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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아 & Jini Kim, 《메스매스》: 실재 위의 가상, 그리고 임시적 역사로서 퍼포먼스의 시간
    REVIEW/Visual arts 2026. 4. 10. 21:46

    박정아 & Jini Kim, 《메스매스》[사진=메스매스](이하 상동).

    《메스매스》는 박물관을 흉내 낸 의사-박물관 혹은 가짜-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데, 더 정확히는 박물관보다는 거대 미술관의 제도적 형상을 소환하며 전유함으로써 그것을 비트는 데 목적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건축적인 것이고 일차적으로 그 안에 인터페이스와 인터랙션의 디자인을 더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서 작품이자 매체라는 것이 중요하다. 곧 전시장은 비어 있는데, 예컨대 국립현대미술관을 참조해 재구성한 이 전시장은 그 경계의 표면에서 미술관의 ‘그것’으로 식별되는 것이 작품을 지시하며, 작품으로서 자리를 메운다.

     

    하지만 진정한 내용으로서 부가되는 건 전시 자체에 보족되는 작가의 포트폴리오인데, 관람객 벤치에 놓인 이 포트폴리오는 기존 박진아의 퍼포먼스 연대기의 하나로 연장되는 퍼포먼스라는 세계의 누빔점이다―그로부터 퍼포먼스가 포트폴리오를 두는 (소거된) 몸짓으로 풀려나온다. 그러니까 그 어디에도 박진아의 자취는 없다―또는 닫혀 있다. 반면 “세계적인 건축가”로 가짜 표상된 Jini Kim은 이 모든 건축적 형상을 설계하고 제작 전반의 과정에 개입한 주체로, 이 미술관의 실질적 창조자로 자리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두 작가 모두 텅 빈 공간과 함께 사라진다―박진아가 과거의 형상으로만 현재화된다면, Jini Kim은 건축의 상징적 이미지 안에 은폐된다.

     

    서울 외곽의 낡고 허름한 건물을 전유한 이 전시는 실재와 접면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가시화시키기의 기술을 통해 은폐된다. 곧 가시화의 기제는 그 세계 내에서 상징계적 질서를 조소하지만, 그 국소 차이의 효과로써 그 질서를 공고한 것으로 고착시킨다. 곧 전시는 비틀린 원본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데, 이때 충분히 읽히는 풍자와 조소의 영역으로 미술관을 소환하는 여러 이미지는 SNS의 전파를 거쳐, 그곳에 이르지 않고도 ‘거의 모든’ 그 코드적 메시지를 띤 발신의 요소를 추출해 내는 동시에 다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곧 그러한 이미지들이 전시를 누빈다.

     

    정작 관객은 그 미술관이 시작되는 장소를 포착하지 않음으로써, 어쩌면 그 경험이 ‘망각’됨(에 의해 그러함)으로써 미술관의 진정한 경계로서 완성되는 《메스매스》는 누락되어 자리한다. 이는 실제 건물을 마주하고, 전시장의, 전시장으로서 이미지들이 “뮤지엄”이라는 관념―그것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대로 계승하면서―과 연합하면서 실재의 자리를 축출하는 경로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데, 그 실재의 영역은 일종의 신생공간에 대한 경험, 또는 경험으로서의 신생공간이다.

     

    각기 다른 사무실들이 층별로 위치한 건물 계단을 연이어 오르고 도어락이 해제된 철제문의 손잡이를 열 때 그 실재는 망각되는데,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1층의 대형 거울은 이 장소를 환기하는 잔여로서, 바로 그 잔여로서 전시를 가리킨다. 그 잔여로 떠돌며 ‘임시로’ 정착하고 사라진 신생공간의 자리를 미술관이 대체하고 있음 자체로 전시를 완성한다. 그러니까 미술관에 대한 제도 비판적 우화가 도달하는 건 결국 망각에 대한 망각으로, 관객은 미술관에 접근하며 그것이 원본으로서 미술관을 전적으로 따라 하고 있음을 목격하지만, 그리하여 그것은 곧 미술관을 그 자체로 지시하지만, 결코 ‘그’ 미술관이 우리를 위해 진정 열린 공간이 아님을 목도한다. 거기에는 결국 텅 빈 기표만이 충만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거된 건 미술관이 아니라, 주체인데, 거기에는 작가가 없고 단지 이름만이, 미술관만이 있다. 하지만 대체되는 미술관이 진짜 보여주는 건 매끈한 언어의 매끄러운 표면에의 접착―곧 조소하는 언어의 유려함―이 아니라, 공간 제작 및 설치의 영역이 가진 한계, 공간의 솔기, 공간 자체의 불가능성과 한계이다. 가령 “야외마당”으로 가는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좁은 베란다와 전시 도구나 자재, 흰 창틀과 닫힌 창 아래의 일렬로 나란히 세워진 담배곽들과 그 옆 물에 잠긴 수북한 담배꽁초들이 담긴 페트병들의 혼잡스러운 이미지가 드러난다.

     

    사실 전시장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표상되지 않는 이 미술관에서 “로비”에서 “미술관 마당”으로 이어지는 좁은 틈은 신체를 옥죄는 곤궁한 경로로, 마당 역시 사방의 벽 자체에 ‘막혀’ 있으며, 유일한 해방구는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 다소 높은 위치의 “성중립화장실”이다. 성중립화장실은 그래서 마치 유일하게 좌대 위에 올라간 오브제인 것처럼 보이는데, 문을 열면, 일반적인 공중 화장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실은 하얀색 페인트로 도포한 나무 합판으로 구조화된 공간은 완전히 마감되지 않은 부분을 안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완전한 실재로의 새어나감을 임시로 메우는 실재의 봉쇄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가상적 현전은 ‘베일’의 자리로서 뒤집힌다.

     

    이러한 실재가 안에서 도입된 예외적 공간은 휴게실 안의 “물품보관소” 맞은편의 “피난구”로, 그 아이콘 위의 화살표 방향이 가리키는 익숙한 갈색 구형 창틀, 그리고 그 안의 인테리어 필름으로 덮인 불투명한 창문은, ‘출구’로 지시되며, 기능하지 못하는, 내파된/곤궁한 실패의 형상으로 전도된다. 곧 피난은 죽음의 실재에 직면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실재를 봉쇄하는 건 이 미술관으로서 지시되는 기호들이며, 그 기호들이 맞닿는 곳은 공간의 물리적 실재이다. 이 지점이 안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창문이며, 그것은 완전히 가려지는 대신, 실재와 속임수의 착종된 관념 안에서 뒹군다.

     

    “물품보관소”의 보관함들―가로로 3열, 세로로 6열―에는 상단 몇 군데에 잡동사니 짐들이 대중없이 들어있는데, 이는 미술과 비미술적인 것의 나눔으로 작동하는 미술관에서 사적 흔적들이 완벽하게 비가시화되어 처리되어 미술 바깥의 것이 되는 그 작동 원리를, 다시 실재의 차원으로 뒤집어/매개해 내용 없는 미술관에서 주요한 오브제로 전치하는 전략적 기입이다. 계속해서 지시되는 건 제도의 문법(적 이탈)이며, 그로부터 연장되어 그것이 탈락시키고 소거하는 실재(의 흔적)인데, 곧 상징계가 잠식하고 봉합하는 또는 상상계가 부풀리고 은폐하는 실재계의 자리가 그것이다.

     

    이는 각각 제도의 권력적 용어와 유토피아적 정념의 수사를 횡단하면서 빈틈을 메우는데, 따라서 《메스매스》의 건축적 작업은 그것이 실재를 완전히 가리지 못함을 겨우/간신히 막아내지 못했다고 하는 지점으로까지 밀어붙이는 것과 같다. 곧 가시성 너머의 영역을 완전히 봉쇄하지 않기 위해, 비가시화의 전략으로써 의사-현실의 가시성을 최대치까지 밀어붙여서, 그것이 전도되는 지점으로부터 다시 쓰이기를 계획한다―그 비가시성의 전략 가운데 과거의 시간으로 점프할 수 있는 예외적 대상이 또한 박진아의 포트폴리오이다. 그 과정에서 비가시성의 영역이 가시성의 단면을 훼손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된다, 환상이, 현실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전시장에서는 무언가를 만져서도 안 된다라는 대타자의 법 역시 자리하는데, 《메스매스》는 그것을 환상으로 유지시키면서 그것을 사용한다. 작가의 포트폴리오는 도록과 같이 전시의 부가적인 차원으로 덧대어지면서 유일하게 만질 수 있는 대상인데, 그 예외적 차원이 전도되는 지점으로부터 작품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것이 곧 벤치라는 ‘좌대’ 위에 놓이는 것이다―또는 벤치를 좌대로 바꾸며 작품으로 변전되는 것이다. 그것과 거의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또 다른 대상이 자리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레디메이드적 전유이다.

     

    곧 “전시장지킴이가 자리에 두고 간 책”인 프랑스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가 서신 교환식으로 쓴 글들을 엮은 책 『무대』가 그것인데, “무대”는 이 모든 게 가설된 공간이며, 현실과 구분되는 독립된 응시의 공간임을 메타 언설한다. 이것은 또한 지극히 은밀한 것으로서 『무대』가 가리키는 장르와 같이 연극적인 것이기도 한데, 거기에는 일련의 행위가 부가되어 장면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밀한 퍼포먼스이자 전시장의 규약을 환상적으로 가로지르는 또 다른 장치가 된다.

     

    어떤 응시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은밀하게 도입하는 전시장 지킴이의 그 흔적을, 그러니까 미술관에서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은 이상 만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애초에 의도를 가지지 않고 전시되는 그 사물 역시 그러함에도, 그 전시장 지킴이가 영속적으로 부재함으로써 그것은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서 그 유혹을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안내데스크”의 모니터의 “MMMA 이용 안내” 사항의 하나로, “몰래 읽어도” 되는 책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무대』는 다시 한번 이것이 진정 연극적인 것임을 명시하는데, “‘접촉’은 그리스어로 haplo라고 하지. 프랑스어에서는 촉각을 뜻하는 압티크haptique라는 단어가 시각을 뜻하는 옵티크optique라는 단어와 종종 혼동되곤 하지… 시각적인 것(옵티크)을 촉각적인 것(압티크)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는 것 같군―그런데 바로 이것이 연극의 쟁점이 아닌가?”와 같이 어떤 것을 ‘분별’해 내는 시각적 작용이 아닌, 무언가가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포트폴리오라는, 『무대』라는 책을 만지고 펼치는 행위 자체로써 연극을 구성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전시장에 놓이는 신체는 관람객이 아니라 일종의 배우이다.

     

    전시장 안에는 결국 박진아의 과거만이 (독립된 내용으로서) 자리하는 것처럼―『무대』는 또 다른 세계를 들여오거나 그 세계 밖으로 함께 나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전시의 또 다른/엉뚱한 상상적 경계이다. 그것은 ‘남’의 사물을 은밀하게 손댄다는 의미에서 페티시이다(물론 “몰래 읽어도” 된다고 했지 만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읽기’는 그 접촉을 위한 명목 같은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독립된, 텅 빈 형식을 이룬다.―, 거기에는 앞당겨 온, 소거된 미술의 영원한 현재성만이 있다.

     

    또한, 이 전시장의 문이 신생공간의 공간이 그것이 위치한 일상에서는 닫힌 기호로 있으며, 미술 애호가, 미술 관계자 들에게만 통용되는 포털을 지시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처음부터 이 전시가 그 신생공간의 임시적인/변칙적인 전시와 조응하는 임시적인 전시장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과 같이 〈메스매스〉는 상징적 차원과 그것의 다시 쓰기가 어떻게 세척된/매끄러운 미술계 바깥의 어긋난 욕망으로 분포하는지를 보여준다.

     

    안내데스크의 모니터는 ‘구별 짓기’를 통해 신분을 나눈다. 일반 소시민 이하의 계층을 공백으로 두고 상위 계층만을 “유료관람 대상자”로 호명하여 역차별 또는 모욕한다. 곧 각종 문화예술 관련 국공립 기관 종사자나 유수 미술상 수상자, 소득이 높거나 인싸이거나 한 사람―“예술인 패스 소지자”도 있는데, 이는 예술활동증명 심사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현재에 비추어 (예술활동증명이 필요조건이 되는) 그것 역시 제도 안에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을 예술 바깥의 차원으로 ‘순수하게’ 처리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역시 동반할 수 있다.―을 “유료관람 대상자”로 지칭하여 20,000원의 요금을 낼 것을 요구하는데, “자율 운영 시스템”을 따라 실제 비어 있는 공간 전체에서 이를 받을 사람은 없으므로, 이는 실제 이행될 수는 없지만, 분명 작동한다. 그러나 그들은 공고한 자신의 위치를 그로써 확인한다면, 반면 진짜 루저가 되는 건 그 나머지 사람들인데, 그들은 돈도 특별한 명예나 직업도 없는 대부분의 예술가의 자리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는 투명하게 작용하는 미술관의 가이드이지만 실은 규율인 그 대타자의 목소리가 마치 그들에게는 예외로 작동할 거 같은 환상을 만든다. 사실상 규율의 형식을 차지하는 건 그 규율을 마음대로 전유하는 무한한 자율성―“전시 종료 1분 전까지 입장 가능”과 같은―인데, 곧 상징계를 상상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일단의 긴장은 곧 새어나가게 된다. 이는 이상적 미술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법의 자리를 일시 탈환해서 해방을 느끼는 장난에 가깝다. 그 장난은 미술관이 전적으로 우리가 부재하는 곳임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실제 미술관은 텅 비어 있고, 그 부재의 자리가 우리로서만 체현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전유하는 것이다, 향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지막으로 법의 목소리와 중첩되는, 또는 그것을 탐하며 대체하려는 환각의 목소리가 자리한다. 안내데스크와 접면한 벽 아래, 좌우로 구멍들이 뚫려 있는 곳으로 흘러나오는 이 음성은 “립싱크(Lip Sync)”에서 “플랫폼(Platform)”으로 흐르는 일련의 궤적을 반복하는데, 거기에 들리는 말은 MMMA 이용 안내의 한 사항에서 알 수 있다. “간혹 프랑스어로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 양이 들어있는 상자를 기대하지 마시고 상자 속의 양이 되십시오.”라는 이 문장은, 그 목소리를 밝히면서 전시의 태도로서 이념을 명시한다.

     

    곧 《메스매스》는 전반적으로 미술관의 질서를 표식하는 언어들의 전유를 통해, 그 자체로 넌센스인 언어 자체로의 형질 변화를 이뤄내는데, 그것은 그 말들의 보조에 단지 가짜로 입을 맞추는 것, 곧 립싱크의 행위와 같은 것이며, 이러한 빈 공간 위의 표식들로서 전시가 하나의 플랫폼을 구성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그리하여 그 무대 위에 전시를, 미술관을 통째로 올리는 행위임을 지시한다. “엉망(mess)과 덩어리(mass)의 조합”―그것은 분명 곤란한 타대상의 조각 매체적 환원을 상기시킨다.―으로서 ‘메스매스’라는 조어를 따라, 《메스매스》는 엉망과 덩어리의 미세한 분별―‘e’와 ‘a’―과 함께, 그 섞여 들어감의 두 다른 사태‘에’ 관객을 밀어 넣는다.

     

    김민관 편집장

     

    [전시 개요]

    일시: 2026년 2월 25일 - 2026년 3월 15일, 13:00 - 19:30(월 휴관)
    장소: 메스매스(서울 도봉구 도봉로169나길 32 401호)
    *전시 첫날(2/25)은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운영합니다.

    기획: 박정아
    A.M.U 디자인: 최정화
    포스터 디자인: 김정민
    협력: 김현승 박주원 이채린
    F&B: 메스매스
    주최·주관: 메스매스
    후원: 송지민 조성효 메스매스

    서울문화재단 2026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미지원 프로젝트.
    본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6년 청년예술가도약지원>을 통해 지원받아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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