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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컨, 〈곡예사 훈련〉: 서커스라는 적자 혹은 고아로서 서사REVIEW/Performance 2026. 4. 10. 22:32

컨컨, 〈곡예사 훈련〉[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컨컨의 〈곡예사 훈련〉은 서커스를 보여준다기보다 들려주는데, 이를 통해 서커스라는 이상, 서커스에 대한 이상이 가진 간극을 드러낸다. 이는 서커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 정체성을 탐문하는 과정으로, 처음부터 세 명의 서커스 퍼포머와 대등하게 선 손옥주는 매개자의 위치를 자처함에 따라 그의 사회는 이들이 중계되고 있음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 전체는 방송과 같은 하나의 틀을 전유하게 되는데, 거기에 놓인 셋은 서커스와의 직접적이고 진실한 관계 맺음에 따른 재정체화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신화를 만드는 과정이라기보다 서커스와 각 개인의 간극, 균열, 모순 등을 드러내는 데 가깝다.
〈곡예사 훈련〉은 방송이라는 포맷을 선택함으로써 수월하게 수용 가능한 방청객의 모드를 상상적 차원으로 가정하며 현장에서 그 이미지를 주조하고자 한다. 그러한 포맷으로부터 〈곡예사 훈련〉은 일종의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을 경유하고 있음에도, 그 전개 양상의 주요한 존재인 손옥주는 엄밀히 강연자라기보다는 사회자의 형상에 머물게 된다. 그 결과, 손옥주의 발화는 정보의 차원을 일종의 스크립트를 빌려 전달하는, 곧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저자성의 산물로 수렴시키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며 하나의 대본의 산물로 만드는 어떤 가상의 울타리 영역 안으로 환원되는 듯 보인다.

중간 중간 효과음은 서커스 동작의 시현이 끝나거나 그들의 발화가 끝난 직후에 삽입되는데, 이 방송의 상상적 자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방청객과 관중의 이중적 형상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데, 전형적 방청객의 요란한 호들갑은 이 극장의 제한된 반경을 스펙터클한 것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이러한 환호는 어느 순간 방송을 넘어, 서커스 극장에서 주어지는 꽉 찬 관중과 그들의 열광에 대한 상상적 장소를 내포한다. 이는 서커스 자체를 본다기보다 서커스를 경유하는 공연의 과정에서 일종의 청중으로 자리하는 진중한 관객과의 간극을 표기하는데, 어쩌면 이는 서커스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대한 명시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방어하는, 봉합하려는 제스처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서커스라는 효과와 서커스에 대한 발화를 초라하게/소심하게 메우(려)는 이 사운드는, 서커스 극장과 방송국, 그리고 현 극장의 사이에서 서커스를 ‘체험’하고 서커스‘라는’ 걸 보고 들으며 그 사이에 놓인 서커스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이 세 가지 차원의 경험으로부터 각각 서커스라는 이상을, 매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지위를, 그리고 그 둘의 간극으로 남는 서커스의 실체를 드러내는, 공연의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지위를 총체적으로 또한 분열증적으로 보여주는 기호이다.
서커스라는 이상과 서커스라는 간극 사이에 있는 이 방송이라는 가상을 걷어낸다면, 〈곡예사 훈련〉은 서커스에 대한 연구와 그 안에서 재정체화하는 서커스 퍼포머들의 이야기로 대별된다. 손옥주의 스크립트는 동시대 컨템포러리 서커스 연구자로서 자신의 질문들을 이들을 경유해 전달받고자 하고, 세 사람은 그 질문 안에서 서커스 퍼포머의 삶에 대해 기술한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이 관계는 일종의 연구자의 전문적인 연구 범위와 서커스에 대한 쉬운 소개 사이에서 타협점을 형성한 결과로, 연구와 방송이 절합된 양상이다.

손옥주는 일종의 키워드들을 하나씩 제시함으로써, 이들의 발화 가능한 지점을 만들어 주는 차원에서 하나의 틀을 주조한다. 따라서 손옥주는 그것을 전적으로 연구로 소급시키지 않고, 관객의 입장을 체현하고 또한 주조하며, 관객은 이들의 말과 함께 서커스가 재현되고 있음을 따라가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기본적으로 거기에는 우리가 서커스라는 것을, 서커스의 현실을, 이 셋을 모른다라는 전제가 있다. 따라서 먼저 이들의 소개가 필요하며, 서커스에 대한 기술적 차원의 정의가, 서커스에 대한 제도에 대한 설명이 또한 필요하다.
김준봉의 발화는 ‘서커스 부흥’의 열망과 서커스에 대한 현실적 제도 미비의 차원의 간극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 곤궁과 분투의 상황에 놓인다. 2015년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개관과 함께, 제도적 차원에서 재도입, 장려, 육성된 장르가 제도 자체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시작된 방황하는 개인들의 서사는 〈곡예사 훈련〉의 전반부를 점유하는데, 서커스 학교와 역사의 오랜 전통이 없이 ‘성급하게’ 도입되어 ‘급격하게’ 하강한 이 서커스라는 국내의 인공적 산물의 단면을 기괴하고도 쓸쓸한 것으로 기입한다.
촘촘하게 채워지지 않는 제도의 빈약함으로부터 개인 예술가의 분투가 시작되며, 이는 고립과 여행의 심상으로 분기되는데, 곧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상의 영상을 보며 독학(권해원)하거나 해외 서커스 학교에 가서 외부 제도로부터의 기술을 수혈받는 것(김준봉)이 그것이다. 반면, 철저한 혼자만의 고독함은 서커스 자체의 이상화된 이미지로 승화되기도 하는데, 권해원의 “지겨운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 “결국 혼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과 같이, 제도와 현실의 간극은 서커스에 대한 이상을 좇는 것 속에서 기워지는 것으로 보인다―여기서 이상과의 간극은 그 이상의 순수함과 완전함에 대한 표지가 된다.

이때 영상은 네거티브 그래픽 이미지로서 만곡과 휘어짐의 점액질 액체의 끈끈한 덩어리째 움직임의 더딘 전개 영상을 띠는데, 마그마 같은 이 이미지는 예외적으로 가상의 차원에서, 서커스의 지난함과 이상을 향한 무한한 굴레의 여정 자체를 상징적 차원에서 난해한 것으로 또한 모호한 것으로 그리고 느리고 무거운 것으로 가시화한다. “몸풀기”-“컨디셔닝”-“지속”으로 이어지는 서커스를 위한, 서커스를 들여다보기 위한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곡예사 훈련〉은 차근차근 몸을 풀고 몸이 부분적으로 작동되어 감을 체험해 나간다.
그것은 서커스의 단초로서, 서커스의 몸을 이루는 실질이기도 한데, 또한 서커스라는 이상과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지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완성된 공연, “지금부터 〈곡예사훈련〉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손옥주의 말로부터 시작된 공연은, 이 연습이 다만 대사의 지시 대신에 음악을 안은, 또한 그 셋의 관계에서 유래하지 않은 하나의 통합된 양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데서 그것은 일종의 서커스의 이상이라는 봉합을 향한 봉헌물이다.
곧 서커스의 무대가 지니는 기존의 환영성에의 의탁은 무대와 갖는 틈으로서 존재하는 이 공연의 성격이 그 이상에 대한 추구로서 그 틈을 메우게 될 것임을, 그러한 이상은 실은 실재의 틈을 메우는 것 가운데 드러나는 은폐의 기술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어쩌면 이들이 자신들 각자의 트릭을 계속해서 시도하며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서커스의 실재이자 실재라는 서커스의 차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서커스의 제도적 현실을 보여주면서 서커스의 과정적 시간을, 그 안의 각자의 진정성을 물리적으로 응결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히려 삶은 서커스보다 우선하며, 위태로운 그 삶은 서커스로 비유할 수 있다.

〈곡예사훈련〉의 진정함은 이 미완성의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갖는 고유성이 트릭이 성공하는 서커스 내재적 성취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그들을 보는 우리를 주체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메타-서커스적 서사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는 기존의 서커스와 달리 우리를 무언가 불쾌하거나 찜찜한 차원으로 연루시킨다. 무엇보다 죽음을 제어하는 삶충동으로의 승화가 아니라, 죽음충동 자체인 서커스의 이 미끄러짐의 사태들은, 주체의 실패와 그 실패 자체에 닿아 있는 주체의 기이한 면모를 부각한다.
이는 제도적 차원을 경유한 채 그것이 배태하고 소외시킨 자식들의 방황이라는 서사의 발단 이후의 어떤 진실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제도적 토대의 미약함과 지속 불가능성이라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차원으로 유효하지는 못하다. 곧 그들의 마지막 무대는 그럼에도 이들이 어른이 되어 부모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나가야 한다는 독립의 새로운 서사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속한 서사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변혁시키기보다는 탈개인적 영웅의 서사로 그것을 완성하는 것에 가깝다. 시련을 겪고 단단해지는 일종의 영웅주의 서사의 모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지점은 〈곡예사훈련〉은 거리예술에 대한 현실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탐사 보도의 양식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인류학적 기술의 양식의 혼합적 형식이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어느 순간 그것을 깨고 장르 자체가 변화됨을 의미한다. 곧 그 기술의 주체가 소거되고, 그것이 처음부터 방송의 포맷을 띠고 있었던 것처럼 일종의 전형적인 인물 다큐멘터리가 향하는 인물의 신화화라는 장면 자체로 들어가는/환원되는 것이다.
서커스 자체의 발화인 것처럼 보이는 〈곡예사훈련〉은 실제적으로는 제도와 인물의 유기적 관계, 제도의 물적 토대가 주는 실재의 효과를 연구하는 하나의 리포트에 가깝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연구자의 의식과 그 안의 퍼포머들의 의식이 불합치되는 지점이 전제된다. 곧, 제도 차원의 기술과 인류학적 참여 관찰의 시선이 세 퍼포머의 자신들의 삶의 기술과 서커스의 연습과 구체화라는 여러 장면들을 엮어내(려 하)지만, 그것은 서커스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과 서커스 자체를 보고자 하는 관객의 열망이 맞닿는 지점을 충분히 결락시키지 못한다.
그러니까 손옥주는 서사의 매개자이기보다 서사와 곡예사 사이의 매개자로 승화되고, 서사는 충분하게 자리 잡지 못한다. 탈개인주의적 서사의 향방은 개인주의적 주체의 서사로 거듭난다. 제도 기술의 서사는 주체의 증상으로, 주체의 서사로 변화한다. 곧 〈곡예사훈련〉은 서커스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서커스로서 말해지는 것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균형이기도 하다. 무대화와 무대가 뒤섞이는 지점, 그 둘이 혼동되는 지점에 〈곡예사훈련〉은 불안정하게 위치하지만, 그것은 결국 서커스의 진정성보다는 제도와 예술의 연루라는 더 큰 범주를 가시화하는 것에 가깝다. 곧 밋밋한 서커스의 이상에의 핍진한 재현으로서 마지막 장면이 앞선 갈등의 씨앗을 온전히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컨컨 CONTCONN
다원 <곡예사훈련>2026.02.05 ~ 2026.02.07Space111
기획 두산아트센터
작∙연출 김준봉
드라마투르그 손옥주
출연 권해원 김준봉 박상현 손옥주
영상 장주희
음악 신세빈
조명 김지우
조연출 정은재
프로덕션 무대감독 이라임'REVIEW > Perform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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