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주,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 세계의 경계를 지우는 이미지REVIEW/Visual arts 2026. 3. 11. 19:59

노예주,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 포스터. 노예주 작가의 회화들, 그리고 일련의 글이 덧붙여진 전시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은 크게 전시 공간인 합정지구의 1층과 지하의 구분을 따라, 각각 인물과 사물 혹은 인물과 배경으로 나뉜다. 이러한 대상을 기준으로 한 구별은 피상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준 이외의 것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이는 하나의 더 큰 지층에 따른 것이며, 그러한 구분은 그에 따른 구체화이자 다른 세부의 범주라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곧 인물이 초상의 모델로 작가에게 대상으로 직접 수여되거나 배경 역시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작가 스스로가 위치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현실’에서 포착, 재배치된 것이라는 사실, 따라서 그것들이 하나의 현실의 일부이자 어떤 ‘현실’로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는 차원에서, 인물과 배경은 출현한다.
현실은 휘발되는 순간에 불과하며, 따라서 우연하게 발견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현실의 맥락은 두껍다. 두꺼운 맥락을 좇는 너른 시간 분포 안에 그것이 ‘포착’된다는 점에서, 순간은 의미의 지층 안에 발굴되는 것이고 또한 역사의 지층을 ‘재구성’한다. 이는 일종의 기록의 의미를 띤다. 나아가 그 기록자의 관점이 준별되어야 한다. 기록의 차원에서 인물과 배경/사물은 분명히 구별된다. 그리고 시위 현장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인물들은 그 운동의 주체―〈모든 해방을 원한다〉(2024. 캔버스에 유채, 97×162.2cm.)―이거나 운동의 현장 안에서 긴장감을 유지―〈서로를 지키는 우리는〉(2024. 캔버스에 유채, 100×80.3cm.)―하고 있거나 그 운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려는 마스크를 쓴 경찰들의 모습―〈우리를 뒤로 하고〉(2024. 캔버스에 유채, 130.3×89.4cm.)―을 다룬 작품 등이 있는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면의 두 작품 〈균열없는 혐오〉(2024. 캔버스에 유채, 53×45.5cm.),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2024. 캔버스에 유채, 60.6×45.5cm.)로 이어지는, 지상과 지상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공간에 배치된다. 반면, 지하에서는 주로 사물과 배경으로서의 이미지가 자리한다.
인물들은 그 순간으로 수렴하며 사라진다. 반면, 사물은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역시 존재하며 흔적을 쌓아가며 기억의 매개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농성장”이라는 제목의 단서를 제한다면) 특정한 시간의 지층을 지정할 수는 없다. ‘시위 현장’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배경, 출발점이 전제될 때 그것은 순간과 순간들을 포함한 역사의 지층으로서, 하나의 장소가 하나의 사건이 종합된다. 인물은 발화의 주체이거나 비주체로서 현장에 연루된다면, 노예주가 주목하는 건 그 존재들의 거기에 있음 자체이다.
발화라는 초점, 곧 발화의 내용과 맥락이 가리키는 구체성은 하나의 장면이 되는데, 여기에 그것을 본다라는 사람의 지각이 부각된다. 곧 현장에는 그 현장의 당사자, 연루된 자의 예외적 성격의 존재가 자리하고, 그것이 현장의 비스듬한 시선, 그리고 사건의 주변, 사건의 흔적을 담은 배경과 사물에 대한 주목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현장은 재구성되고 창조되는 것인데, 그것은 정형화된 형식을 벗어난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예술의 역량은 역사의 흔적을 좇는 것이 아닌 흔적들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그 역사의 창조는 과거를 재현해내기보다는 장면으로서 기억을 현동화하는 방식을 따른다. 곧 보이지 않는 주체는 개념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를 개념화하며, 이에 따라 새롭게 기억은 현장을 잠식한다.
그것이 전체적인 색을 제한다면, 비교적 사진이라는 매개를 반영하는 사실적 양상을 띠고 있다면, 1층의 〈사람있어요〉(2024. 캔버스에 유채, 116.8×80.3cm)와 지하의 〈투명한 저항〉(2024. 캔버스에 유채, 100×80.3cm)은 형태적으로 조응되는데, 이는 하나의 배경으로서 물질적인 표면으로서 그러하며, 전자는 그 배경이 사람‘으로 식별’된다면, 후자는 순수한 배경 차원으로 남는다. 클로즈업된 사람은 너무 명백하게 화면을 잠식하면서 배경의 차원이 된다.
거기에 그어진 회화적 질서와 자율성에 입각한 자의적인 선들의 배치는 후자의 횡단과 접속의 선과 대별되면서 동시에 흔적으로서 공명한다. 장면에 새겨진 창조된 흔적과 흔적으로서 장면의 재현은 분별됨에도 각각에 부여되는 회화적 행위는 각각 밋밋하고도 거대한 일상의 한 흔적을 수행사적 보족으로 완성하거나 흔적 자체를 뒤따르는 행위 자체를 회화의 형식과 일치시킴으로써 장면을 새롭게 창조한다. 뚜렷하게 부각되는 인물들, 사실적인 회화의 표면에는 변형된 회화적 질서가 부착된다. 가령 파란색 톤으로 주조―〈우리를 뒤로 하고〉―되거나 배경이 무지갯빛으로 각각의 인물들과 동화되어 나타나거나―〈모든 해방을 원한다〉―.
기록의 재현적 특질은 그 양태가 갖는 뚜렷함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고 동시에 오인되기도 한다. 작가가 창조하는 장면은 재현으로부터 출발함에도 회화적 자율성에 따른 변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장면에 부착되는 건 기록의 사실적 차원보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정동적 차원이다. 따라서 앞선 배경의 무늬들, 그리고 나아가 무늬들 자체로서 배경의 특질들은 노예주가 주목하는 새로운 이미지이자, 노예주에 의한 새로운 이미지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파란색 바탕에 하얀 점들로 이뤄진, 또는 배경의 얼룩들로 쌓아 올린 푸른 상공에 피어나는 구멍-빛들의 〈낮에만 보이는 별〉(2024. 캔버스에 유채, 100×80.3cm.)은 크게 투쟁의 비가시화된 존재에 대한 현상과 현장에 투여되는 공백의 시선으로 양분되는 전시를 신화의 알레고리로 매개한다. 그로써 역사의 법칙이 자연의 순수한 질서를 향하게 된다. 거기에는 믿음이 있다. 비가시적인 것을 볼 수 있거나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건 모든 것을 조망하는 시선에 대한 믿음이다. 매개하는 신체가 공백의 자리를 대신할 때이다. 그것은 ‘밤’에만 보일 수 있는 별을 보게 한다. 또는 믿게 한다.
그 옆에 자리한, 금이 간 벽의 형상을 그린, 〈투명한 저항〉(2024. 캔버스에 유채, 100×80.3cm.)은 수많은 발화와 분투에 대해 역사적 손금이라는 알레고리로 격상시킨다. “투명한” 것 안에 담기는 주체의 의지는 〈낮에만 보이는 별〉의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에 상응한다. 〈낮에만 보이는 별〉의 믿음의 빛은 〈문〉(2024. 캔버스에 유채, 145.5×97cm.)의 문이라는 프레임 아래 바깥을 내다보는 광경에 문과 그 풍경에 침투하는 파란 얼룩들로 뒤집혀 구현된다. 그것은 전면에 투사되며, 안과 바깥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데, 안과 바깥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공고한 형상, 믿음의 형상이 세계의 경계를 지우고 있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연서 Cha Yeonså, 《살도 뼈도 없는 나에게 Feed me stones》: 훼손, 조율, 바깥으로서 애도 (0) 2026.03.11 정혜원, 《순환하는 매듭, 완결은 없습니다.》: 형상들을 가설하기 (0) 2026.03.10 김남수 기획, 《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여성-신체, 생태-길, 구멍-응시의 연결망 (0) 2026.03.07 유선, 이은경, 〈생존감각 - 여와의 방〉: 존재를 함입하기, 그리고 변화하기 (0) 2026.03.07 2024 광주비엔날레: 소리라는 형식 (0) 202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