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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 〈오디토리움 시리즈: 그 때 그 극장 편〉: 공동체를 ‘지정’하는 법REVIEW/Dance 2026. 4. 10. 22:13

이소, 〈오디토리움 시리즈: 그 때 그 극장 편〉 이소의 〈오디토리움 시리즈: 그 때 그 극장 편〉(이하 〈그 때 그 극장 편〉)은 〈오디토리움 시리즈: 연희예술극장 편〉(2025, 이하 〈연희예술극장 편〉)의 반향으로서 존재한다. 이 둘은 모두 어떤 상상적 간극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는 장소 특정성보다는 시차적인 것이다. 곧 후자가 제목에서처럼 “연희예술극장”을 장소 특정적으로 인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장소를 어떤 식으로든 오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전적인 오류라기보다 공연이 가설하는 장소적 토대와의 오차로서 사후적으로 승인된다는 것에 착안해, 극장이 가설되는 불분명한 경계를 오히려 공연(자) 스스로가 함입한다.
이는 거꾸로 관객이 공연을 가정하는 것처럼 공연 역시 관객을 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디토리움”, 곧 ‘객석’이 관객의 의식이 실재와 교차하며 장소에 대한 분별이 발생하는 시차에 대한 인식으로 다시 쓰이는 것과 같이, ‘관객과 장소’에 대한 분별을 지닌 공연의 의식은 관객이라는 대상과 교차하는 지점을 소급해 미리 기입한다. “극장에 들어서기 전, 어떤 관객은 공연의 풍경에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2025)
일종의 전표현적인 상상의 차원은 그러니까 실재적인 경로로부터 출현한다. 이를 “극장”의 차원으로 옮겨 보자면, 무한한 가설‘함’만이 있는 추상적 장소로서 극장의 함의―Theater가 극장이자 작품인 것처럼, 곧 극장은 사라진/사라질 작품들의 목록인 것처럼―를 잠재적 차원에서 유동하는 정의로서 재정의함은, 아마도 극장을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다시 쓰는 과정, 곧 현재의 극장에서 끊임없이 재출발하는 과정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이소의 두 공연에서, 장소를, 그리고 관객이라는 장소를 끊임없이 분별의 기호로 재약호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연이 그 경계의 차원으로 소급됨으로써, 경계부로부터 안착되지 않고 수여됨으로써 장소는, 실재는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끝내 도착하지 않을 무엇으로 흔들린다. 그에 따라 관객의 체험은 이 공연을 장소적으로 분별하며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불안정한 실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극장이라는 장소가 기억의 혼합물인 듯, 기억이 혼합되는 장소로서 실재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데 이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때 그 공연”을 “회자시키”는 〈그 때 그 극장 편〉의 행위는 그 공연에 대한 기억의 분열적 초상이 그것을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절대적으로 공연자 내재적으로만 체현된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초래할까―이 지점에서 그때의 공연자는 그때의 “관객”으로 재정의되어 이번 공연에 투입된다.
지난 공연의 조각들을 근거로 삼는 가운데, 현재는 유예되며 그 유예됨으로서 자리 잡는다. 또한 과거는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인 것으로 그들에게도 주어지는데,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그들의 전사가 아니라 그 전사를 재처리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모호함이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이는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 제4의 벽을 만든다.―로부터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술이 현재를 부인하거나 현재로부터 피신하기 위한 또 다른 절차라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과거의 가설이 이미 불확정적인 것이라면, 따라서 기억의 재처리 방식 역시 진실을 향하기보다 진실을 맴도는 가변적 경로를 걷는 것임을, 마찬가지로 시차로서 재생산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희예술극장 편〉이 극장과 기억의 오차를 기입시키고자 했다면, 〈그 극장 편〉은 거기에 그 공연과의 시차를 도입하는데, 이 이중의 균열점이 들끓는 지점은 발화적이기보다 혼잣말에 가깝다. 두꺼운 패딩을 홀로 입고 그 바깥 또각거리는 다른 존재들과 대별되는 존재(임서희)는 계속 (지난 공연에서의) 극장의 경계, (지난 공연과의) 기억의 경계를 되짚고 있으며, 이는 STT 기술을 경유해 노트북 화면에 타이핑되고 있다. 이는 들리지 않는 말을 매개하기보다 들리지 않는 말이 소급되는 자리를 지시한다. 이 말 자체가 경계로부터 들끓고 있으며, 이전을 지우고 나타난다.
처음 무대는 복제된 객석의 기입을 통해 가시화를 경계의 차원에서 단속한다. 곧 중간의 객석이 뒤에 있는 동일한 객석으로 복사된 채, 그 두 사이를 하나의 존재(간주연)가 횡단할 때 반드시 한편에서는 시각적 공백이 생긴다. 전자가 보는 것을 후자가 보지 못하고, 그 반대 역시 그러한데, 이때 사라지는-나타나는 매개자의 치렁치렁한 치마의 결―기어갈 때―과 하이힐―걸어갈 때―이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소음만이 시각을 통합한 기호로 산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과거이거나 ‘이미’ 미래이다. 곧 장소에의 분별된 기입은 시차의 기억을 생산한다. 마치 과거가 현재로 넘나드는 이 공연의 방식과 같이 말이다.

한 명에게 또 다른 한 명이 달라붙는다―관찰자의 시점으로부터 존재는 이미지가 되고 관념적 재현의 차원을 구성한다. 이러한 방식 아래, 맹목적으로 양몰이되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구두에 종속돼 영원히 춤추는 형벌에 처한 ‘빨간 구두’의 서사적 모티브가 연장된다. 스피커와 휴대폰을 올려둔 핸드카트를 끌며 이동하는 여자와 그 이동에 따라 동시에 촬영되며 그 객석 자체의 뒤편에 동시 투사되는 영상은 분기된다. 곧 움직임과 이미지는 하나의 공간에서 기입되지 않는다. 중앙 객석의 앞으로는 패딩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야외를 돌아다니는 〈연희예술극장 편〉을 연계하는 영상이 나온다.
뒤쪽 객석은 개방된 다락 공간으로 연결되고, 이는 극장 입구 공간 위쪽으로 넓게 자리하는데, 이때 입구 오른쪽에, 뒤쪽 객석의 더 뒤편의 벽에 붙여진, 긴 직사각형들로 오린 종이들 각각에 한 글자씩 적혀 완성되는 “여기가 이 극장의 맨 뒷자리다아”를 비추는 스태프 같은 공연자의 ‘비가시화된’ 행위가 있다. 곧 관객은 계속해서 돌아다녀야만 편재된 행위의 양상을 섭취할 수 있다. 각자의 파편적 행위 양상은 과거의 이미지와 언어에 붙들린 존재들이 시차로써 관계 맺지 못하고 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절된 분자들의 산포됨이 처음 하이힐 존재와 그 뒤를 따르던 존재의 형상을 다시 꿰는 줄줄이 엮이는 산만한 행진 속에서 전도되는 건 아마도 이들이 “일시적인 공동체”의 형상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현재성을 띠기보다 과거의 기억에서 오는데, 곧 야외에서 패딩을 입은 하이힐 집단의 꼬리 잇기 행진이 그것이다. 이 패딩 존재가 지난 극장을 장악했었고, 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이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기억이 전이된 형태로서 연장될 뿐 패딩은 사라지고 하이힐은 하나만 남아 있다.

시각화하면서 시각적 대상으로 분기되는 첫 존재의 등장은 그가 앞 관객석 오른쪽으로 세워둔 카트 위의 휴대폰에 의해 그것의 시야각 안에 것들이 담기기 시작하는 고정된 축으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공연은 이동하는 존재에 의해 이미지가 시시각각 바뀌는 것에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동하는 양상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후반에 난입하는 또 다른 시각화의 존재(박초원)로부터 무대는 분화되며 가산된다. 곧 태블릿을 들고 보며 이동하는 존재의 등장, 앞에 휴대폰 목걸이형 거치대에 부착한 휴대폰으로 앞을 촬영하며 가게 되는데, 휴대폰은 태블릿에 담긴 영상을 다시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 공연 자체의 과거로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보는 것이 시각화된다. 이때 그 영상 바깥의 극장이 일부 시각화되는데, 이는 그가 영상을 볼 때 초과되는 시야각에 상응하는 바다. 그러니까 과거를 읊조리던 초반 등장 존재와도 같이, 이 각 존재의 파편적 분기는 모든 것을 파편으로 기입한다. 하나의 이미지로 모든 걸 꿰는 건 발맞춘 스텝으로, 이는 재현 불가능한 언어이자 고유한 소리 자체로 연장되면서 미로 같은 극장의 운용에서 유일하게 강력한 시각적 표지로 관객을 회집한다.

이른바 “탁~착~착~” 하며 모였다가 “착(탁)/착(탁)” 하며 흩어지는 경로에서, 소리의 분석은 움직임의 모든 것에 대한 해명과도 같은데, 이는 탭댄스의 장르적 특성으로 분별되면서도 그것이 소리의 하나 된 분포 안에서 합산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소리를 내는 것이 효과가 아니라 목적인 셈인데, 그 소리에 각자를 투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예측 불가능하게, 관객인 양 은근하게 접근한 누군가가 브로슈어에 새겨 넣는 문장, 그 존재(이봄)가 경유한 질문, “일시적인 공동체는 일시적으로 지정된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걸까?”에 대한 답변을 소리로써 투과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정”하는 이 소리는 그것이 발딛고 있는 그 장소를 지정하며, 또한 그로부터 일시적 공동체의 정념이 투여되는 그 경로를 추적해 가는 가운데, 그 정념이 응결되는 장소를 거꾸로 내려와 지정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들의 움직임이 소리 자체를 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단일하게 합성되어 가는 그 소리를 내기 위해서만 이들은 움직인다. “일시적인 공동체”에 잠겨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리는 형상 자체를 일원화하지는 않는데, 그러니까 발과 발의 간격, 몸의 굴신 따위가 그 ‘같은’ 소리를 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한편으로 예외적으로 한 명이 다른 스텝을 밟기도 하는데, 이는 전격적인 이탈이 아닌 코러스적 합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소리 공동체’의 합일된 형상은 듀엣으로 분화되면서 가장 강력한 분투와 애착의 순간을 동시에 수여하기에 이른다. 권투 자세를 잡고 서로를 겨누다 끌어안는, 펀치가 생략된 클린치, 펀치를 증폭한 포옹, 격의의 분명한 태도가 애착의 격렬한 상태로 굴절되는 것, 이 모든 것이자, 그로기 상태의 기억 상실의 희미함으로 단락되는(-) 와중에 사랑의 먹잇감으로 재합성되는(+) 이 기이한 장면을 우리는 어떻게 의미화할 수 있을까. 이는 집단적 포옹의 사태로 이어지는데, 이때 개별적 분출의 말들이 다시 들끓으면서 과거의 흔적을 되불러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파편적 기억과 함께 기억의 온전함 대신에 기억에 대한 해석의 차원을 보여주는 데 가까운데, 기억이 고착되는 어떤 사물로서 “패딩”과 “스피커”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는 이동형 스피커를 중앙에 두고 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패딩 입은 존재들의 이전 공연의 한 장면을 사물들로 추출한 것이다. 기억은 그것들을 증거하면서도 그러한 사물들에 의존하는 기억의 성질을 과거에 대한 애착을 지지하는, 과거를 애착으로서 복구하는 어떤 태도와 연결 지어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안기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과거는 애착으로 기입된다. 더 정확히는 애착으로서 과거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과거는 애착의 대상으로만 매개될 수 있다.
역동적인 반복된 소리 구문을 이루는, 유선형의 부가적 움직임, 예컨대 뒤로 팔을 뻗는 동력 생성의 예비 자세, 몸의 한쪽으로의 갸우뚱함 등등은 고유한 몸짓들을 이룬다. 그것은 안무하지 않음의 안무 같은 것의 연장으로, 어떤 것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아니 어떤 것도 완전한 이상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아마도 몇몇 신비한 말들이 〈그 때 그 극장 편〉을 갈음 짓는다. 가령 “이동이 이동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문장은 그 모든 것들을 이동이라는 명사/동사로 바꾼다. 나아가 인칭적 차원이 규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것이며, 어떠한 지정되지 않은 이 존재는 무언가를 무매개적으로 매개한다는 것을, 의미화되지 않은 지층으로 매개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제10회 모자이크 페스티벌 폐막작
장소 | 연희예술극장
일시 | 2026.02.26.(목) 20:00
2026.02.27.(금) 20:00
2026.02.28.(토) 14:00, 20:00
2026.03.01.(일) 14:00
리서치 및 출연_간주연, 박초원, 염지원, 이봄, 임서희, 임세령출연_조용진
안무/콘셉트_이소여
기획_김효민
리서치_손슬기
사운드_이시안
조명_오채은, 김세현
디자인_한윤진
- 1. 그는 한편으로 관객을 몽롱하고 환각적으로 도취되도록 만드는데, 가령 30분 뒤에 발생할 이 같은 현재의 일은 그가 이전에 들었던 말이라는 식의 말은, 미래가 이미 선취되었고 과거가 현재를 잠식하고 있음, 그렇게 뒤엉킨 시간의 구조에 대한 환상으로서 발화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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