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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 그림자가 된 전통》(총괄 기획: 강정아): 기괴한 것들로부터REVIEW/Visual arts 2026. 3. 12. 14:33

《둔주: 그림자가 된 전통》(이하 《둔주》, 총괄 기획: 강정아)의 제목인 ‘둔주’는 해리성 장애의 일종으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장소를 이동’”함을 의미하는데, 장소성 없음의 당대적 특성은 부제에서처럼 전통이 그림자화된 곧 영락해진 현상과 결부 지어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그 비어 있는 주체의 몫이 타자성을 안은 존재라면, 그것이 시간 차원에서 간극을 지닌 전통으로 옮겨지게 되는 셈인데, 이때 전통은 빛을 비춰 그 오지각된 현상으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결론을 향하게 된다. 곧 부정적 차원의 귀결은 타자성의 차원에서 재수용해야 하는 그 너머의 주체의 자리를 현상한다.
《둔주》는 쇠잔한 도시를 전시 장소로 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타자로서 지역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전시를 보게 됨을 의미한다. 핵심 장소인 구 판교극장과 소수 작업이 전시되는 구 닭집이 그곳인데, 대부분의 작업은 주체에 대한 타자적 지각의 수용을 통한 반성적 태도의 진작을 꾀한다고 보인다. 곧 비판적인 성격을 갖는데, 이는 수도권의 주체를 공략한다. 지역과 전통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귀환하며 실재성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다분히 멜랑콜리적인 정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이 장소가 결정짓는 부분이기도 하다. 환경과 플랫폼과 작업은 응전할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에서 작업은 대체로 비판적 성격을 전제하게 된다.
아마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장시재의 〈틈에서 자라는 것〉(2021. OPP 테이프, 와이어, 우레탄 바니쉬, 800×500×600cm, 가변 설치.)이라는 1층과 2층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작업으로, 2층에서 보면 커다란 손이 나무 골조 위에 올라가 있는 형상인데, 그것이 발원하는 지점이 시각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공간을 초과하는 셈이라 불길함을 강화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신체의 정위되지 않은 차원 역시 주요하게 자리하는데, 이는 첫 번째로 그것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가 조망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로 오로지 손과 팔의 결합들로만 이뤄진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붉은색의 핏빛 속살과 검은 피부 조각이 얽혀 있는 저명도의 색상, 곧 피가 응고되어 드러난 속살 위에 붙어 있는, 애초에 그 속이 전도되어 있는, 지나치게 기다란 팔과 손들이 하나의 전체적 형상을 흉내 내고 있는 이 존재는 일종의 괴물로서, 그것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고 퍼져나가는 가운데 단편적 이미지들이 시차적으로 산출―미끄러지는 시선―되면서 그것의 얼굴과 같은 다른 여타 신체에 대한 환시로 연결된다. 이는 공간에 틈입하면서 분기되는 조각의 파편적이고 초재적인 장소성으로 인해, 어쩌면 우리가 생명체로서 기능하는 신체에 대한 전형적 인식으로써 무의식적인 봉합을 초래하는 결과로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틈에서 자라는 것〉은 〈시지프와 테세우스-자라는 것들에 대한 질문〉(2022. 단채널 비디오, 29분 6초.)에 나온 을지로 뒷골목에 대한 장소에서 기인하는 상상력이 연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곧 오래되고 허름한 그리고 좁은 틈으로 갈음되는 장소성, 그리고 무엇이든 다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제약 없는 상상력이 연장된 순수한 창조의 역량으로서 서사가 그것인데, 이때 을지로 특정적 상상력은 기계 공학적 차원에서 결부되는 사물의 감각을 평범한 일상 공간의 연장에 있는 장소로 이전하면서 불화를 일으킨다.
《둔주》는 판교 자체의 장소 특정성을 그 자체로 접근하는 대신, 여러 다른 지역에서의 전통의 그림자를 이곳에 이식함으로써, 판교라는 장소성을 이화시키며 가시화하는 데 가깝다. 장시재의 작업이 그러하듯, 전형진의 다큐멘터리 작업 〈지정번호 82-3 기록〉(2025, 1채널 비디오, 18분 48초, 가변 설치.) 역시 판교가 아닌 지역을 다루고 있다. 부안 지역의 띠뱃놀이가 그것이다.
바다의 풍경에서 블랙아웃되며 텅 빈 마을 풍경을 비추는 도입부는 기도하는 할머니와 앞을 무심히 보고 있는 할아버지로 이어지며 더딘 시간 자체를 현상한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 독거노인은 외출을 삼가라는 마을 안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방송은 닫힌 생명력의 차원을 강화한다. 이는 이후 배를 띄우는 진수식과 무당의 굿을 파편적으로 포착하는 대부분의 역동적이고 분주한 광경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풍습이 관습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만 진작된다는 작가의 비판 의식은 오로지 도입부와 그 이후의 절단된 시간 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듯 보인다.
곧 적막한 마을의 실재가 의식을 위한 마을 차원의 일시적 결속의 차원에 대한 하나의 틈으로 파고들 때만 비판이 가능해진다. 이는 마을을 추동하는 예외적인 힘이 마치 인위적이고 관성적으로 이뤄진다는 걸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일종의 형식에 대한 완수로서 진정성이 전통의 본질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실상 모든 것을 구성한다면, 이를 그 토대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형식이 마을을 마을로서, 일상을 일상으로서 여전히 구성하는 거의 예외적 차원에서의 상징적 표지라면, 그것을 부정할 때 본질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인 것일까.
장소를 다루는, 그러니까 이곳과 다른 장소가 이전되는 또 다른 작업으로, 김재민이의 〈we grow rice(with Le Brother)〉(2023, 3채널 비디오, 9분.)가 있는데, 이는 전형진의 작업과 다른 접근의 태도를 보인다. 베트남 작가 Le Brother와 협업해 한국과 베트남의 볍씨를 섞어 베트남 땅에 농사짓는 과정을 스펙터클한 풍경과 함께 어떤 언어 없이 스케치하는데, 이는 중간중간 셋이 정면을 응시하는 감속된 이미지 구간을 통과하며 의도적으로 연출된 작위적 상황을 그 셋이 견딘다는 인상을 준다.
이때 묵묵한 두 사람에 비해 미소를 띠고자 하는 김재민이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그 둘과도 이질감 없이 동화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원주민 되기의 차원은 인터뷰 구간을 대체하는 일관된 소리 없음의 연장에서 김재민이의 미세한 차이를 다른 세계의 질서와 이미지 사이에서 봉합하는 기술로써 구현된다. 그리고 그건 우스꽝스러운 숭고로 결정(結晶)되는데, 그것은 물론 결정(決定)적이다. 이때 그 형식적 차원의 노동과 태도가 장엄한 이미지와 작위적인 평화와 연대의 차원을 구성하는 본질인 것이다.
김재민이 작가의 〈염전의 추억〉(2025. 3채널 비디오, 12분.)은 일본, 대만, 중국 등의 여러 염전 관광지를 좇아다니며 그곳의 일차원적 서사를 소개하고, 나아가 염전을 체험하고 물을 수집해 오는 퍼포먼스적 행위에 대한 기록을 더한 영상 작업으로, 그 옆에는 2023년 “유사논문” 「부산의 ‘부’는 소금가마 釜」가 놓여 있는데, 이 논문이 사실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 논문은 제목과 같이 “용호동 분개염전”을 경유해 “부산의 지명과 염전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전까지 맛과 지역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관적 의견들을 피력한다.
17세기 중엽 ‘부’ 자가 부유할 부에서 지금으로 변경된 부산이라는 지명이 산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가마 모양으로 불룩 올라온 언덕”―이 아니라, 소금 염전으로부터 나왔다는 잠정적 결론은, 산과 소금 염전 사이에서의 이미지적 상상력을 가정하는 셈인데, 곧 소금 염전의 가마 이미지가 선행되어 있어 그것이 물리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산에 투사―“적어도 신라시대부터는 기록에 나오는 염전, 그리고 산재했을 소금가마의 존재가 부산 지역의 산 지형과 더불어 이름을 자연스럽게 정착시켰다는 추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명이 당대 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의식에 저장된 대표적 이미지라는 전제를 산출한다. 그리고 이 의사 논문의 메시지는 더 심층적 차원에서, 그 지역 안에서의 특별함-고유함의 가치를 그 삶의 역동적 변화 과정에서 산정하고자 하는 것에 있는데,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틈”에서 발견된다. 곧 지역성을 상실한, 잡다하게 좋은 것들로 덕지덕지 치장한 서울이 아니라, 그리고 단지 박제된 유산으로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삶에 스며들어 있는 과거의 것, 삶을 추동하는 것 안에서 발견되는 과거의 것, 그 공동체의 현재적 자산의 미덕을 긍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역민으로서 열등감 역시 들어있는데, 이는 상대적인 것으로, 베트남 여행에서 느꼈던 그가 평소 생각지 못했던 도시인의 정체성은 그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저자는 지역을 브랜딩하는 서사의 얄팍함―이는 공공미술의 조각물로도 이어지는데, 저자는 공공미술의 작위성에 대한 반감을 표하기도 한다.―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에 대한 솔직함에 기초한다. 애초에 저자는 하드커버로 된 논문 형태가 주는 권위가 격상된 신분 인증이라는 상징계적 약호임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동경하는 자신을 그로부터 추출하면서 셀프 브랜딩 차원의 자아와 그것에 대한 직시를 통해, 조소적으로 자아를 확정한다. 이 저자의 겸허함의 태도는 일종의 자기 성찰의 태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현상을 대하고 바라보는 이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이, 곧 그 현상 자체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
윤결의 〈등을 타고 오는 목소리〉(2021. 단채널 비디오, 15분 42초.)는 전통을 분자 구조 차원의 이행적 흐름이 지닌 정동으로 각색하는 듯 보이는데, 숨소리에서 시작된 영상은 분자들이 합쳐지는 그래픽으로 상징적인 원-장면을 구성한 이후, 전남 무안 각설이 전영선, 그리고 품바 오동팔의 현재로 차례차례 옮겨간다. 앞선 그 흐름은 구체적 재현이 아닌 은유적 메타포로 갈음되는데, 이는 그래픽 화면이 보여주는 비가시적 차원의 내부와 그 안의 세포적 차원의 이행으로부터 역사적 차원을 초월하는 공통의 서사가 성립될 것임을 예기하는 것과 맞물린다.
곧 무정형의 단일 평면으로서 세계 안에서 그 분자적 이행은 하나의 평평한 세계에서 흩어졌다 모이는 단순한 차원으로 선명해지며, 그럼으로써 ‘모이고 흩어진다는’ 하나의 법칙 아래 영속하면서, 어떤 이행의 충동이 낳는 자의적 결과, 우연성의 조합으로 인한 다양성의 양태 자체를 수용하게 된다. 윤결은 메타포 차원에서 주체를 특정하지 않는 공통의 주어를 설정하고, 그 주체의 이행의 진리를 이미지적으로 전제하고 언어적으로 연장함으로써 예외적 존재들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차원으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내어 보지 못한 목소리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라는 한곳에 머물지 않았던 어떤 존재들을, 그러니까 예외로서 성립되는 것들을 하나―“내어 보지 못한 목소리들”―로 통칭하는 뒤집기의 기술을 경유함으로써 그것이 자의적인 양태들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이행적 흐름 안에서 그러했음을 상정한다. 역사의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 존재들은 상징적이고 통상적인 차원의 시점으로서 언어적 권력으로서 “글”을 대립하는 차원에서 전제하면서 그 예외의 것에 ‘혐오’가 쓰이고 그것들이 가시화되건 축출되는 대상으로 식별됨을, 그리하여 그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문장들에 따르면, 가령 ‘그곳에 머물 수 없는’ 존재로서 “우리”는 “여전히 없”는 존재가 되는데, 곧 억압적 차원으로 소급되는 ‘우리’는 그 행위로 인해 ‘우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태로 전환된다. 반-존재적 양식의 호명은 비-존재적 양식의 식별로 연장된다. 예외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그 바깥의 권력이며, 그 예외를 축출하여 개체로 소급시키는 것 역시 그 권력이다. 따라서 이후 전영선과 오동팔은 역사의 비형상들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순수하게 따라 가는 것이 영상의 주요한 임무가 된다.
칼을 가는 손을 퍼런 화면의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칼 가는 소리가 디제시스 화면을 지배하고, 오동팔이 부르는 “우리 어매 무엇 할라고 날 낳았던가”와 같이 한의 정서를 간직한 나훈아의 〈어매〉가 디제시스 바깥의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데, 그것은 일부러 주체를 소거하면서 한 축에서는 대상으로 그것을 옮기고 다른 한 축에서는 목소리로 선명하게 함으로써 기이한 정동으로 주체가 압착된다. 한의 존재적 표상은 어머니-자식이라는 근본적 관계의 차원을 경유해 또 다른 한의 정서를 표출한다.
“빠져나온 작은 알갱이는 그 무엇으로도 변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변형”은 “매섭게 달궈진 쇠 작은 틈 사이 장단이 되어간다”라는 것처럼 야금술적 차원의 변용을 경유해 음악적인 것으로 격상하는데, 도주/이탈이 곧 또 다른 변용의 이행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은 다시 퀴어의 예외적 존재의 자리를 수여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이 전환된 주체, “눈부신 알갱이”는 “여자도 남자도 / 남자도 여자도 아닌 / 그렇게 없던 존재가 되어 / 깊은 그곳에 가라앉”는다.
전영선과 오동팔이라는 여자, 남자의 대등한 비율의 성별 차이로써 영상을 구성한 건 이 말을 경유해 표층적 차원의 성별 구분으로 한정되지 않는 예외성으로서 퀴어성 자체의 확장된 범주를 꾀하는 것과 같다. 곧 퀴어가 아니라 퀴어성을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퀴어의 불분명한 식별, 식별 자체를 무력화하는 지점의 존재들의 양태와 역사로부터 밀려난 예외의 존재를 겹쳐 놓음으로써 〈등을 타고 오는 목소리〉는 존재론적 (비)형상을 확장한다.
《둔주》가 그려내는 이미지가 곧 그림자가 아니라 전통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전통을 다루는 작가들의 작업에서의 다양한 양태, 그로부터의 태도와 관점의 차이를 이러한 비판적 테제로서 전시가 그 작업들을 그와 같은 하나의 관점으로 종합할 수 있느냐라는 지점은 분명 과제인 동시에 딜레마다. 전통을 다루는 작가라면, 분명 그것에 대해 긍정적인 차원을 숙고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림자가 되어 버렸기에 쓸모없는 전통이 아니라, 그림자가 된 전통이기에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전도로부터 전시의 비판 역시 뒤집힐 수 있는 것이다.
전형진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전통의 공고함 뒤의 비어 있음에 직면하는데, 이는 전시명에 가장 부합한다. 선녀의 신화적 도상과 그것을 재현하는 전통 의례의 도상들을, 초점이 나간 흐릿한 이미지로 구현하는 최수련의 회화 작업들은, 그 회화적 도상으로의 용해 대신에, 어렴풋한 전통에 대한 향수와 취미를 각인시키는 데 가까운데, 이는 그림자가 된 전통에 대한 비판적이지 않은 관점일 것이다. 김재민이의 유사 논문은 단절된, 말 그대로 그림자가 된 전통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차원의 그림자―융의 무의식―로서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과거와의 역학 관계를 추적, 탐구하는 데 흥미를 보인다는 점에서, 전통에 대해 조금 더 입체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강정아의 기획은 대체로 작업 자체보다 작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태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작업들의 양태적 차이가 매끈하게 진열되는 것과의 거리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장시재 작가의 초과됨이 거북스러움을 안기는 것처럼, 비판의 일면은 이러한 작업들 간의 부조화뿐만 아니라, 작업 자체가 주는 기괴함에서들 체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규모가 큰, 방대한 작업들을 모은 이 전시의 세부 작업 면면을 모두 살피고 그 관점의 차이와 양태적 차이에 대한 식별을 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그 작업들의 괴리와 간극, 그리고 각 작업의 기괴함들로 인해, 전시는 산만하고 부조화스러우며 관객의 부적응의 사태를 낳는다. 이는 통일된 시각적 미감의 적절함과 쾌감이 일종의 폐쇄 담론을 위한 봉합의 기제일 수 있음을 역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진정 예외적인 ‘차이의 전시’라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크레디트]
* 작가: 김동희, 김소라, 김재민이, 노드 트리(이화영, 정강현), 신익균, 쑨지, 윤결, 이호억, 전형진, 정한결, 장시재, 최수련
* 예술감독: 박종찬
* 총괄기획: 강정아
* 프로젝트 매니저: 김은성
* 디자인: 파이카
* 공간 디자인: 강해진
* 협력: 히스테리안 출판사
* 주최: 아트스페이스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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