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신영, 《Hinge》: 이음매의 시간REVIEW/Visual arts 2026. 4. 9. 22:24
1

박신영, 《Hinge》[사진=Gallery Komplex](이하 상동). 박신영의 《Hinge》에는 제목에서처럼 ‘경첩(hinge)’을 본뜬 몇 가지 사물들이 놓인다. 경첩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사물 A와 B의 이음매를 구성하며 둘을 연결하면서 비로소 기능하는데, 보통 문틀과 문짝을 잇는다. 그것은 그 둘에 포개지며 보통 비가시화되는데, 《Hinge》의 경첩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실은 절반의 경첩을 품은, 그것을 대신하는 통째로 된 사물들로 주조된다―〈#10〉(2026. Glazed Modeling clay, glass, fired at 900 - 1220°C, 81×15×6cm.)/〈#9〉(2026. Glazed Modeling clay, glass, cloth, fired at 1220°C, 112×40×4cm.)/〈#7〉(2026. Glazed modeling clay, glass, fired at 900 - 1220°C, 23×25.5×20cm.)―. 서로 닮은 두 다른 형상은 각각의 끄트머리―연결부―로부터 짝패를 이룬다. 매개를 향한, 매개를 가정한 이 두 개 이상의 형상들은 또 다른, 제3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매개 없이, 매개로서 존재한다. ‘경첩으로서 구조물’은 매개를 가장한다.
그것은 펼쳐진 사물들로서, 연결된다. 그것이 접히지 않는다는 건 접힌 차원으로의 불가역적 경로를, 또한 그것이 종합되는 하나의 형상을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건 그냥 여전히 기능할 뿐인, 어떤 목적과 형상을 예비하지 못한 경첩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공고한 결속을 이루지 않고, 단지 그것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경첩-사물은 상대 사물의 틈을 지우기 위해 그저 경첩의 위치에 딱 맞춰 놓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오브제들은 결착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모양새를 띠는 차원에서 상호 결부되는 것이다. 그것은 임시적인 시간의 영원에 대한 지향이다. 역사의 시간―온전한 형상―을 이야기하는 파편적 증거이다. 우연적 필연성이다.
정작 가시화되는 건 형상이 아니라 이음매다. 일렬로 배열된 사물들은 공간을 가로지르는데, 이 가로지름은 공간으로의 시야를 봉쇄한다. 그것은 공간의 수렴점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시선의 방향을 노정한다. 여기서 ‘틈’은 이음매일 뿐만 아니라, 더 미시적으로는 결정들로서 이음매, 그리고 더 거시적으로는 그 사물들의 우연한 결속, 유형학적 상이함의 필연, 곧 합목적적이지 않은 강박에 의한 연결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 가령 두 개의 반쪽짜리 조개껍질 같은 용기―〈#6〉(2026. Modeling clay, glass, burned cloth, fired at 1220°C, 28×9×6cm, 29×11×6cm.)―안에 각각 오른쪽의 담긴 깨어진 것들이 겹쳐지며 생기는 선, 왼쪽의 하나의 결정에 촘촘하게 금이 가 결정들의 이음매처럼 보이는 선이 전자라면, 각 오브제가 하나의 일직선 안에 놓이게 되면서 오는 비통일적 종합이 만드는 틈―〈#10〉/〈#9〉―이 후자이다.
기포를 머금은 채 결정된 동그란 접시 모양의 오브제가 성형 중에 깨어지며 남긴 내재적 틈들 역시 그러하다―〈#8〉(2026. Modeling clay, glass, fired at 1220°C, 34.5×2cm.)―. 반쯤 쪼깨지며 반쯤 결합된 이 오브제는 필연적인 우연성의 틈을 가장 명확하고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경로를 이탈하며, 오른쪽 끄트머리 아래에 금 간 공간 바닥의 틈에는 깨어진 콘크리트 조각들과 함께 대등한 크기의 하얀 돌 파편으로서 오브제들을 비슷한 숫자로 뒤섞어 놓았는데, 결국 틈을 메우는 것들이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틈을 만든다. 그러니까 사물들은 결국 틈으로서 놓일 수밖에 없다. 조화와 조합의 합목적성의 논리를 가장한 임시적, 얕은, 불완전한 퇴적층으로서 사물들이 우연하게 필연적으로 놓인다.
닮지 않음의 사물들은 종합된 형상을 가정함으로써 아카이브의 미래적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난다. 이 사물들은 하나의 경로 안에, 스스로 안에 틈을 내며 만난다, 틈으로써 다름을 희석한다. 또는 스스로 닫힌다. 그리고 다시 틈으로써 이어진다. 이 하나의 불온전한 합치의 경로는 공간 초입에서 매끈한 선분으로 선취되는데, 그것은 벽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미끄러지다 평행하게 이어지는 긴 일종의 ‘활주로’를 두 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는 얇은 철 구조물로, 그 위에는 눈이 내렸듯 울퉁불퉁 하얗게 착색이 되어 있다. 눈은 벽을 마주하고 그 반대 방향에서 한쪽으로 내렸는데, 그것이 이 착색의 임시적인 틈을 그 다른 한쪽으로부터 노출하는 것이다.
벽을 기점으로 구조물의 끄트머리, 기둥 위로 가로로 누인 직사각형 ‘얼음’을 구부러진 나무―〈#12›, 2026. Glass, gatherd branches, silver, 8×19×5cm.)1―가 박혀 있는데, 예컨대 활주로의 끝을 가리키는 표지물이라 하겠다. 이 수직으로 솟은 지지대 위에 올라간 얼음 모양의 투명한 조각이라는 형상은 두 번 더 반복되며 독립된 기호로 자리한다. 곧 90도로 꺾어지는 벽에 하나―‹#13›(2026. Glass, gatherd branches, silver-plated brass, 6×18×5.5cm.)―, 그 맞은편 칸막이벽의 상단에 하나―〈#11›(2026. Glass, gatherd branches, silver, 3×3.5×8cm.)―가 더 있다. 전자가 페인트 붓이라면, 후자는 유연한 벽 조명처럼 보이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재현적 형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임시적 조합의 기법으로서 아상블라주적 전략의 상상력으로 소급되어 간다. 작가는 재현적인 형상의 일부를 전용함으로써 또는 분리된 조각을 재현적인 것 속에 끼워 넣음으로써 사물을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해석을 유예하는 잠재적 기호로 구성한다.
2
전시는 두 개 층으로 구성되는데, 경첩과 얼음의 오브제들이 유백색 흙으로부터 기원했다면, 위층에는 검은 흙이 주재료를 이룬다. 곧 전시는 하얀색과 검은색 두 지층의 대비로 갈음되는데, 후자에서 기점이 되는 오브제는 입구 맞은편 낮은 칸막이벽 위에 올려진, 검게 그을린, 부르세라 나무 수지를 얹은 구릿빛 직사각형 쟁반인데, 이는 하루 중 네 번에 걸쳐 불타오른다. 해당 벽 안쪽에 기입한 네 개의 시간과 그 위로 올라가며 이룬 하나의 화살표가 “burning time”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포물선의 형상은 물론 불길에 조응한다.
이를 기점으로, 공간 안쪽에는 네 개의 폴대 위로 정사각형 텐트를 두르고 거기에 검은 돌 모양 결정들을 깔고 군데군데 구릿빛 상자, 투명 얼음, 깨진 조각, 쇠사슬(이것은 일종의 제유로서, 바닥 모서리에는 그것의 전체, 곧 뭉쳐진 쇠사슬 고리가 있다. 이는 한 가닥이 엉키고 풀리고 하며 길게 나와 있다.) 등의 조형 오브제들을 위치시켰다―〈#15〉(2026. Glazed and unglazed black clay, glazed modeling clay, glass, burned paper.)―. 결국 흙 속의 예외적 오브제들은 틈을 내고 틈으로서 자리한다. 다시 반복하면, 그것들은 ‘불완전한 퇴적층으로서 사물들이 우연하게 필연적으로 놓인다.’
관람객은 지지 천이 움푹 가라앉은 만큼 그 안을 수그리고 보게 되는데, 그것은 실제 두꺼운 지층이라기보다 얇게 가설된 표면으로, 표층은 그 가라앉음만큼의 기울기를 안고 있다―오브제들은 비교적 고르게 분포한다. 예외적으로 “Wunderkammer #(숫자의 범위)”가 적힌 불탄 종이들이 있는데, 분더캄머는 ‘놀라운 것들의 방’이란 뜻으로, 16세기 유럽에서 상류층이 진귀한 것들을 수집해 모아 둔 개인 공간이라는 기원을 갖는다―실제 캡션에 숫자로만 기록된 작품들은 그 분더캄머에 속한 것들이거나 각각의 분더캄머로부터 찢겨 나온 것들일 수 있다.
경첩 구조물은 놀라운 것이거나 그것들을 담는 기관일 텐데, 이것들이 분별없이 놓여 있던 것과 같이, 분더캄머의 시간은 과거의 것으로 상상적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그 과거의 장면은 의고적 자연에서 문명의 잔재로 재발견되는 셈인데, 이는 그것을 담는 문명의 형상으로써 다시 뒤집힌다. 결국 그 흙이 담긴 하얀 천의 가가 (탄성의 오브제로서) 드러나는/대비되는 것처럼, 이 얇게 덧대어진 흙은 다시 인공의 해부대 위에서 문명의 질서로 수렴되어 가는 것이다.
3
지하와 지상을 잇는 건 희미한, 상자 안의 분절된 질감의 소리―〈#14〉(2026. Glazed black clay, black horse hair, black salt, glass, sound, 26×29.5×9.5cm.)―이거나 비정형의 상자 속 타오르는 불길―‹#14-1〉(2026. Glazed black clay, 1220°C, 26×15×3cm.)―인데, 이는 그 중간의 뚜렷한 대상으로 자리한다. 이는 〈#15〉에 이르기 전에 시간성을 띤, 미세한 ‘비결정적’ 물질들로, 하나는 상자 바깥으로 또 하나는 상자에 집어넣어 표기하는데, 이는 중간 파티션 벽에,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높이로 쌓은 두 개의 좌대 위에 놓이며, 서로를 마주한다―이미지는 직접적이라면, 소리는 은밀하게 표기된다.
먼저, 불은 일정 시간에 점화되며―앞선 “burning time”이 그것으로, 이는 그 아래 시간의 숫자들을 포함해 불을 점화하는 시간표를 이루는 셈이다.―, 종래 꺼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소리는 “Flight From The City”를 반복하는 작가의 목소리, (앞으로 펼쳐질) 검은 땅에서 녹음된 소리, (“그 땅으로 가는”) 비행기 내 기장의 방송이 연이어지는 구조를 반복하는데,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구문(‘도시를 떠나는 여행’)은 아이슬란드의 작곡가 조한 조한손(Jóhann Jóhannsson, 1969~2018)의 동명의 노래 제목으로, 신비하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아이슬란드는 얼음의 땅이기도 하지만, 불의 땅, 곧 화산 활동으로 인한 검은 흙이 분포하는 곳이기도 하며, 보통 그와 같은 자연이 그러한 신비스러운 음악과의 상관관계를 구성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장소(로)의 서사를, 착상을 작가는 중간의 과정에 있는, 중간태적 사물―불과 소리, 둘 다 도자의 결정적 지형을 벗어나는 것들이다.―에 욲여넣는다. 이 두 사물은 실은 캡션에 명기되듯 그 상자, 도자만이 작품으로 특정되지만―예외성을 띠는 ‘소리’는 상자에 담기는 물질로 특정화된다.―, 실은 그 도자를 초과하는 것들을 ‘내용’으로서 감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결착시키는, 일종의 ‘용기’로서 기능하는 도자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을 장식하는 세 개의 도자-나무의 작업들이 도자를 기준으로 측정되었다는 사실은 미소하지만 언급할 만한데, 그것들이 흥미롭거나 또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작가가 도자로서 매체가 지지체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곧 지지체에 의존해서 매체가 독립될 수 있는데, 그 지지체는 매체가 질료 자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것과 달리, 또는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과 달리, 더 유연한 형상과 변조 가능성을 취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지지체에 대한 실험에 가까운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연장된 하나의 사물, 하나의 조각 작업으로 보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때 대등하거나 역전된 차원에서 지지체는 부상하는데, 그에 대한 언어의 ‘봉쇄’는 다시 질료로서 매체의 특이성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이는 이어지는 ‘경첩’ 작업들이 지지체이자 매체이며, 도자로서 나타났다는 것― 도자 안의 도자이거나 도자와 도자의 만남―과 구분할 수 있다(하나의 예외는 〈#6〉인데, 도자를 덮은 천은 부피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4
도자라는 매체는 어떤 것의 형상과 그것의 질료적 성질의 차이를 구분한다. 그러니까 도자는 이미지보다 무겁거나 이미지가 붙들린 신체성을 지닌다. 첫 번째 전시장이 형상-질료의 분기된 질서를 직선의 차원으로 마감한다면, 두 번째 전시장은 ‘터전’ 안에 두는데, 전자가 선형적 경로를 따라 고유한 모나드들을 연접시켜 나간다면, 후자는 지층의 질서 안에 뒤적거리고 헤집는 행위로써 쌓아 나간다, 또는 더 아래로 묻어 나간다. 이때 직선으로 짜인/묶인 도자들의 형상은 조망될 때에만 하나의 선분 아래 그러하며, 그것의 ‘안’을 들여다볼 때, 마주할 때 각각의 형상은 극단적인 차이와 함께 그 형상이 말해주지 않는 바를 질료가 드러내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가령 형상이 하나의 용기로서 결정된 것이라면, 그것을 채우는 건 기포, 결정, 틈 등의 그것과 닮지 않은 미세한 형상이거나 매끄럽거나 거친 그 사이에 있는 재질감 자체다. 그러니까 형상은 표면 자체를 자신의 이념과 상관없이 수용하는데, 그것은 용기 안에 천을 씌우고 그 안에 금 간 결정의 또 다른 물질을 담기도 하지만―〈#6〉(2026 ―, 경첩 구조물과 같이 그것이 펼쳐진 단면으로 남게 됨에 따라 그저 하나의 표면 자체로 남으며 그 표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불규칙하게 갈라진 길고 좁은 접시 모양의 도자―〈#3›(2026. Glazed modeling clay, water, fired at 1220°C, 52×19.5×4.5cm.)―는 투명하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음의 놀라움을 주는데, 실은 그 위에는 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바닥에 모두 내려놓음은 그 용기 안에 무엇이 고이며 그 형상과 다른 세계의 심부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바다.
하얀색과 투명함으로 분별된 대부분의 도자 작업에서, 형상은 더 무뎌지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 표면 자체의 차이를 환기시키는 데 주효하다. 도자 작업은 재료가 변형되고 굳는 시간, 곧 유예된 시간의 지침을 작업자에게 요청하는데, 질료의 질적 변형은 형상의 예고된 차이와 또 다른, 질료 자체의 결정 작용을 표면으로서 목격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소성 과정에서 온도와 질료의 차이를 통한 실험으로써 더 무한한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미지는 무겁고 동시에 이미지를 벗어나며, 가볍게 변주되고 실험되며 어떤 형상적 토대를 만드는 것보다 분기된 형상들 자체가 지닌 질적/내재적 차이에 의거해 감상된다. 작가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러한 표면이며, 그 표면이 지닌 틈의 공간 또는 공간으로서 틈, 곧 실질이다.
김민관 편집장
- 1. 작품들의 수치는 오직 도자 기준으로만 측정되었는데, 따라서 활주로 위에 이 도자-나무만이 작품으로 기입된다. [본문으로]
'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둔주: 그림자가 된 전통》(총괄 기획: 강정아): 기괴한 것들로부터 (1) 2026.03.12 노예주,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 세계의 경계를 지우는 이미지 (0) 2026.03.11 차연서 Cha Yeonså, 《살도 뼈도 없는 나에게 Feed me stones》: 훼손, 조율, 바깥으로서 애도 (0) 2026.03.11 정혜원, 《순환하는 매듭, 완결은 없습니다.》: 형상들을 가설하기 (0) 2026.03.10 김남수 기획, 《물의 왕: 동학과 화엄의 두물머리》: 여성-신체, 생태-길, 구멍-응시의 연결망 (0) 202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