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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정, 〈성율전26〉: 결핍-과잉된 신체의 두 가지 형상 또는 두 다른 신체-장르의 배치
    REVIEW/Dance 2026. 4. 10. 21:55

    강화정 연출, 〈성율전26〉©권택기(이하 상동).

    강화정 연출의 〈성율전26〉에는 두 존재의 오직 움직임만이 있는데, 그 위에 놓이는 건 대체로 오페라를 비롯한 보컬이 강조되는 음악이다. 몸이 목소리의 지지체라면, 목소리는 몸의 지속됨에 합목적성을 부여한다. 목소리는 몸을 경유하여 자신의 몸을 얻는다면, 몸은 목소리로부터 연장된 삶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일지도 모르는데, 목소리가 몸에 부착된다면, 목소리는 그 몸을 경유해, 자신의 가상적 몸에 이르는데, 이때 몸은 배경으로 전도되며, 목소리는 형상의 지위를 진정 획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진정 ‘다른’ 두 개의 움직임이 있는 것 아닐까.

     

    몸은 마치 사물처럼 진동하고 있다. 주체의 의지가 재분절되는 그 몸은, 산포되며 형해화되는 이 몸은 정신의 영역, 언어의 영역, 유기적인 호흡과 흐름으로 인계되는 음악의 영역을 바깥에 두고, 그 몸을 하나의 더딘 공간으로 펼쳐낸다. 그러니까 배치는 오직 그 몸의 자체적인 경로 아래에서만 행해진다. 이 몸은 외부를 바깥에 두고, 단지 외부에 의해 지시될 뿐이며, 내재적 차원에서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닫혀 있으며, 열린 틈과 구멍을 향해 자동 반사적으로 향하는 꿈틀거림의 반복적, 변이적 표상이다. 따라서 목소리는 하나의 빛이며, 빛과 어둠 혹은 비가시성의 세계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있다.

     

    이 즉물적 사태로서 몸으로부터 음악은 하나의 독립된 물리적 장소로서 물신화되며, 몸을 이탈하는 동시에 그것을 지켜본다. 곧 신체에 동조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 존재가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아쿠마스틱한 대상으로 지시된다. 어쩌면 주체의 의지를 몸에서 떼어내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고도 하겠는데, 진정 강화정 작업에서 음악은, 그 목소리는 독립적인 실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재생된 음원을 통해서만 그럼에도 충분하게 말이다. 본래적 출처로서 몸을 벗어남으로부터 그리고 앞에 놓인 다른 몸(들)을 비켜나며 바라보면서 나아가 공간을 떠돌면서 몸의 부재 자체를 그리고 몸의 헌신(들)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 연극적인데, 그러니까 서사는 목소리가 배경이 아닌 형상으로, 몸과 동조화되지 않는 또 다른 몸으로 떠돌면서 자체적으로 발화하는 가운데 두 매체의 분기됨으로 체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배경이 되는 속박된/더딘 몸과 떠도는/향유하는 몸, 이 두 몸을 배치하는 기술이다. “연출”은 두 개의 움직임을 변별하는 이 배치로부터 무대를 구성한다 혹은 정초한다. 그것은 장소로서 두 개의 몸이다. 또한 분별이다. 곧 몸이 있기에 퍼포머는 장소로서 포박당한다면, 몸이 없기에 음악은 그 나머지 장소를 메울 수 있다. 따라서 몸은 장소라는 형상으로 소급되며, 또 다른 몸은 배경으로서 장소를 향유한다. 이제 형상과 배경의 자리가 다시 뒤집혀, 익숙한 도식에 이른다.

     

    아마도 장소로서 몸이 부착됨에 대한 어떤 지시―연출의 이념―는 몸의 미시 분절로만 이뤄진 순수한 연극적 신체로의 현상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움직임의 순수 테크닉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를 소거한, 의지의 부재로써 쓰이는, 의지의 부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몸의 단일체적 조각으로서 하나의 이념이자 서사로 소급된다는 것이다. 부자유스러운 몸에 대한 최적화된/고도의/합목적적인 테크닉으로서 자연스러움을 통해, 신체는 텅 빈 서사가 아니라 충만한 하나의 서사적 공간을 잠식한다.

     

    〈성율전26〉에는 이소영과 배유리 두 무용수가 출현하는데, 이는 두 무용수의 이름을 한 음절로 짧게 발음한 것을 이은 것으로, 무엇보다 두 무용수의 존재 자체의 고유성이 무대의 내용이 됨을 의미한다―2017년에 또 다른 ‘성율전’이 있었다. 배유리가 먼저 등장하고, 그것의 비틀린 정면성을 기준으로, 이소영은 그를 스쳐 가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둘은 포개고, 의탁하고, 머물고 맞대며 또는 맞대고 머물며, 서로의 틈을 메운다. 이는 곧 유동하는 선분, 정동으로 결정되는 신체들, 신체와의 접촉~간극의 교환 혹은 교대 작용, 어쩌면 진정한 결속을 향해 고착되는 관계이다.

     

    둘에의 공간, 둘이 내는 공간은 서로에게 ‘부착’되며 변형되어 흘러가는 장소들을 구성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길을 내며 서로에게 내어진다. 이 서로에게 감기는 사태는 첫 번째 무대에서만 펼쳐지는데, 이후에는 솔로들, 그리고 병치된 독립적 몸으로 이어진다. 무대 상수 뒤쪽에는 하얀 페티코트가 세워져 있는데, 서로를 틈타며 조금씩 그곳으로 기울어져 가며 배유리가 그 옷을 입게 된다. 이는 또 하나의 진정한 신체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더해지는 순간은 곧 어떤 특정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바깥의 신체가 유령과 같이 신체를 채 채우지 못하고 있었음으로 뒤집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 무대에서 배유리는 흰옷을 입고 하수 중앙부에 서 있는데, 이때 그에게 더는 지지체가 없다는 건 앞선 바깥의 형상이 기억으로 이전된다는 걸, 또는 환기된다는 걸 의미한다. 몸은 비틀리거나 뒤틀려 있으며, 더/비로소 헐거움이 가시화되는 듯하다. 한쪽 팔이 얼굴에 근접해 얼굴을 타고 그 얼굴을 빠져나가는데, 그것은 마치 얼굴을 관통해 나오는 팔과 같다. 이는 마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를 떠오르게 한다.

     

    그림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은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는 가운데, 마치 의자에 포박되어 형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데, 의자의 노란 빛이 어둠과 배합되며 어둠과 분기하여 신체가 그에 조응해 갈라지는 가운데, 그 창살-빛이 그의 신체를 관통하는, 그리하여 갈기갈기 찢기어지는 고통을 체현하는 고통의 아우라로 다시 창살-빛이 연장되는, 형상과 배경이 완벽하게 맞물리며 서로를 지시하는 그림인 셈인데, 배유리의 이 멈춰진 신체, 옴짝달싹 못 하면서 실은 무한한 진동으로 자신을 용출하는 그 형상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멍하고도 무언가에 연루된 눈빛과 표정이 각인되면서 말이다.

     

    첫 번째 무대보다 감속화된 버전, 지지체의 사라짐 혹은 곁의 추동이 사라짐 이후에 따른 결과일 수 있는 이 더욱 더딤의 결정체는, 무엇보다 눈을 하나의 구멍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데, 이 눈-구멍의 어딘가로의 수렴은 구멍으로서 세계 자체로의 한 경로를 만드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 번째 무대는 상수 약간 뒤쪽에서 자리 잡고 있는 이소영의 모습에서 출발하는데, 양옆으로 뻗은 두 팔과 일직선의 경로를 상정한 이동에 대한 여러 형상이 전제된다. 곧 그 벌린 두 팔과 함께 급격하게 바닥으로 기울어질 때, 그 몸은 이동이라는 명분 아래 처한 그 자체로 떨리는/부유하는 몸과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의 부여는 그것의 뚜렷한 목적성 달성보다는 그와 함께 짓이겨지는 몸의 딜레마를, 곤궁을 가시화한다. 첫 장면에서 그가 고정된 축이 아니라, 그 축을 비트는 역할로써 세계의 경로를 조작해 나가는 단초를 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이동의 축이라는 전제는 배유리와 비교되는 또 다른 정초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뒤쪽 상수에서 하수로, 약간 사선의 경로로 이동하는 이소영의 옆모습으로부터 그 눈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는데―배소영의 눈이 우리를 자연 응시하는 것으로 전도되는 것과 달리―, 거기에는 어떤 의지도 없어 보인다. 곧 눈은 하나의 물질적 조각이며, 떨림의 그 신체에 맡겨진 상태이다.

     

    네 번째 무대는 Télépopmusik의 〈Don't Look Back〉에 맞춰, 정면을 향한 하나의 축으로서 배유리가 연장되는데, 조금 더 분절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로 음악이 변조됨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는 식의 움직임의 확장이 일어난다, 고개는 그대로인 채.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바닥에 문대는 스텝,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감아올리며 할머니 같은 표정을 하는 등 몸 전체의 변화를 더 역동적으로 가한다. 뒷모습과 걸어가는 모습과 같이 축의 변경 역시도 일어난다.

     

    결정적인 얼굴의 떨림은 독립된 신체이자 신체의 모든 것을 표징하는데, 반대로 말하면 얼굴로부터 몸이 소멸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 그는 몸을 꺾고 다음으로 고개를 뒤로 꺾는데, 이 뒤틀린 몸의 형상은 타대상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몸에의 사투이며, 떨어져 나가는 신체 조각들의 분열과 반란이며, 과잉된 결여이다. 그것은 결국 비루한 것의 숭고함 같은 것이다.

     

    마지막 무대는 락 버전의 〈볼레로〉가 흐르는 가운데, 배유리의 몸짓은 한국 무용과 흡사해진다. 꼬아내고 덩실거린다. 이소영은 처음부터 이를 보다 곧 참전하는데, 배유리가 기타의 분절된 선율과 동기화되기도 하는 가운데, 아래로 그리고 그 뒤로 감아 나간다. 이소영은 안 보이는 시선, 어두운 시선의 한 축을 장식하는데, 그것은 응시의 결정체로서 배유리의 신체 위에 배가되는 관찰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성율전26〉에서는 두 개의 신체가 따로 또 같이 분화한다. 하나의 축과 나선형의 경로로서 두 신체는 교착되며, 엇갈리는 두 시선을 통해 건조하고도 끈적거리는, 교통 없이 밀접해지는 기이한 관계가 형성된다. 두 사람은 분명 차이로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의 같은 방법론을 토대로 둠에도, 근원적으로 다른 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환원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반대로 그 둘은 실은 다른 방법론을 차용하지만, 관계의 차원에서 표면으로는 서로에게 무감하게 반응함에도 실제로 어떤 영향과 감화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 다름이 공통의 차원을 향해 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성율전26〉은 그간 강화정 연출이 선보여 온, 신체로서 음악과 음악적 신체의 배치, 정동의 형식이 정동으로서 신체에 연장되는 사태, 헐벗은, 결핍의, 부조리적인 인물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움직임으로 온전히 분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신체를 감도는 목소리의 물질적인 동시에 가상적인 차원의 현전이 전제된다. 그로부터 이소영과 배유리는 몸을 재구성하고 변경한다. 몸의 본래적 쓰임을 소거하고, 의지와 의식을 상실하며, 기능적 차원으로 진동의 세계를 향한 단일한 매개가 된다.

     

    결정적으로 정신과 의지, 의식은 신체로 도착되어 있고, 신체 전반은 하나의 용출하는 경계로서 분해되어 있다. 또는 하나의 진동하는 덩어리로 자리한다. 그것은 꽤 연극적이기도 한데, 하나의 법칙을 경유한 신체의 제어는 공백으로서 텅 빈 주체의 형상, 항거할 수 없는 신체의 더 극렬한 정동 공간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한 몸의 차원과 함께 불투명하고도 불완전한 하나의 막을 단단하게 표면에 먹인 것과 같은, 일종의 전체가 하나의 ‘가면’인 그런 신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정착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하나의 재현적 형상으로서 모순을 전제하면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공연 일시
    - 2026년 3월 14일(토), 15일(일) 오후 5시
    공연 장소
    - 더줌아트센터

    연출_강화정
    출연_이소영, 배유리
    의상_성영심
    무대_권택기
    조명_라성연
    PD_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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