그럼에도 〈X〉가 포스트 휴먼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그것이 전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천명하기보다 반죽이 되고 있는 상태, 그 둘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차원을 현상하며, 이러한 과정은 인간과 기계의 합성을 성적인 차원의 실험으로 소급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신체적 변형―기계-되기―보다는 무의식적 심급에서의 상상적 변용의 차원―기계로서 인간―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종래 임신했던 여자에게 한 남자(권재헌)가 다가와 그의 비워진 배에 살구색 실리콘 가짜 배 모형을 착용시키며 불 붙은 담배를 입에 대어줌과 그 나머지 존재들이 한 명씩 등장해 검은 헤어밴드를 벗겨냄은 대칭되는 결말의 이미지인데, 이는 기계임을 탄로하는 것, 곧 생명체로의 가짜 연기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인간적인 무엇을 갖춘 기계를 가리키는 듯 보이는데, 탈부착되는 대상은 전자에서 인간을 표식한다면, 후자에서는 기계를 표식하는 것으로 모두 인간과의 구분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제스처 아닐까. 곧 전자가 인간적인 것을 차이‘로서’ 수용한다면 후자는 기계적인 것을, 기계의 일련 번호 표식 같은 동일자의 낙인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 기계의 이행일까. 무엇이 진정 인간적인 것이었던가. 처음 막이 오르기 전이야말로 존재들의 캐릭터성이 가장 현실적이고 명확한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때 생명과 죽음이, 현실과 극이 교차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검은 돼지 가면 같은 걸 착용한 존재(강현욱)와 그것을 조종하는 여자(안유진)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빗댄’ 사디즘-마조히즘 관계를 구성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면, 곧 그것이 의태로서 그러한 의상을 착용한 것에 불과하다면, 이를 존재의 심급 차원에서 재정초하자면,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관계로서 재은유된다. 

    인간-동물의 위계는 인간-기계의 위계로 치환되는데, 인간-기계의 수직적 도식은 여자의 기이한 양태로 인해 역전되는 듯 보인다. 여자의 행동은 어색한데, 그것은 여러 입력된 기호들의 산출 방식으로서 또한 인간 친화적인 아양의 행동 양식으로서 구분되며, 이는 자동인형의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둘의 긴밀한 관계성이 위계를 사랑의 기호학적 대상으로 변용시킨다는 것이다―사랑의 이행 아래 ‘위계’를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X〉에 나오는 것들 어떤 것도 부정성의 대상으로 처리한다고 보이지 않는데, 이는 두 존재의 교류가 일종의 결과가 아니라 목적에 가까워서가 아닐까. 

    곧 기계적 이행의 장면들은 단순히 강제된 양식으로서 외부적 차원에서 ‘주입’되는 게 아니라, 타자성의 함입을 무의식적으로 긍정하는 차원에서 수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는 인간과 기계의 교착된 상태, 혼재된 기호의 양상 아래 놓이는데, 주유기의 화학 물질 주입이 기계보다는 진정 그 바깥의 인간의 신체적 변용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은 양방향적이고, 최종 섹스의 형태로 낙착된다. “X”는 미지의 존재 혹은 대상을 보통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인간과 기계의 분별할 수 없음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기원이 아니라 타자성의 함입에 대한 욕망으로 소급되어 간다. 

    또한 객석에는 생명의 지연된 서사들을 대비시키는데, 곧 트렁크에 인간을 반으로 접어 넣고 끌고 오는 남자(윤혁중)는 시체 처리의 범죄자보다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다른 생명의 재생시킴을 예기하는 차원―그 시체의 처리가 아니라 수용의 차원―에서 자연스런 생명과 연동된, 어떤 생명체를 ‘유예’하고 있는 임산부(이지수)와 대비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선 결말에 대한 언급처럼 임산부는 가짜의 형상을 마지막에 재조립한다. 따라서 존재는 어떤 것도 결코 확정적이지 않은데, 이는 인간적인 형상의 기계들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서 관객을 튜링 테스트 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여기에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걸친 남자(유재성)와 같이 객석의 빈자리를 파고들면서 현실의 혼재됨을 기입하는 존재도 함께 출현하는데, 물리적인 막이 오르기 전의 무대 중앙에는 얼굴을 하얀 붕대로 싼 채 하얀 바지만 입은 남자(최호종)가 기우뚱하면서 극장 전반에 시선을 누비는 중이다. 전자가 극과 현실의 경계를 시험한다면, 후자는 그것을 지시한다. 후자의 남자는 막의 입구를 지시하지만 동시에 인간과 기계의 문턱을 표시하기도 하는데, 그 자신이 가장 작위적인 차원에서 기계의 몸짓을 갖고 있다. 

     

    남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전적으로 인간(의 편)도 전적으로 기계(의 편)도 아닌, 일종의 트릭스터로서 위치하며, 그 나머지 존재들을 튜링 테스트 하는, 존재의 문턱으로 위치한다. 이러한 뚜렷한 경계의 표지는 금속 물질의 매끄러운 운동성으로, 곧 누워 있는 상대에게 거꾸로 올라탄 교미의 자세와 같은 검은 가죽 의상들의 움직임으로 밀려나며, 무대 안쪽에서 한 무더기를 이룬 존재들 위에서 임산부가 출산의 과정 아래 있고, 그 아래 구멍에서 한 생명체가 스르륵 빠져나오자 마자 어떤 힘의 양상으로 증폭되고, 그 순간에 인간과 기계의 식역은 결정적으로 뒤집힌다―그것은 튜링 테스트의 범주 ‘바깥’에 있다. 그리고 호스와 연결한 주유기로 실제 액체를 그에게 난사하자 그는 팔딱이며 부상한다. 

    거기에는 경고의 신호, 곧 사이렌을 인간의 소리 지름이 파고드는 음악이 있고, 이는 실제 무대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존재와 동기화되며 경이 대신에 파국을 향한다. 탄생의 고통을 표기하는 신음을 석유의 주입 이후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대치하는 것에 의해 이 파국은 기이하고도 모호한 것이 된다―임산부는 아이를 낳은 것인가, 그것은 죽은 기계를 되살려낸 것에 불과한가. 이러한 혼란은 기계의 세계로 완전히 ‘빨려 들어감’으로써 종식된다. 

    곧 상수 아래쪽에서 하수 위쪽으로 흐르는 끝없는 사선에서의 등장·퇴장을 경유한 정렬, 활인화의 영상이라는 환시를 만들어 내는 ‘컨베이어 벨트’ 장면에 이르러, 기계는 거대한 틀-기계의 차원과 접속, 연합하며 생명의 다른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구가한다. 이는 트랜스되는 음악이 주는 황홀경 아래, 속도로 치환된 충동과 쾌락의 어떤 지점으로서, 생명의 신비와 혼란을 급작스럽게 해소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컨베이어 벨트의 물질성을 오히려 직접 현시하는 건, 다음 무대 안쪽에 내려온 금속 봉들로, 집단적 움직임과 힘을 기계적 물성의 매끄러움과 차가움, 그리고 안정화된 사태로 대체하는데, 이때 소음이 퍼지고 세게 진동하면서 거기에 떨림의 착시를 부여한다. 둘만이 남은 무대는 지배 관계로 급변하는데, 전신 가죽 의상의 여자(서이진)가 마침내 페인트를 남자(유재성)에게 칠함으로써 그러하다. 

    이후, 검은 의상을 입은 남자(권재헌)가 등장하는데, 그의 배께에 배가된 오브제, 원-구멍에서 바깥으로 방사되는 뭉툭한 선분들의 그 오브제는 부풀어 오른 젖소의 젖을 닮았다. 이는 탈인간으로서 기계의 생명을 보충하는 가스 주입구이거나 새롭게 외재화된 성기가 아닌, 인간과 다른, 인간과 유사해지는, 생명 자체를 ‘짜내는’ 생명 연장의 기호가 된다. 그가 흰색 포대에 묶어 끌고 온 시체(안유진)를 떠안은 흰색 옷의 남자(최호종)가 비명을 지른다. 

    탄생의 신음은 죽음의 신음으로 바뀌는데, 이는 두 다른 감정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기보다는 절망의 두 다른 판본을 병치시키는 것으로, 그 둘이 손바닥 뒤집기처럼 붙어 있으며, 하나의 강도로 환원됨을 의미한다. 기계-인간의 탄생은 인간의 죽음으로 이행하고, 그 사이에서 인간과 기계의 중간자적인 존재인 트릭스터에 의해 매개시키는데, 그의 감정 표현은 한 인간에 대한 슬픔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기계 대 인간의 대칭적 구도가 완전히 기계로 기울었음을 의미하는 장면으로 융해된다. 

    공연 후반에 가짜 가슴과 배를 매달고 있는 기계에게 아기가 전달되는 순간은 기계의 출산 능력을 암시한다. 이후 얼굴은 노출한 채 검정 전신 수트를 입은 인간화된 기계의 세상이 펼쳐진다. 쉼 없는 펌프질로 에너지를 창출하고 극한의 가속성과 운동성을 생성해내는 검정 무리 중에는 흰색의 그도 함께한다.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초인적 존재가 된 그들은 인간을 연기하기도 하지만, 공연 뒤에 흰색 의상의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목에 남겨져 있는 숨겨진 검정 마크는 기계로서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백색소음 아래, 다시 봉들이 올라가고 행렬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에 비해 모든 것들은 침강하는데, 집단으로 모여 한정된 사이에서 몸의 축을 구조화하며 일정한 힘을 내부로, 그리고 외부로 연장하는 군무로 회집되지만, 역청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주유기를 든 존재에 흘러내리는 물질 등으로 해체된다. 이제 앞선 결말이 시전되는데, 두 존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장면은 그 실리콘 오브제가 가짜 임신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호로서 탈부착할 수 있는 의사-임신의 차원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그것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 기계의 또 다른 탈부착 이미지로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머리띠는 기계임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인간화, 기계의 인간과의 구분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더 이상 그것으로써 기계임을 표식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곧 전자가 기계가 인간을 흉내 내기보다 인간-되기의 차원을 선택하는 어떤 기로에 서 있는 것이고, 생명을 낳기 위한 인간의 신체적 조건이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명시한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표식하면서 동시에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해체됨을, 무의미함을 표식한다―머리띠는 기계의 거부가 아니라 기계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저항보다는 무의미함의 행위에 가깝다. 〈X〉의 이 무의미성은 기계의 인간으로의 진정한 변혁도, 기계적인 것을 경유한 인간의 갱신도, 기계와 인간의 결합으로써 새로운 관계성의 창출도 의미하지 않는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인데, 따라서 그 결말은 공허하고도 무력하다.

    이는〈X〉의 의도가 정확하게 주요한 것일까. 아님 필연적으로 (탈)승화되는 작품의 기전에 미처 도달하지 못해서인 것일까. 〈X〉의 안무적 공식은 동명의 책자에서 매우 성실하고 꼼꼼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감정-이미지와 바로 결부되는 각 캐릭터가 지닌 동작들의 세부에 대한 축적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어쩌면 한 땀 한 땀 잇는 세부 동작들의 종합으로 〈X〉를 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그 동작들이 역설적으로 모두 유의미하고 심미적이더라도―그것은 마치 그보다 더 정교하고 세분화된 음악과 절대적으로 ‘합치’되기 위해 움직임이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 말이다. ―, 더 큰 단위로서의 유효성, 곧 어떤 시퀀스인지가 흐릿해진다면, 그리고 그 시퀀스들이 그 자체로서 어떻게 더 큰 단위의 서사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의심과 검토가 (기입되지 않은 것처럼) 수행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X〉는 그저 ‘다른’, 이색적인 섹스를 경유하기 위해 기계를 도입한 것으로 또는 퇴폐적인 향연의 차원에 집착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것이라는 오해에 대한 위험을 갖(고 사실 그것을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않)는데, 사실은 그것이 본질일 수도 있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인간이든 인간을 반향하는 기계이든 간에 한 존재가 또는 두 존재가 얽히면서 함께 갱신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재)위치시키는 것 말이다. 

    애초에 비규범성은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의 주요한 코드이며, 포스트휴먼으로서 기계의 관념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마련한 그럴싸한 규범의 도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내재적으로 묻는다면, 기계와 인간의 섹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서로를 향한 변용과 같은 이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결국 타자성을 향함과 절대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서로를 공유하는 지점을 지시하지 않는가. 〈X〉의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교합이 끝나고 난 지점, 곧 하나의 존재로서 안정화됨으로써 더 이상 타자성을 갈구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과 같지 않은가. 

    따라서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의 행보는 근본적인 욕망의 해소가 아니라―그것은 일종의 허무한 결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욕망이 쉬이 전치되고 굴절되며 뒤바뀌는 자리의 영속성을 인식하는 것, 곧 그 욕망의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이어 주체의 해방으로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욕망은 전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의 불가능성을 탐문하며 그 식역으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지며 하강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오히려 전적으로 퇴폐적인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인간에 대한 결정적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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